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재관류손상을 막는 법 (3)
혈관이 막혔을 땐 뚫으면 되는 줄 안다. 다시 피가 통하면 괜찮아지는 줄 안다. 대부분은 그렇게들 알곤 한다. 자신도 예전엔, 관련 수업을 받기 전엔 막연히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그냥 혈관을 뚫으면? 오히려 큰일이 난다. 더 심각한 조직 손상이 스플래시 대미지로 뻥뻥 터진다.
‘재관류손상 때문이지.’
라키엘은 기억을 되짚었다.
재관류손상. 그건 혈액의 공급이 장시간 끊겼던 조직에 갑자기 혈류가 재개통될 때 일어나는 광범위한 손상이었다.
‘세포 내에 칼슘과잉(calcium overload) 증상이 일어나지. 그래서 세포 내의 미토콘드리아가 망가지고. 대량으로 생성되는 하이드록실 라디칼(hydroxyl radical) 같은 활성산소종이 염증을 일으키며 백혈구를 과도하게 집합시켜. 한마디로 세포 단위에서부터 차곡차곡, 디테일하게 조직을 박살 내는 거지.’
비유하자면?
10일 굶은 사람에게 치킨 100인분 먹이기. 10년 금주하던 사람에게 보드카 100리터 원샷 시키기. 혹은 10년 동안 누워만 있던 중증 근손실 환자에게 100킬로그램 스쿼트 시키기.
……등등과 비슷한 행위일 것이다.
‘한마디로, 섣불리 하면 안 될 짓이라는 거지. 재관류손상이 딱 그래.’
그러니 그냥 혈전을 뚫으면 안 된다. 황제를 살리고 뭐고 그냥 망하는 거다. 재관류손상을 막을 확실한 대책을 세워두고 뚫어야 한다. 그러한 일념으로 라키엘은 모두를 돌아보았다.
“이제부터 나는 폐하의 마비 증상을 풀어볼까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준비해야 할 부분이 있어. 그게 바로 빙결 마법이야.”
그는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
“마비를 풀기 전에 체온을 낮춰야 하니까 말이지.”
그래야 한다.
그게 최선이다.
재관류손상의 피해를 막으려면? 신체의 신진대사율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세포 내의 급격한 변화가 줄어드니까. 그만큼 재관류손상에 의한 조직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고. 그러려면 안전한 범위 안에서 체온을 낮추는 것만큼 효율적인 방법이 없어.’
저체온 요법. 그건 실제로 재관류손상이 예상되는 환자에게 대학병원 등에서 사용하는 처치법이었다. 라키엘은 심플한 설명을 그럴듯하게 덧붙였다.
“폐하께선 어젯밤부터 전신이 마비되어 계셨지. 그런데 갑자기 그 마비가 풀리면? 근육이 갑작스럽게 놀라며 손상을 입게 될 거야. 심각한 후유증이나 장애가 남을지도 모르고. 그래서야. 빙결 마법으로 체온을 낮춘 상태에서 우선 마비부터 풀고, 그 후에 몸을 따뜻하게 해주며 근육을 달래주는 건.”
“아…….”
혈전이니 뇌졸중이니, 재관류손상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괜한 소리들을 해보았자 이해 못 할 테니까. 지식의 출처에 대한 의문과 의구심만 살 테니까.
라키엘은 사람을 보냈다. 궁정마법사 자네티스 경을 긴급히 호출했다. 그리고 대주교를 돌아보았다.
“대주교님께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예. 하문하소서, 전하.”
대주교가 숨을 골라내며 대답했다. 라키엘이 물었다.
“조금 전에 사용했던 신성 축원 마법 말입니다.”
“예, 전하.”
“혹시 서너 시간 후에 다시 써줄 수 있습니까? 지금 많이 지쳐 보이긴 하는데.”
“아, 그건…….”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빙결 마법의 보조를 받아 혈전을 제거한 직후에 신성 축원으로 조직을 재생시키면? 어쩌면 후유증 없이 황제를 치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질문을 받은 대주교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실로 송구하지만 전하, 그건 불가능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신성 축원은 한 달에 한 번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아쉬웠다. 저 말을 듣고 나니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쯧. 미리 알았으면 그 기회, 아껴두는 건데.’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일단 혈전부터 제거하고, 한 달간 재활치료에 주력해야겠네. 그렇게 상태를 최대한 호전시킨 후에 신성축원으로 손상된 뇌조직을 재생시키면 될 거고.’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자.
라키엘은 다짐했다. 한편으로 떠오르는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럼 또 하나 궁금한 점이 있는데, 혹시 제가 신성 축원을 배울 수도 있습니까?”
“아, 혹시 신앙에 귀의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신앙에 귀의?
피곤으로 가득하던 대주교의 눈이 독실한 포교 정신으로 급 초롱초롱해졌다.
“좋은 질문이십니다, 전하. 사실 신앙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와 같은 고귀한 혈통을 지닌 분께도 물론 그러합니다. 그렇기에 성스럽고 한편으로는 어렵게도, 멀게도 느껴지는 신성 축원도 사실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독실한 마음과, 그걸 행하는 의지만 있다면 말입니다.”
“독실한 마음과 행하는 의지 말입니까?”
혹시나 해서 물었다. 배우기는 까다로울 거다. 하지만 일단 익히기만 하면 엄청난 도움이 되리라.
‘한의술과 신성 축원을 합치면…… 보너스 수명 얻는 것도 훨씬 쉬워질 거야. 아니, 그 전에 내 몸을 치료할 수도 있을 거고.’
기대감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두근거리는 심정을 안고서 물었다.
“그럼 제가 그걸 어떻게 익힐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전하.”
대주교가 사람 좋게 웃었다.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이성을 멀리하면 됩니다. 육체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손도 잡지 않으면 됩니다. 거기에 일체의 대화도 나누지 않고, 3초 이상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되십니다. 그리고 3분 이상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같은 공기를 호흡하지 않으면 되십니다. 그렇듯 이성에게 쏟을 관심과 사랑마저 신앙에 바치면 되십니다.”
“…….”
“그걸 30년만 실천하면 되십니다, 전하.”
“예에?”
“고작 30년입니다. 신앙의 이름 앞에선 그리 긴 시간도 아니지요. 그것만 실천하시면 신성 축원의 축복을 얻게 되실 겁니다. 어떻습니까? 실로 쉽지 않습니까?”
“…….”
퍽이나!
아니, 설령 쉽다고 해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 무렵이었다.
“폐하, 신, 자네티스가 폐하의 부름을 받고 당도하였사옵니다.”
문앞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자네티스 경이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의 모습을 보더니 경악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에게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이러이러해서 황제가 위급하다고. 하니 치료를 시작할 거라고. 그 치료에 경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그러니까, 폐하께 빙결 마법을 사용하라는 말씀이신 겁니까, 전하?”
“어. 바로 그거지.”
“정말로 빙결…… 마법을 말입니까?”
“응. 안 죽을 정도의 범위 안에서 최대한 차갑게.”
“…….”
“전에 나랑 같이 일해봤지? 뇌전증 아이 치료할 때. 그때랑 비슷해. 그땐 경이 내가 안 죽을 정도로 조절된 전격마법을 사용해줬잖아?”
“하지만 그건…….”
“그때와 똑같아. 원래는 강력하고 치명적인 위력을 지닌 마법이지. 빙결 마법도 마찬가지일 거고. 하지만 경이니까 조절할 수 있을 거잖아. 사람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하게.”
“…….”
“그러니 경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해. 그 도움이 없으면 폐하께서 더욱 위독해지실 거고.”
“그 말씀이 정말이십니까?”
“그럼. 내가 거짓을 말할까.”
“…….”
자네티스 경은 황태자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처음엔 솔직히 일말의 의심도 들었다.
만약 황제가 지금 죽으면? 황태자가 황위를 물려받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황태자가 혹여나 삿된 권력욕을 품은 건 아닐까. 황위에 대한 욕망으로 혈육의 정마저 저버리려 드는 것은 아닐까. 그 욕망을 위해 이쪽의 손을 빌려 황제를 해하려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의구심은 잠시 후 말끔히 날아갔다. 최근까지 황태자가 보였던 정치적 행보를 떠올린 덕분이었다.
‘하긴, 전하의 행동은…… 권력욕을 지닌 사람의 것이라 보기엔 어려운 행보였지.’
돌이켜볼수록 독특한 행보였다. 별궁에서 주구장창 환자들만 돌보았다. 황도의 그 어떤 주요 귀족과도 교류를 나누지 않았다.
자신을 지지해달라거나. 2황자와 연을 끊고 자신의 줄을 잡으라거나. 훗날 자신이 황위에 앉게 되면 어떠어떠한 감투를 주겠노라 약속한다거나. 하는 등등의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욕심이 아예 없는 사람. 혹은, 자신이 황위에 앉을 일이 없으리라 여기는 사람 같은 행보였다. 그런 점이 참으로 이상했다.
‘당연하지. 그저 황위를 물려받는다고 권력이 생기는 게 아니니까. 수많은 귀족들의 지지가 있어야 정치적 정통성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니까. 한데 황태자는 그런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어. 아무런 안배도, 준비도 하지 않았지. 그러니…… 지금은 저 괴상한 명령을 믿어볼 만하겠구나.’
자네티스 경은 내심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전하.”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에게 빙결마법을 사용할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그걸 ‘안 죽을 정도로’ 조절하는 임무를 떠맡을 줄도 몰랐지만. 그래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믿어줘서 고맙군.”
라키엘의 입가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어쨌건, 이제 해볼 수 있겠어.’
즉시 준비를 시작했다.
다행히 혈전 제거에 필요한 약품과 도구는 모두 지니고 있었다. 상비약으로 항상 가지고 다니던 미노타우황청심원을 꺼냈다. 미지근한 물에 정성껏 녹였다.
‘이거면 가능할 거야. 혈전 용해작용을 해주니까. 병원에서 쓰는 t-PA(tissue-plasminogen activator)만큼의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을지도 몰라.’
이미 협심증 혈전 치료를 통해 성능이 검증된 미노타우황청심원이었다. 거기에 더해 꼬슴이의 도움도 받았다.
“꼬슴아? 오늘도 가시 좀 빌릴까 하는데. 괜찮겠어?”
“꼬슴!”
뾰뵤뽁-!
꼬슴이가 찡긋 윙크를 하며 온몸을 뽀르르 떨었다. 작고 토실한 궁디에 힘을 주니 하얀 가시가 뾰뾱 떨어져 나왔다. 그렇게 침술을 위한 준비도 갖추어졌다.
“자네티스 경?”
“저도 준비가 되었습니다.”
자네티스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도로 절제된 마력이 새하얀 서리가 되어 그의 손끝에서 넘실거렸다. 황제의 머릿속에 생겨난 혈전. 그걸 안전하게 녹일 준비가 갖추어졌다. 이제는 망설일 필요도, 기다릴 이유도 없다.
“시작하지.”
라키엘이 황제의 상의를 벗겼다.
모두가 초조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자네티스 경의 조절된 빙결 마법이 황제에게 뿌려졌다.
샤아아아아……!
새하얀 서리의 커튼이 황제의 전신을 덮었다. 라키엘은 경혈 스캐닝을 발동하며 상황을 꼼꼼히 관찰했다. 황제의 피부가 서서히 창백해졌다. 혈맥 속을 거닐던 마나의 흐름이 느려졌다. 체온이 떨어지며 전신의 신진대사가 완만해졌다.
심박수가 내려갔다. 호흡이 늘어졌다. 내부 장기의 움직임이 둔화되었다. 머릿속 혈전과 그 주위 마나의 흐름도 느릿해졌다. 그렇게 황제의 상태가 반쯤 가사상태에 접어든 순간.
“그만. 이제부터는 유지.”
자네티스 경이 급히 빙결마법의 출력을 낮추었다. 라키엘이 황제의 상체를 받쳐 올렸다. 물에 개어 녹인 미노타우황청심원을 조심스럽게 먹였다.
천천히.
한 방울의 남김도 없이.
모조리 안전하게 섭취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하얀 가시를 들었다. 황제의 몸을 조준했다. 심호흡을 했다.
‘이제부터는 1밀리미터의 오차도 있어선 안 돼.’
경혈 스캐닝을 통해 낱낱이 보였다. 미노타우황청심원 성분이 황제의 위장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그 성분과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뇌혈관을 가로막은 혈전에도 닿았다.
혈전이 녹기 시작했다. 그는 곧바로 움직였다. 녹아내리는 혈전. 그 이후에 생겨날 재관류손상. 치명적인 2차 피해를 막기 위하여. 자칫 생겨날 혈액-뇌 장벽(blood-brain barrier) 손상에 따른 뇌출혈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라키엘의 손이 섬광처럼 움직였다. 가시를 찔렀다. 연달아. 거침없이.
툿! 투투툿! 투툿!
그렇게, 뇌세포 조직의 재관류손상과 뇌출혈 부작용을 막기 위한 라키엘의 소리 없는 시술, 아니, 전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