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앙부아즈를 홀려라 (1)
“……후우.”
라키엘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렵사리 감정의 동요를 털어냈다. 고개도 세차게 한 번 흔들었다.
‘안 되지. 안 돼. 정신 차려, 이한. 이런 식으로 냉철함을 잃으면 큰일 나지.’
그는 정신을 다잡았다.
냉철함이 의료인의 필수 덕목이라 믿는 그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어선 안 된다고 여겼다. 당연한 소리였다.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과는 별개인 거야. 의료인이라면 언제나 냉철한 이성을 유지해야 해. 그게 기본이고, 환자를 위한 책임이야.’
그래야 어떠한 응급상황에서도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과 대응을 할 수 있다. 즉, 의료인의 침착한 대처 유무가 환자의 생사를 가르는 셈이다. 하물며 지금 자신의 환자는 누구인가.
황제였다.
‘이제 겨우 큰 고비만 넘겼을 뿐이야. 앞으로가 더 문제지. 아직 넘을 산이 많아.’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
2차, 3차 문제가 터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후유장애가 얼마나 오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그에 따라 재활 계획도 잡아야 한다.
‘그렇게 한 달만 버티면 돼. 그 후에 대주교를 다시 불러서 신성축원을 써주면 완치도 가능할 거고.’
라키엘은 앞으로의 계획을 꾸렸다. 잠깐 동요되었던 마음을 추슬렀다. 과거의 일은 가슴 깊이 묻었다.
그때였다.
귓가에 반가운 알림음이 울렸다.
딩동!
[당신은 저체온요법과 정확한 침술, 효과적인 미노타우황청심원의 사용과 헌신적인 보살핌을 통하여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덕분에 환자 :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는 고비를 넘기고 위독한 상태에서 벗어났으며, 재활과 회복의 희망을 엿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치료의 과정에서 당신은 로라시아 대륙의 역사상 최초로 ‘재관류손상’의 개념을 제시하였습니다.]
[당신이 제시한 재관류손상의 개념이 후세의 의학 전공서에 새겨지게 됩니다.]
[후세의 의학도 꿈나무들이 늘어난 시험 범위에 절망하며 당신을 원망하게 됩니다.]
[당신은 로라시아 대륙의 의학 역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명의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121 GDP가 적립됩니다.]
[현재 보유 중인 명의 포인트(GDP) = 222]
[현재 구매 가능한 거짓말 이용권 = 2장]
‘……허허?’
라키엘의 입꼬리가 귀에 빵긋 걸렸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보상이었다. 덕분에 거짓말 이용권을 2장이나 살 수 있게 됐다. 아직 쓸 곳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언제고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자원이리라.
라키엘은 본인 명의의 아파트 가격이 2배로 쑴펑 뛰는 듯한 행복감을 느끼며 황제에게 돌아갔다. 황제는 여전히 숙면에 빠져 있었다.
“전하, 전하께서 폐하를 살리셨습니다.”
시종장이 다가왔다.
그가 울먹이며 말했다.
“폐하의 얼굴이 보이십니까? 예전 모습 그대로 돌아오셨습니다. 전하께서는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을 해낸 것이신지…… 폐하께서도 분명 전하를 자랑스러워하실 테지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오늘, 전하께서 폐하와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시종장에 이어 주치의도 냉큼 다가왔다.
“말 그대로입니다. 전하께서 구하셨습니다. 아니, 폐하와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또한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무능한 의사였는지, 제가 얼마나 자만하며 안일함에 빠져 있었던 것인지…… 이번 일을 통해…….”
“절감했나?”
“예, 전하.”
“그럼 그 책임도 함께 절감해주면 좋겠는데.”
“……예?”
멍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주치의. 그를 향해 애석하다는 듯 말해주었다.
“폐하께서 돌아가실 뻔하셨지. 한데 그쪽은? 원인이 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어. 적절한 처방과 대처를 보여주지도 못했고. 내 말이 틀렸나?”
“그건…….”
“무능한 거 맞아. 안일했던 것도 맞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책임을 져야겠지?”
“전하?”
“변명은 그만. 일단 근신부터 하도록. 오늘부터 당분간 폐하는 내가 직접 보살펴드릴 테니까.”
“저, 전하……?”
“더 할 말이 있나?”
“…….”
주치의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 하는 게 최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도 이 작자, 너무 무능해.’
황제의 뇌졸중 전조증상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만약 그걸 파악하기만 했더라면? 어젯밤, 골든아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적절한 조치를 통해 뇌졸중의 진행을 막아내거나,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데 이 주치의는 그중에 단 하나도 해내지 못했다. 심지어 골든아워가 지난 후까지도 뇌졸중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두통약과 근육마비 완화제를 먹인 것이 다였다.
한심했다.
‘그대로 있었다면…… 황제는 백 퍼센트 죽었겠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이런 자가 황제의 주치의라니. 게다가 이자를 내쳐야 할 이유는 더 있었다.
‘능력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다른 쪽으로도 신뢰할 수가 없어.’
아까 보았던 혈전이 떠올랐다. 잔선이 없는 비정상적인 혈전이었다. 그건 누군가가 황제에게 손을 썼다는 뜻이다. 독약이든 다른 수단이든. 인위적으로 급격하고도 비정상적인 혈전 생성을 유도한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였다.
‘주치의, 그리고 시종장. 둘을 우선적으로 의심해봐야겠어.’
아무래도 곁에 있는 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의심하자. 증거를 찾아보자. 라키엘은 내심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주치의 파사로 경. 그대는 우선 근신하며 이번 실책을 반성하도록. 시종장? 그대는 폐하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식이 퍼지지 않도록 단속에 신경 쓰고. 나머지는 모두 물러나도록. 폐하께선 절대안정을 취하셔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모두가 차례로 물러났다. 라키엘만 황제의 곁에 홀로 남았다.
“후우…….”
곤히 잠든 황제를 바라보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재활치료는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범인을 어떻게 색출할 것인지. 많은 생각과 고민으로 하루가 훌쩍 흘러갔다.
♣
다음 날이 밝았다.
그동안 황제는 두어 번 눈을 떴다. 다행히 별다른 이상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라키엘도 간밤에 조금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꿀맛 휴식도 아침까지였다.
“전하?”
“……으음.”
“전하아?”
“……으으으음.”
귓가를 숑숑 찔러오는 시종장의 목소리. 라키엘은 눈살을 찡그렸다. 설마 벌써 아침인가. 잠도 얼마 못 잔 것 같은데. 밤이 깊도록 황제의 상태를 살피다가 새벽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눈을 붙인 듯한데.
‘으으, 피곤하다.’
하지만 황제를 살펴봐야 한다. 라키엘은 눈두덩을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후우. 무슨 일이지?”
곤란한 표정의 시종장이 보였다.
“……아, 어제 전하께서 분부하셨던 일 때문에 말입니다.”
“내가 분부했던 일?”
“예, 전하.”
“…….”
뭐가 있었더라.
라키엘은 뇌세포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졸음을 털어냈다. 흩어지는 졸음의 끄트머리에서 달아나던 기억의 꼬리를 붙잡았다.
“……아, 황궁 내의 입단속은 잘했나?”
“물론입니다, 전하.”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에는 폐하께서 살짝 고약한 감기를 앓게 되셨노라고, 하여 휴식을 취하고 계신 것이라 일러두었습니다.”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전하와 저, 그리고 어제 이 자리에 있었던 이들이 전부입니다.”
“그래. 수고했어. 한데 지금 따로 보고할 게 있는 건가? 아까부터 표정이 조금 어두운 듯한데.”
“아, 그것이…….”
“말하도록.”
비로소 시종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실은, 아침 일찍부터 앙부아즈 왕국의 대사가 폐하를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앙부아즈의 대사가?”
“예, 전하.”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앙부아즈 왕국. 모를 리가 없는 이름이다. 아니, 엄청나게 중요한 이름이다.
‘150년 남짓한 짧은 역사를 자랑하는 왕국. 떠오르는 신흥 강국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지. 그리고 몇 년 뒤에는…….’
그 돌풍이 성장하여 태풍이 된다. 군국주의적 확장의 기치를 내걸게 된다. 대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이 마젠타노 황가를 휩쓴다. 천 년 역사의 제국이 앙부아즈 왕조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그것이 원작 소설, 마검황의 주요 배경 스토리였다.
“……한데, 앙부아즈의 외교 대사가 왜 폐하를?”
라키엘은 원작 소설의 내용을 곱씹으며 물었다. 시종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사실은…… 닷새 전에 폐하께서 직접 앙부아즈의 대사를 불러들이셨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예, 전하.”
“무슨 일로?”
“크레모 항구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습니다.”
“설마.”
“추측하셨습니까?”
“으음.”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크레모 항구의 경매장에서 미노타우로스를 놓고 나와 경쟁했던 거상 귀네스, 그자의 모국이 앙부아즈 왕국이었지. 게다가 그 거상이라는 작자, 사들인 미노타우로스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그 결과 난리가 났었고. 그런 주제에 아무런 배상도 없이 꽁무니를 빼고 혼자 본국으로 도망쳤지. 혹시 폐하께서는 그 책임을 물으려 하셨던 건가?”
“예. 정확하십니다, 전하.”
……역시.
시종장의 말이 이어졌다.
“폐하께서는 그 소식을 듣고 매우 진노하셨습니다. 하여 책임을 따져 묻기 위하여 앙부아즈의 대사를 공식적으로 불러들이셨지요. 그렇게 잡았던 회담 날짜가 바로…….”
“오늘이로군.”
“……예.”
시종장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라키엘도 혀를 찼다.
“쯧쯧.”
어째서 시종장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는지 알겠다.
“들어보니 상황이 난감하군. 기껏 대사를 불러들였는데, 폐하께서는 여전히 움직일 수 없는 처지이시니.”
“예, 전하. 하여 대책을 여쭙고 싶습니다.”
“대책이라…….”
“아무래도 대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냥 돌려보냄이 무난할 듯하긴 합니다.”
“그냥 돌려보내?”
“예, 전하. 황궁에 두루 알린 그대로, 폐하께서 감기 때문에 요양하고 계시노라 둘러댐이 어떨까요.”
시종장이 물어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 대뇌피질을 맹렬히 굴려댔다.
‘항의를 하려고 기껏 불러들인 대사를 그냥 돌려보낸다고? 그건 좀 아까운데. 게다가 감기 때문에 국가 간의 공식적인 회담을 취소한다면…… 명분이 너무 약해. 핑계로도 한참 부족해. 저쪽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챌 거야.’
뭔가 심상치 않다는 냄새를 맡을 것이다. 황제의 신변에 이상이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러면 안 돼.’
잠재적인 적국이다. 몇 년 내로 대전쟁을 치를 수도 있는 상대다. 한데 벌써부터 약점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은 저쪽, 앙부아즈 왕조에 책임이 있는 상태니까. 한데 오늘 그냥 돌려보내면? 같은 명분으로는 다시는 못 불러. 당연히 책임을 따져 묻는 것도 불가능하게 될 거고.’
따지려고 불렀다가 그냥 돌려보냈는데, 다시 부르자면? 모양새가 영 안 나오게 된다. 부르기도 좀 뻘쭘해진다. 지금 앙부아즈의 대사를 돌려보내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닐 듯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키엘은 맹렬히 고민했다.
한편으로 열심히 궁리했다.
자신이 읽은 원작 마검황. 그 속의 스토리 전개. 벌어졌던 사건들. 인물 간의 관계. 그 모든 기억을 꺼내어 늘어놓았다. 정교하고도 거대한 퍼즐로 쌓아보았다.
그러자 서서히 길이 보였다. 그럴듯한 각이 나왔다. 큰 그림이 그려졌다. 지금 상황을 절묘하게 활용할 계획이 순식간에 차곡차곡 세워졌다. 그 결론은 바로…….
“그 앙부아즈의 외교 대사, 내가 만나지.”
“……예?”
“내가 폐하 대신 회담을 진행하겠다고.”
이쪽의 선언이 뜻밖이었던 걸까. 경악하는 기색의 시종장을 향해 라키엘은 방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내심 계산을 마무리하며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의 이 상황은 하늘이 내려준 절호의 찬스일 것이라고. 잘만 하면 제국을 휩쓸게 될 대전쟁, 그 자체를 원천봉쇄할 수 있을 거라고.
‘이건 나만 할 수 있는 거거든.’
자신이 알고 있는 원작의 이야기.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무기들. 대략,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