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86화 (86/468)

86화. 재관류손상을 막는 법 (4)

감정을 죽인다.

이성을 살린다.

눈앞에 누워 있는 사람은 황제가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의 환자일 뿐이다. 일단 살리고 본다. 그 생각에만 집중한다.

라키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리는 차갑게, 손길은 냉정하게. 익혀온 기예는 생각이 아닌 숙련된 본능으로.

툿! 투툿! 툿!

가시를 찔렀다. 가장 먼저 찌른 자리는 황제의 승읍혈(承泣穴)이었다.

“엇!”

시종장의 놀란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읍혈은 눈 바로 아래에 있으니까. 눈두덩이 아래 중앙을 더듬으면 만져지는 뼈 가장자리. 그곳에 커다란 가시를 푹푹 찔러넣었으니까.

‘일단 이곳의 기혈 움직임부터 다스려야 해.’

이곳 승읍혈은 12경맥 중에서 일명, 위족양명지맥(胃足陽明之脈)이라고도 불리는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이 시작하는 기시혈이다. 즉, 한 경맥의 시작을 알리는 간판이라 할 수 있는 자리다.

그러니 여기부터 다스려야 한다. 상세가 위중한 환자일수록 그렇다. 이제부터 기혈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바꿀 거라고. 기시혈에 신호를 넣어야 경맥의 나머지 경혈들이 준비가 된다. 그러지 않고 다짜고짜 쇠약한 환자의 가장 중요한 맥부터 건드려 버리면?

‘난리가 나지. 자다가 방금 깨자마자 100미터 달리기를 뛰면서 라면에 삼겹살 한 사발을 원샷하는 것만큼이나. 혹은 한겨울철에 자동차 시동을 걸자마자 RPM을 레드존까지 풀악셀로 밟아서 엔진 망가뜨리는 것과도 비슷할 거고.’

결국, 경맥 전체가 놀라게 된다. 경맥의 기혈 흐름이 들뜬다.  진정이 되지 않고 들쭉날쭉. 그렇게 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거야. 아무리 침을 잘 놓아도 소용없어. 한번 들뜬 기혈은 시간이 지나서 자연적으로 가라앉기 전까지는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게 불가능해지니까.’

즉, 침으로 경맥을 자극하여 인위적으로 경혈의 흐름을 통제하는 침술의 효과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괜히 애먼 환자만 침으로 푹푹 찔러대는 고문만 되어 버린다. 라키엘은 그걸 명심하며 호흡을 골랐다.

천천히, 깊게.

다섯 번을 마시고.

다섯 번을 내쉬었다.

승읍혈을 통해 전달한 기혈의 변화가 족양명위경 전체로 번질 때까지, 경맥 전체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 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시침을 시작했다. 다시 가시를 든 그가 찌른 경혈은 승읍혈에서 손가락 반 마디 아래에 있는 사백혈(四白穴)이었다.

톳!

눈두덩이 아래. 솟아올랐던 뼈가 살짝 오목해지는 자리. 황제의 눈확아래 구멍(infraorbital foramen)에 2푼 깊이로 가시가 들어갔다. 라키엘의 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툿! 토톳!

팔자주름 바깥면에 있는 거료혈(巨髎穴). 입꼬리 옆에 자리한 지창혈(地倉穴). 아래턱에 자리한 대영혈(大迎穴)과 협거혈(頰車穴)까지. 레이저 포인터로 콕콕 찍듯 정확한 자리에 가시를 꽂아갔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황제의 머릿속 혈전이 생긴 자리, 앞아래소뇌동맥.

‘그곳으로 향하는 혈류를 제어해야 해.’

한꺼번에 너무 많은 혈류가 흐르도록 놔두어선 안 된다. 그랬다간 혈전이 녹는 순간, 뇌졸중이 왔던 손상 부위에 너무 많은 혈액이 한꺼번에 왈칵 들이닥치게 된다.

‘그러면 재관류손상 당첨이지. 그것뿐일까. 이미 장시간 혈액 공급이 끊겨서 혈관-뇌 장벽의 손상도 심한 상태일 텐데, 거기에 갑자기 혈류가 몰아닥치면? 그 자리, 무조건 터져. 둑 무너지듯이 뇌출혈로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겠지.’

그러면 끝이다.

후유증이 문제가 아니게 된다. 생명 유지를 걱정해야 할 단계가 되어 버린다. 라키엘은 그런 최악의 상황만큼은 절대로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 과정은 무조건 철저해야 해.’

톳! 토돗!

의식은 긴장하며.

시선은 여유롭게.

손끝은 정확하게.

광대뼈 아래쪽 모서리의 하관혈(下關穴)을 찔렀다. 이마 머리카락선 가장자리의 바로 위쪽 두유혈(頭維穴)도 찔렀다. 경혈 스캐닝 옵션으로 변화를 관찰했다.

덕분에 보였다.

츠즈즈즈……!

자극을 받은 경혈의 마나가 반응했다. 반응하며, 요동쳤다. 작은 파문을 생성했다.

파문이 족양명위경의 경맥을 따라 흘렀다. 목덜미 앞쪽, 경동맥이 지나가는 자리의 인영혈(人迎穴)에 닿았다. 인영혈로 흘러든 파문이 경동맥을 두드렸다. 경동맥의 혈류 흐름에 간섭했다.

혈류의 흐름이 다소 느려졌다.

심장의 박동 또한 마찬가지였다.

‘됐다.’

라키엘은 주먹을 쥐었다. 혈류의 흐름이 약 2할(20%) 가량 느려진 것이 보였다.

‘좋아. 자네티스 경의 빙결 마법도 딱 적당하고.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저체온이 유지되고 있어. 거기에 혈류의 흐름도 성공적으로 제어했다. 이 정도면 희망이 있어.’

할 만큼 했다. 해볼 만하다. 이쯤이면 최소한의 가능성을 희망해볼 정도는…… 될까.

‘부디 그렇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재관류손상을 예방하기 위해 저체온 요법과 침술을 썼고, 혈전을 녹일 미노타우황청심원도 복용시켰다. 나머지는 운명과 황제의 생명력에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잊고만 싶은 그날의 순간들처럼.

“…….”

라키엘은 잠깐 떠오른 추억의 조각을 애써 눌러 넣었다. 그때부터였다. 그는 황제의 곁을 지켰다.

아침을 지나 오후가 되도록. 마침내 해가 기울고, 달이 뜰 때까지. 모두를 물러나게 한 고요한 공간. 그 속에서 황제의 상세를 살폈다.

이따금 시침을 하였다. 혈류가 과해지지 않도록. 황제의 몸에 욕창이 생겨나지 않도록. 행여나 변화의 조짐이 보일까. 혹시나 위중한 상황이 닥칠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초조한 심정으로. 온종일 곁에 붙어 호흡 한 줄기의 기색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자정에는 비가 내렸다. 새벽에는 천둥 번개가 울었다. 맑게 갠 새벽 빛 속에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깨었다. 이내 황제의 상세를 살피고는 안도하였다. 길고도 소리 없이 고된 전쟁이었고, 사투였다.

하지만 라키엘은 포기하지 않았다. 피로에 찌들어 멍해질 때도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자고 스스로를 향해 다짐했다.

그럴 때마다 문득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때도 이랬더랬다. 밤새 곁을 지켰더랬다. 어쩌면 눈을 뜨실지도 모른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씨익 웃으실 거라고. 그러면 나도 평소처럼 용돈 달라는 말부터 해볼 거라고.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랐다. 애써 기원하며 곁을 지켰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눈을 뜨지 못하셨다. 이쪽을 보며 씨익 웃지도, 실없는 농담을 꺼내지도 못하게 되셨더랬다.

처음엔 멍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삼일 상을 치르는 내내 그랬다. 현실 같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화장을 마친 뒤. 아버지의 유골이 담긴 함을 받았던 때였던가.

유골 담긴 나무 함이 따뜻했다. 그럴 거라는 상상도 못했는데. 마음의 준비조차 하지 못했는데. 그제야 저도 모르게 아이처럼 엉엉 울어 버렸다.

“…….”

그런 건 싫다. 다시는 그런 걸 겪고 싶지 않다. 몸이 힘겨울 때마다, 졸음이 몰려오고 의식이 흐려지려 할 때마다, 스스로를 향해 짓씹듯 다짐했다. 채찍질하듯 되뇌었다.

이번만큼은 오장육부의 걱정 가득한 아우성도 무시했다. 시종장 등의 만류와 우려도 귓등으로 흘렸다. 그저 버티고, 또 버텼다.

마침내 아침이 밝고.

다시금 해가 떠올라.

정오를 환히 밝히다.

서쪽 하늘로 스몄다.

황제에게서 첫 회생의 조짐이 보인 것은, 눈썹달 자락이 낯선 별자리 곁을 간질이던 새벽 무렵이었다.

“으음…….”

문득 귓가에 들려온 낯선 소리. 꾸벅꾸벅 졸고 있던 라키엘은 멈칫했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으, 으음…….”

“어?”

라키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그는 볼 수 있었다.

‘됐다.’

경혈 스캐닝으로 엿보이는 마나의 세상. 황제의 뇌혈관을 틀어막고 있던 혈전이 사라져 있었다. 그 주위의 조직은? 추가 손상 부위가 보이지 않았다. 재관류손상을 거의 막아낸 것이었다.

마치 그걸 증명해주는 걸까. 황제의 얼굴에 변화가 찾아왔다. 마비된 근육으로 뒤틀려 있던 얼굴이. 허물어졌던 표정이. 어긋났던 안색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차츰차츰, 천천히.

한편으로 확실하게.

희망의 빛을 비추듯.

한 걸음씩 펼쳐졌다.

한때 짓던 미소처럼. 어느 날 그리던 웃음처럼. 어느덧 편안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내 희미하게 눈을 뜨기 시작했다.

“…….”

황제는 문득 생각했다.

이곳은 어디인가. 짐은 어찌하여 이토록 기운이 없는가. 문득 떠오른 의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답을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아스라한 심법 덕분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기분이었다. 멍한 의식과 흐릿한 시야. 온통 뿌연 세상. 실루엣으로만 간신히 보이는 주위 사람들. 한데 그 속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유독 환하게 보였다.

어느새 두 손으로 이쪽의 손등을 감싸고 있는 녀석. 나약하게 자라나 언제고 세상의 풍파에 무너질 것만 같았던 녀석. 하여 평생을 걱정하게 만들었던 아들.

라키엘이었다.

“…….”

너로구나.

네가 오늘 나를 살렸구나.

손길과 체온을 느끼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눈을 뜨기 전까지 자신은 악몽에 빠져 있었더랬다.

온통 시커먼 눈밭이었다.

눈밭에서 길을 잃었다.

막막했다.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옆에 나란히 섰던가. 까마득하게 시커먼 눈밭을 홀로 헤치고 다가왔더랬다. 그저 말없이, 묵묵히, 이쪽의 곁을 지켜주었더랬다.

아침을 지나 오후가 되도록. 해가 기울고, 달이 뜰 때까지. 비 내리는 자정을 지나. 천둥 우짖는 새벽 너머. 맑게 갠 새벽빛 속에서도. 스미는 노을 아래에서마저. 마침내 눈썹달 자락이 낯선 별자리 곁을 간질이던 때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 덕분이었다.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절망의 눈밭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마침내 눈을 떴고, 지금에 이르렀다.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 누군가가 라키엘이었음을. 언제나 걱정만 안겨주던 큰아들이었음을. 녀석이 손을 내밀어 자신을 끌어올려 준 것임을.

“…….”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녀석이 무언가를 해주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다.

고마웠다.

미안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네가 이 아비에게 해준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노라고. 그리하여 놀랍고 부끄럽노라고. 어느덧 너는 이 아비가 생각하였던 것보다 한결 나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노라고. 한데 오직 이 아비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듯하다고.

그 사실이, 너무나 부끄럽다고.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구나.’

실낱처럼 뜬 눈으로나마 아들만을 바라보았다. 아들과 맞잡은 손에 나름의 힘을 주었다. 미약하기 그지없는 움직임일지언정 이렇게라도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괜찮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세요.”

라키엘의 나직한 목소리. 그걸 귀에 담고서야 놓이는 마음. 비로소 황제는 나른한 안도감을 느꼈다. 서서히, 편안한 숙면에 접어들었다.

“후우.”

라키엘의 입에서도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는 황제의 손을 얼른 놓았다. 한편으로 오소소 돋은 소름도 털어냈다.

‘……난 당신 아들이 아닌데.’

그런데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과 미소였다. 그래서였다. 닭살이 돋았다. 그는 애써 웃었다.

‘괜히 죄책감 드네. 그나저나…… 병상에 누운 아저씨의 촉촉한 미소라니. 싫다, 싫어. 으으.’

자다가도 떠오를 것 같으니까 생각하지 말자. 황제를 성공적으로 살려낸 성과만 기뻐하자.

라키엘은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조한 목소리로 시종장을 불렀다. 고비를 넘기셨다고. 이제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고. 그렇게 말해주며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솔직히 말해서, 그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닭살이 돋고 소름이 돋아서. 자다가도 떠오를 거 같아서. 아니, 이미 십수 년 전 그날의 후회가 자꾸만 떠올라서.

‘…….’

그날 내가 조금만 빨리 뛰었더라면. 그날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연락을 받았더라면. 만약 그날, 내가 조금만 더 제때 도착했더라면. 늦지 않고 아버지의 손을 잡아드릴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 당신께서 가신 마지막 걸음을 배웅해드릴 수 있었더라면.

“……하.”

더는 못 견디겠다.

도망치듯 복도로 나왔다.

고개를 들었다. 애꿎은 천장만 한참을 노려보았다. 그럴수록 어쩐지 콧잔등만 자꾸 시큰해졌다. 천장도 있고 벽도 있는 복도인데. 이상하게도 빗방울이 떨어졌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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