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83화 (83/468)

83화. 재관류손상을 막는 법 (1)

‘뇌졸중이…… 뭔데요?’

깨달음과 함께 가슴이 철렁 내려앉던 순간, 십수 년 전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애써왔는데. 이제는 세월이 흘러 희미해졌노라고. 그때의 상처는 흐려진 흔적으로만 남았노라고. 그러니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더는 그때가 괴롭지 않다고. 그렇게 애써 스스로를 속여왔는데.

지금, 이렇듯, 어찌할 도리조차 없이, 그날의 기억이 강제로 떠오르고 말았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던 날. 그 연락을 뒤늦게 받았던 순간. 그날의 한심했던 내 모습. 너무나 후회되는 내 행동. 잔인하도록 선명하게, 그렇기에 하염없이.

‘젠장.’

그때가 생각났다.

엄마한테 전화가 몇 통이나 왔었던가. 하지만 몰랐다.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날의 피씨방이 유독 소란했던 탓도 있었다. 그날 어쩐지 게임이 너무 잘 됐던 탓도 있었다. 아니, 그보단 내가 한심한 탓이 제일 컸다.

뒤늦게야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야자하느라 몰랐다고. 폰을 무음으로 해뒀었다고. 전화가 와도 알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새빨간 거짓말을 준비하고서 전화를 걸었던가.

하지만 엄마가 전화를 받았던 그 순간. 낯설게 떨리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 순간. 차곡차곡 준비했던 새빨간 거짓말이 새하얗게 흩어지고 말았더랬다.

아빠가 쓰러지셨다고. 지금 병원이라고. 뇌졸중이라고. 그래서 무심결에 엄마에게 되물었던 첫 마디가 저거였다.

뇌졸중이 뭐냐고 물었다.

하지만 이미 다리는 뛰고 있었다.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고 있었다. 같이 있던 친구들한테 뭐라고 대답했는지. 택시를 어떻게 잡고 뭐라고 말을 했는지. 지금도 잘 생각이 나지가 않았다.

다만 아직껏 확실한 기억이 하나 있다. 새하얀 병원 침상에 거짓말 같은 모습으로 누워 계시던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한데 그 모습이, 마치, 꼭.

‘뭔데. 황제 당신, 어째서 그때 우리 아버지랑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라키엘은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입술을 독하게 깨물었다. 저릿한 통증이 과거의 기억을 몰아냈다. 기억이 던져주는 더욱 저릿한 후회를 걷어냈다.

‘정신 차려, 등신아. 지금이 옛날 기억이나 떠올리며 질질 짜고 있을 때냐.’

스스로를 다그쳐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러자 비로소 상황이 제대로 보였다.

황제가 쓰러졌다.

한눈에 봐도 원인을 알겠다. 황제의 한쪽 얼굴 근육이 온통 뒤틀어져 있다. 의식조차 차리지 못하고서 무력하게 누워 있다. 몸의 자세도 어딘가 균형이 맞질 않고 부자연스럽다. 몸의 근육도, 근육을 잡아주는 신경 신호도 죄다 틀어졌다는 뜻이다.

‘뇌졸중. 중풍(中風).’

라키엘은 시종장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건, 이쪽이 대답을 드릴 수 있을 듯하옵니다.”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물러나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 장년인 하나가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장년인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의 주치의, 파사로가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지금은 복잡한 인사보다는 상황부터. 폐하께서 쓰러지신 지는 얼마나 됐지?”

“그게, 하룻밤이 지났습니다.”

“……뭐?”

라키엘은 멈칫했다.

하룻밤이나?

“그럼, 원인은?”

“그것이…….”

“원인은?”

“그것이…… 어제저녁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폐하께서 이상하도록 술에 많이 취하셨습니다.”

“술에 취해? 이상하도록? 그게 무슨 말이지?”

“폐하께서는 와인 한 잔을 마셨을 뿐이셨습니다. 한데 만취한 모습을 보이셨지요. 혀가 꼬인 듯 말이 어눌해지고, 걸음을 비틀거리셨습니다. 하여 일찍 휴식을 취하실 것을 권하여드렸습니다.”

“…….”

“그렇게 폐하께서는 침소에 드셨습니다. 한데 오늘 아침에 보니…….”

“이렇게 되어 계셨다고?”

“예, 전하.”

“…….”

라키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 들어보니 알겠다. 아무 이유 없이 만취한 듯한 증상. 말이 어눌해지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전형적인 뇌졸중 증상이잖아.’

한데 이 주치의는 그걸 짚어내지 못했다. 그저 황제의 컨디션이 나빠진 탓이리라고. 넘겨짚으며 휴식을 권했다. 그렇게 황제가 침소에 든 사이. 뇌졸중 초기에 대처할 수 있을 생명 같은 골든아워가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라키엘은 섣불리 화를 내지 않았다. 지금은 화를 낼 시간조차도 아까운 때다. 문제의 해결이 우선이다. 그는 재차 물었다.

“하면, 아침에 황제 폐하를 발견한 뒤로는 어떤 조치를 하였지?”

“우선 폐하의 상태를 진단하였습니다.”

“진단 결과는?”

“극심한 두통에 따른 심각한 마비 증상이라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 하여 제가 지닌 약을 조합하여 처방을 하였습니다.”

“어떤 처방?”

“주로 두통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약을 조합하고, 근육의 마비증 해소에 탁월한 효과를 지닌 약초를 혼합하였습니다.”

“그게 끝인가?”

“물론 더 있습니다, 전하. 뜨거운 물을 적신 수건으로 폐하의 팔다리 근육을 찜질하였습니다. 그런 덕분인 듯합니다.”

“덕분이라니?”

“폐하의 얼굴 뒤틀림이 심해지던 것이 차차 멈추었고, 더 악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라키엘은 할 말을 잃었다.

저런 처방과 조치로는 부족하다. 너무나 많이 부족하다. 한데 저 주치의는 자신의 대처가 부족한 줄을 모르고 있다.

‘미치겠네.’

만약 어젯밤 황제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한 사람만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골든아워를 놓치지 않았을 터다. 황제의 상태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황제는 연초를 끊었노라 했는데. 다시 검을 잡고 건강관리를 한다고도 들었는데. 한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이러면 마검황의 전개와 달라지는 게 없는 거잖아.’

문득, 원작 소설 마검황의 전개가 떠올랐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죽는 황제. 황위를 물려받는 2황자. 제국을 덮이는 전란. 무너지는 황가.

‘그렇게 둘 수는 없어.’

물론 지금은 황제가 죽더라도 원작 그대로의 전개가 되진 않을 것이다. 2황자가 황위를 물려받지 않을 것이다. 이쪽이 황제가 되겠지. 하지만 그건 절대로 실현되면 안 되는 일이다.

‘당연하지. 그러면 나도 오래 못 버티고 죽을 거니까.’

라키엘은 입술을 꾹 닫았다. 머릿속에서 가파른 계산이 이루어졌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대강 예상되었다.

‘황제가 이대로 죽으면? 아마도 내가 황위를 물려받겠지. 황태자니까. 2황자와의 대결에서 이겼으니까. 그렇게 자격을 증명해 버렸으니까. 한데 지금 시점에서 내가 황위를 물려받는 게 이득일까? 아니. 절대로. 오히려 그건 내 목숨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불러올 거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황제라는 자리는 결코 한가한 자리가 아니다. 그야말로 온종일, 눈코 뜰 새도 없이 정무에 시달려야 하는 자리다.

국내외의 수많은 정치 사안. 주변 왕국들과의 외교 현안. 자잘한 정책과 귀족들 사이의 알력까지. 그 모든 것들을 조율하는 데에 평생을 바쳐야 하는, 수백 수천만 인구가 몸담은 제국이라는 항공모함의 선장이다.

그런데 이렇게 황제가 급사하고 그 자리를 물려받으면?

‘제대로 된 인수인계 절차도 없이 덜컥 황위에 앉게 되는 거지. 그러면 내가 떠맡게 될 업무량은? 엄청나다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로 많을 거야.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뒷수습하는 일부터, 그로 인해 생겨나는 국내외의 각종 갈등과 현안들을 몰빵으로 처리해야 할 거니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국내의 귀족들은? 새로운 권력 구도가 시작되는 판국에 치열한 눈치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황위에 앉은 이쪽에게 끈을 대려는 자. 그 끈을 이용하여 이득을 보려는 자. 알력을 조장하며 주도권을 쥐려는 자까지. 수많은 이들이 이쪽의 정치력을 시험하며 각자의 이득을 꾀하려 들 것이다.

‘외국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제국을 둘러싼 수많은 왕국이 이쪽을 간보려 할 것이다. 국제적이고도 은근한 기 싸움을 걸어올 것이다. 새 황제의 역량을 시험하려 들 것이다.

조심해야 할 존재인지.

만만하게 볼 상대인지.

끊임없이 이쪽을 툭툭 건드리겠지.

‘그런 일더미 폭탄에 치여 살 수는 없어. 그러다간 내가 얼마 못 버티고 죽을 거야.’

라키엘은 심각함을 느꼈다. 이건 그냥 일하기 싫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로 진지하게 목숨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다.

‘난 아직 건강하지 못하니까. 이 몸은 여전히 허약하고 병약하니까.’

그래서다.

아직 기대 수명이 200일도 안 되는 처지다. 수많은 환자를 돌보며 근근이 얻는 보너스 수명으로 연명하는 처지다.

한데 지금 덜컥 황제가 되면?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업무에 치이게 되면? 환자를 돌볼 시간 따위를 낼 수 있을까?

‘아니, 전혀.’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환자를 돌볼 시간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보너스 수명을 얻지도 못하게 된다. 기대수명을 늘릴 수 없게 된다.

죽음이 다가오게 될 것이다.

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그렇게 끝장이 나는 거지.’

꿀꺽.

계산을 마쳤다.

견적을 뽑았다.

결론이 나왔다.

‘황제가 죽으면 나도 죽어.‘

그러니까, 살린다. 무조건 살려야 한다. 라키엘은 다짐하며 황제의 침상에 다가섰다. 마음을 가라앉혔다. 마나써클을 발동했다.

키이이잉……!

심장을 둘러싼 마나의 고리를 회전시켰다. 동시에 경혈 스캐닝 옵션을 발동했다.

‘우선은 진단부터.’

츠츠츠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오로지 단 한 명의 대상. 누워 있는 황제의 모습만을 주시했다.

‘뇌졸중의 원인이 제일 중요해. 제발. 뇌출혈만 아니기를.’

라키엘은 내심 간절히 빌었다.

뇌졸중(stroke)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뇌혈관의 파열 등으로 인한 뇌출혈, 즉 출혈성(hemorrhagic)이다.

다른 하나는 혈전증(thrombosis)과 죽상경화증(ath-erosclerosis)으로 인해 혈관이 막히고 뇌에 혈액과 산소 공급이 중단되는 허혈성(ischemic)이다.

그중에서 사망률이 더 높은 건? 대체로 출혈성 뇌졸중이 한층 위험하다 볼 수 있을 것이리라.

‘제발. 제발.’

라키엘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황제의 머릿속을 꼼꼼히 살폈다. 마치 CT를 찍듯. MRI로 검사하듯. 두개골 내부의 모든 부위를 탐색했다. 별다른 출혈 부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럼 결론은 허혈성 뇌졸중인가.’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어느 부위 혈관이 막혔는지. 그래서 뇌의 어느 부위에 산소 공급이 끊겨 뇌 손상, 즉, 뇌경색(cerebral infarction)을 일으켰는지, 그걸 밝혀내야 한다. 하여야 회생 가능성과 치료 방향을 잡을 수 있다.

라키엘은 한층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지금껏 전례가 없을 정도로,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안구가 뻐근해지도록.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모세혈관 하나의 단서도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각오했다. 집중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한층 더. 끝까지. 한계까지. 그 너머까지.

그리고 마침내 그는 발견했다.

‘뭐지. 이건…… 자연적으로 발생한 혈전이 아닌데?’

깨달음과 함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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