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84화 (84/468)

84화. 재관류손상을 막는 법 (2)

혈전(thrombus).

혈관 속에서 피가 굳어진 덩어리. 어떤 사람이건, 몸에 어느 정도의 미세한 혈전은 있다.

하지만 혈류가 느려진다든가. 응고 과다 현상이 일어난다든가. 혈관이 손상된다거나 해서 혈전이 과도하게 생성되면?

거의 반드시, 각종 문제를 일으킨다. 혈관을 틀어막는다. 혈류의 흐름을 방해한다. 만약 그 방해를 받는 부위가 두뇌라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바로, 눈앞에 쓰러져 있는 황제처럼.

‘……뭐야 이거.’

라키엘은 미간을 와락 찡그렸다. 뒷목이 뻐근해질 만큼 극한으로 끌어올린 집중력. 덕분에 황제의 머릿속을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마침내 혈전으로 막혀 뇌경색이 일어난 부위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앞아래소뇌동맥영역 뇌경색(anterior inferior cerebellar artery territory infarcyion)…….’

두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소뇌(cerebellum). 그곳의 중간 소뇌 다리(middle cerebellar peduncle)와 외측 다리뇌(lateral pons)가 손상된 게 보였다.

원래는 그곳을 활발하게 물들여야 할 마나의 흐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뇌신경(cranial nerve) 손상의 징후였다.

‘이러면…… 같은 방향의 얼굴신경마비(facial palsy), 삼차 신경 감각장애(trigeminal sensory loss), 청각장애(hear-ing loss), 이명(tinnitus), 사지 조화운동불능(limb ataxia)이 동반되겠지.’

문득, 학부생 시절에 배웠던 내용이 떠올랐다.

흔히들 한의대생이면 침술과 경맥 등의 공부만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달랐다. 각종 병리학, 의역학, 생리학, 해부학, 조직학, 미생물학, 면역학, 의학 진단학, 세포생물학, 응급의학, 진단검사의학, 신경정신의학 등등.

그 밖에도 수많은 현대적 커리큘럼을 이수해야 했다. 그런 덕분이었다. 황제를 진단하며 깨달을 수 있었다. 뇌경색 발생 부위가 좋지 않았다. 특히, 소뇌에 뇌경색이 발생했다는 점이 더욱 안 좋았다.

‘뇌경색의 크기가 아슬아슬해. 여기서 더 커지면 부종이 뇌간을 압박(herni-ation)하거나 뇌실(ventricle)을 폐색하면서 수두증(hydro-cephalus)을 유발할 수 있어. 그러면 호흡장애까지 올지도 모르고.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야.’

라키엘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그의 눈길이 황제의 소뇌를 향했다. 소뇌로 흘러들어 가는 앞아래소뇌동맥을 향했다. 그곳을 틀어막고 있는 혈전 덩어리를 주시했다. 혈전의 모양이 이상했다.

‘도대체 왜…… 혈전에서 잔선이 안 보이지?’

잔선(lines of Zahn).

그것은 혈전의 나이테 같은 흔적이었다.

‘사람이 살아 있는 이상, 혈액의 흐름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혈전이 생겨나니까. 한순간에 확, 하고 생기는 게 아니니까. 차츰 생겨나니까. 그래서 잔선이 생기지. 혈액이 흐르는 와중에 혈전이 불어나던 과정이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인 층으로 새겨지는 거야. 그런데 왜…… 이 혈전에는 잔선이 없지?’

잔선이 없는 혈전. 그건 사람이 죽은 후에 혈관 속에서 생성되는 핏덩이(postmortem clot)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한데 황제의 혈전이 그러했다. 잔선이 전혀 없이 매끈하기만 했다. 상식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절대로 정상이 아니다.

이건, 뭔가 있다.

‘자연적으로 생긴 혈전이 아니야.’

외력에 의한 것이든. 약물에 의한 것이든. 혹은 또 다른 농간에 의한 것이든. 지금 황제의 뇌혈관을 가로막은 혈전은 절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

누가?

무엇을 위해?

‘혹시 여기 있는 이들 중의 하나일까.’

시종장, 근위기사단장, 주치의까지. 황제의 가장 최측근에서 움직이는 이들. 설마 이들 중에 누군가가 황제에게 은밀하게 손을 쓴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의심에만 매달려 있진 않았다. 지금은 치료가 우선이다. 의심은 황제를 살린 뒤에 해도 늦지 않을 터.

“혹시 아침에 폐하께 처방했다는 약재를 자세히 볼 수 있을까?”

주치의에게 물었다. 나름 자신이 있는 걸까. 주치의가 의기양양한 투로 대답했다.

“예, 전하. 이것이옵니다.”

이내 주치의가 가져온 것은…….

“아로니아 잎을 말려서 쪄낸 것이옵니다.”

“이게 마비에 효험이 있다는 약초?”

“예, 전하. 손발의 경련과 근육의 저림을 풀어주는 데에 탁월한 효과가 있사옵니다. 이는 제가 경험적으로 12년째 사용하며 여러 환자를 치료한 배합으로서…….”

“그만. 거기까지.”

“……예?”

“안타깝지만, 이걸론 안 돼.”

라키엘은 자르듯이 말했다.

어림도 없다. 지금 황제는 근육이 문제가 아니다. 막힌 혈류 때문에 뇌조직이 산소를 공급받지 못해서 죽어가는 중이다. 한데 주치의는 그걸 전혀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여기선 안 되겠어.’

아무래도 황제를 별궁 한의원으로 옮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곳에서 집중치료를 받는 쪽이 나을 듯했다.

한데 그때였다. 침실 문이 열렸다. 처음 보는 새하얀 옷의 노인이 들어왔다. 시종장이 노인을 보며 반색했다.

“아. 대주교님, 잘 오셨습니다.”

……대주교?

저 노인이?

라키엘이 쳐다보는 사이, 대주교가 황제를 향해 예를 올렸다. 그리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신의 품에서 모두가 평안하길. 대주교 베르토나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입니다. 혹시, 폐하를 치료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까?”

대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이른 아침에 부름을 받을 때부터 제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이가 있을 것이라 여기고 걸음하였습니다. 그 대상이 폐하이실 줄은 몰랐지만 말입니다.”

대주교가 황제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법복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기도를 하는 걸까. 혹은 소설에서 몇 차례 언급되었던 신성 축원을 시도하는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라키엘은 한 발짝 물러섰다. 대주교의 기도와 축원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한편으로 내심 기대했다.

‘제발. 신성력이든 뭐든 어떤 거라도 좋으니까.’

효과가 있으면 좋겠다. 황제의 상태가 호전되면 정말 좋겠다. 바라고 기원하며 주먹을 꾸욱 쥐었다. 한편으로 경혈 스캐닝 옵션을 유지했다. 고위 성직자의 축원. 그 기도가 어떤 치료 효과를 발휘하는지 직접 관찰했다.

키이이잉-!

안구가 뻐근해지는 감각.

대주교의 축원이 이어졌다.

“…….”

무어라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대주교. 눈을 감고서 한 손을 황제의 머리에 올려두고 있었다. 그 이상의 거창한 동작은 없었다. 그저 온몸으로 진땀을 뻘뻘 흘렸다. 차츰, 황제의 몸속에서 변화가 생겨났다.

츠즈즈…….

뇌경색으로 망가져 있던 황제의 소뇌. 혈류가 통하지 않아 죽어가고 있던 뇌세포. 그 치밀하고도 복잡한 조직들이…….

‘되살아나고 있어?’

라키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엔 잘못 본 줄로만 알았다. 자신이 착각을 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세포가 재생하고 있어.’

죽어가며 마나가 끊어져 있던 황제의 뇌세포였다. 마나의 광채가 깃들지 못해 시커멓게만 보이던 부위였다. 한데 그 세포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미약한 마나의 광채가 깃들고 있었다!

“…….”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꿀꺽.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걸까. 믿기지가 않았다.

‘원래 뇌세포는 한번 망가지면 재생이 거의 불가능한 기관인데…….’

한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문득, 희망이 피어났다.

‘어쩌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이게 대주교의 신성력이라는 걸까. 소설에서 몇 번 언급된 건 봤는데, 실제로 관찰해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자신의 한의학이 그냥 찌그러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도 상관없어. 황제만 살면 돼!’

라키엘은 열심히 응원봉을 휘두르는 심정으로 대주교를 응원했다. 신성 축원이 약빨(?)을 200% 발휘해주길. 그래서 황제가 완전히 치유되길.

바라고, 기원했다.

원하고, 기도했다.

마침내 신성축원이 끝났다.

“……후! 후우!”

대주교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황제에게서 손을 뗐다. 온통 땀투성이가 되어 주저앉았다. 신성 축원을 내리기 위해 엄청난 기력을 소모한 듯했다.

‘그럼 황제는?’

라키엘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황제를 돌아보았다. 경혈 스캐닝으로 뇌경색 부위를 관찰했다.

츠즈…… 즈즛…… 즛…….

대주교의 신성 축원을 받아 재생에 성공한 세포 조직이 보였다. 희망 가득 밝은 마나가 깃들어 있었다. 되살아나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에 불과했다.

즈즛…… 즈…….

살아났나 싶었던 뇌세포 조직이 급속도로 활기를 잃었다. 환하게 깃들었던 마나의 광채가 사라져 갔다. 라키엘은 그 원인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혈전이 제거되지 않았어. 여전히 혈관을 막고 있어. 저렇게 혈류 공급이 여전히 끊겨 있으니까…… 뇌세포 조직이 되살아났다가도 다시 죽어 버리는 거야.’

라키엘은 혀를 찼다.

대주교의 신성 축원은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죽었던 뇌세포 조직을 되살려내는 기적을 만들었다. 하지만 뇌졸중의 원인은 제거하지 못했다.

‘혈관을 틀어막고 있는 저 혈전. 저것부터 없애야 해.’

라키엘의 눈길이 혈전을 향했다. 이제는 명확해졌다. 저 혈전을 제거해야 한다. 무조건 그게 우선이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

라키엘은 기억 속 지식을 되짚었다. 한의학과 시절 장학금을 위해 코피 터지도록 외우고 익혔던 병리학과 각종 의학적 지식을 떠올렸다.

그걸 이곳에서 어떻게 활용할지. 현대적 약물이 없는 상태에서 어떤 임기응변을 동원할지. 그 과정에서 재관류손상(reperfusion injury)은 어떻게 막아낼지.

고민을 거듭했다.

두뇌를 혹사했다.

방법을 모색했다.

마침내 떠올렸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따라주면 좋겠는데.”

대주교와 시종장.

근위대장과 주치의.

모두를 향해 말했다.

“궁정 마법사 자네티스를 불러줘.”

“……예? 자네티스 경을 말입니까?”

“어.”

되물어 오는 시종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힘주어 말했다.

“지금 폐하를 후유증 없이 치료하려면 그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해.”

“그의 능력이라시면……?”

“마법.”

“저기, 하지만 전하? 자네티스 경이 구사하는 마법은 사람을 치료하는 일과는 그리 연관이 없을 터인데 말입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그렇기에 그의 마법이 필요한 거고.”

“어떤…… 마법을 말씀이십니까?”

“빙결 마법.”

“예?”

“일단 폐하를 꽁꽁 얼려볼 생각이라서.”

“……예에에?”

경악으로 물드는 모두의 시선. 그걸 태연하게 받아내며 라키엘이 희미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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