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88화 (88/468)

88화. 앙부아즈를 홀려라 (2)

나는 외교를 모른다. 당연히 해본 적도 없다. 관련 교육을 받아본 적은 더더욱 없다. 내게 외교란 그저 거창하고 막연할 뿐인 개념이다.

‘간접적인 경험이 전부니까.’

뉴스에서 각국의 정상들이 모여 회담을 가졌다는 둥. 무역 협정을 맺고 블라블라 했다는 둥.

그게 전부였다.

간혹 북한이 동해에 미사일을 쐈다는 속보를 보며 치킨을 뜯은 기억 정도가 다였다. 혹은 삼국지나 문맹 게임에서 외교로 깽판을 쳐본 게 전부였다. 그러니 지금 앙부아즈의 대사와 외교적 협상을 벌이는 건? 당연히 자살행위다.

‘전문가한테 깝치면…… 큰일 나지.’

그게 세상의 진리다.

전문가는 괜히 전문가가 아니다. 함부로 덤비다간 순식간에 영혼까지 탈탈 털린다. 만약 입장을 바꿔서, 앙부아즈의 대사가 침술학 배틀을 벌이자며 침을 들고 후후 불어대면 얼마나 가소롭겠는가. 그것과 똑같은 이치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해. 나는 외교의 외 자도 몰라. 이제부터 만날 앙부아즈 대사와도 외교적인 술책과 어법으로 맞서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닐 거고.’

이쪽만의 방법으로 무장해야 한다. 같은 레벨에서 외교적 협상을 벌여선 안 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대사를 내 전문 영역으로 끌어들여야지.’

기나긴 복도의 끝자락.

마침내 도착한 회담장.

그 앞에서 라키엘은 심호흡을 했다. 이제부터 앙부아즈의 대사를 만나서 취할 태도와 전략을 정했다. 자신이 오늘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다시금 되새겼다.

‘대전쟁을 예방하는 거야.’

마젠타노 황가의 평화를 위하여. 이 몸의 안락한 황족 라이프와 만수르급 풍족한 슈퍼리치 백수 노후를 위하여.

야물딱진 다짐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회담장으로 성큼 들어섰다. 다만 외교적 가면을 쓰진 않았다. 대신 스스로에게 마인드 컨트롤을 걸었다.

‘여긴 회담장이 아니다. 여긴 진료실이다. 아침 첫 환자가 기다리고 있고. 나는 출근길에 전철을 놓쳐서 1분 늦은 거야. 그래서 아주 살짝 지각을 한 거지.’

……컨셉 시뮬레이션 완료. 덕분에 익숙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많이 기다렸습니까?”

“…….”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는 중년 남자가 보였다. 아마도 앙부아즈의 대사라는 뱅자맹 백작이겠지.

대사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쪽의 인사가 조금 뜻밖이었던 걸까. 아니면, 회담장으로 들어온 이가 황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놀란 걸까.

‘아마도 후자겠지.’

대사의 당황한 표정은 0.5초 만에 사라졌다.

“오, 이런. 앙부아즈의 대사 뱅자맹이 마젠타노의 황태자를 뵙습니다.”

능숙하게 예를 올리는 대사. 표정 수습 속도가 5G 이상이었다. 외교판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자다웠다.

라키엘은 대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아까 잡아둔(?) 컨셉 시뮬레이션을 유지했다. 환자를 바라보는 눈빛을 대사에게 던졌다.

“음, 혹시 요즘 잠이 모자라십니까?”

“……예?”

이쪽의 질문이 뜬금포였던 까닭일까. 대사의 미소에 또다시 쩌적, 희미한 균열이 생겼다. 하지만 라키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을 멈추면 안 된다. 대사에게 주도권을 내어주면 안 된다. 외교라는 전문적인 영역으로 끌려가는 순간, 회담의 추가 저쪽으로 기울여질 것이다. 그 사실을 염두에 두며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눈가에 기미가 앉아 있는 게 보여서 말입니다. 눈꼬리에 힘이 없고, 손끝에 멈추지 않는 미미한 떨림이 있으며, 호흡에서 살짝 탁한 냄새가 나기도 하고요. 혹시 음주와 흡연을 즐기는 편입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마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머리가 무거울 겁니다. 목 주위의 승모근이 상습적으로 결리고, 뒷골이 당기면서 두통이 올 때가 많지요?”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게 지금 이 자리와 무슨 상관이신지.”

“상관이 있지요.”

라키엘이 방긋 웃었다.

“대사께서는 앙부아즈 왕국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본 제국의 황도에 파견된 소중하고 귀한 손님입니다. 말 그대로 앙부아즈 왕가를 대리하는 분이시지요. 한데 그렇듯 소중하고 귀한 손님의 건강에 이상의 징후가 보이는데, 그걸 제가 가만히 넘겨야겠습니까? 안 되지요, 안 돼. 절대로 아니 될 일입니다.”

“그게 무슨…….”

“그만큼 대사의 건강이 제게도, 마젠타노 황가에게도 중요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잠깐, 손목을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

너무나 자연스럽게 물어오는 황태자. 그 물음에 앙부아즈 대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황태자가 뭘 원하는지도 파악이 안 됐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머릿속에 백만 개쯤 떠오르는 의문.

사실 황태자가 처음 자신의 기미나 눈꼬리 등등을 이야기할 때는 조금 특이한 형태로 안부를 묻는 건 줄 알았다. 흔한 인사치레. 요즘은 어떻게 지내느냐고. 자식들은 잘 크고 있으냐고. 저번에 샀다던 집값은 좀 올랐느냐고.

그런 체면치레 인사를 약간 특이하게 던지는 것이리라고,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더랬다. 하여 그 인사치레에 통상적으로 응했다. 경계심 없이, 그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한데, 그게 실수였다!

단순한 인사치레인 줄 알고 말을 받아줬더니. 그걸 아예 물고 늘어지며 이쪽을 괴상한 화제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통상적인 인사가 아니었던 건가? 뭐지. 진짜로 뭐지. 원하는 게 뭘까.’

대사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곧 나름의 결론이 나왔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 건강은 앙부아즈에서 함께 파견된 의사와 수행인원이 관리해주고 있으니, 황태자의 고마운 염려와 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대사는 손목을 내어주지 않고 움츠렸다. 인사치레도 아닌 이 괴상한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자신에게 익숙한 외교적 회담을 시작하고 싶었다.

‘오늘, 황제가 우리에게 책임을 따져 묻기 위해 날 불러들였으니까.’

사실 대사는 오늘 회담이 추진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본국, 앙부아즈의 유명한 거상 귀네스.

‘그자가 크레모 항구에서 보였던 무책임한 대처에 항의하려는 것이겠지. 그건 그냥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으니까. 엄연히 황태자가 휘말려 위험을 겪은, 초대형 악재였으니까.’

만약 황태자가 그날 죽었다면? 이런 회담 따위는 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졌을 터다.

‘어쨌건, 황제는 그날의 일을 우리에게 따져 물으려던 것이었겠지. 배상을 요구할 심산이었을 거야.’

막대한 금전. 혹은 일방적인 무역 관세 조정. 국경 특정 지역의 배타적 개발 권리 등등. 제법 묵직한 요구를 해 올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하여 황제의 그러한 요구에 대응할 준비도 모두 갖춘 대사였다.

교묘한 협상과 저울질. 이해타산을 나누고 쪼개며, 황제와 며칠간 마라톤 협상을 벌일 카드를 세심하게 준비해온 대사였다.

한데 정작 현실은?

그 카드를 써먹지도 못하게 됐다!

“어허. 아닙니다. 제 염려와 마음만 받겠다니요. 그건 아니 되실 말씀입니다. 대사께서는 저희 제국이 신의와 도덕이 없는 나라로 불리길 원하시는 겁니까? 이러다가 혹여나 대사께서 건강에 이상이 생겨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우리 마젠타노 황가가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손가락질을 받겠습니까?”

“으음, 그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댁들이 내 건강, 언제부터 걱정해줬다고 이러는 건데.

대사는 진심으로 빼액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완고했다. 그리고 능숙했다. 대사가 손사래 치며 손을 드는 순간이었다. 라키엘의 손도 함께 스윽 움직였다.

한의원을 방문해서 공포에 질려 울부짖던 수많은 어린이 환자의 떼쓰는 손목을 자연스럽게 낚아채던 농염한(?) 스킬을 십분 발휘했다.

촵?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이 찰싹 달라붙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사의 손목을 붙잡았다. 심지어 틈을 주지도 않았다. 대사의 맥박을 재빨리 진맥했다. 진맥 스킬도 곁들여 사용했다. 그리고 일부러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흐음, 역시. 평소 음주와 흡연이 너무 잦으셨군요. 물론 이 또한 마젠타노와 앙부아즈, 양국의 평화와 우의를 위해 노력하신 결과겠지만 말입니다.”

“아니, 이 손목 좀 놓으시고…….”

“그래서 감히 조언을 드리건대, 운동을 하셔야 합니다. 술과 흡연을 줄이고, 매일 30분씩은 걷는 시간을 만드세요. 그리고 아침마다 깨끗한 올리브유를 한 스푼씩 드시는 것도 좋습니다. 그래야 황제 폐하처럼 되지 않으십니다.”

“……예?”

황제, 폐하?

앙부아즈 대사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렇잖아도 왜 황제 대신 황태자가 회담장에 온 건지 궁금하던 대사였다.

자신을 부른 이는 황제였는데. 뜬금없이 황태자가 와서 이러는 게 불만이기도 했다. 하여 이러한 외교적 무례를 조심스레 따져 물으며 회담의 주도권을 가져오리라 각을 재고 있기도 했다.

한데 황제에 대한 언급을 저렇듯 먼저 선수 쳐 버리다니. 대사는 미간을 찡그렸다.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어제부터 몸이 불편하십니다.”

“어디가 불편하신 겁니까?”

“심한 몸살감기십니다.”

“몸살감기라고요?”

“예. 요즘 워낙 격무에 시달리셔서 말입니다. 검술 훈련을 소홀히 하신 지도 제법 되셨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는지 부쩍 음주와 흡연량이 늘어나셨지요. 아마 그래서이실 겁니다. 고작 감기몸살 정도에 입맛까지 잃고 힘들어하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흐음, 그래서 회담장에 황태자께서 대신 나오신 겁니까?”

“예. 대사께서 정확히 맞추셨습니다. 이에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으며, 추후 따로 대사를 오찬에 초대하겠다는 황제 폐하의 전언을 제가 대신 전해드리게 되었습니다.”

“…….”

대사는 할 말을 잃었다.

몸살감기란다. 그래서 회담장에 못 나왔단다.

‘설마하니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걸 솔직하게 밝혀 버릴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대놓고 미안하단다. 사죄를 표하는 오찬까지 열겠단다.

‘이거, 할 말이 없어지게 만드는구만.’

대사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건 황태자가 순진한 건지, 아니면 영악한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원래 외교적 무대에서 ‘미안하다’라는 말은 극도로 꺼리는, 거의 금기에 해당하는 발언이기 때문이었다.

‘저런 말을 꺼내는 순간 모든 명분과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겨주게 되니까. 그때부터는 상대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할 명분이 약해지고, 외교적 협상에서 극도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니까.’

그렇기에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는 것은 금기다. 아주 많이 표시해봤자 ‘유감이다’라는 완곡한 중립적 표현 정도가 끝이다. 그런데 방금 황태자는? 황제의 전언을 전한다면서 ‘미안하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솔직하니까 꼬투리를 잡을 구석이 없어.’

앙부아즈 대사는 내심 침음을 삼켰다.

황제가 아프다. 아파서 피치 못하게 못 나오게 됐다. 대신 황태자라도 나와서 이렇듯 성의를 보이고 있다. 그걸 솔직하고 투명하게 모두 밝히는 태도로 나왔다.

한데 그걸 따져 묻게 되면? 왜 황제가 안 나온 거냐고, 외교적 결례가 아니냐고, 항의를 하게 되면?

‘이쪽이 오히려 옹졸해지며 선을 넘는 그림이 만들어지겠지. 허어. 허허허!’

오히려 이쪽이 명분을 잃게 되리라. 보지 않아도 뻔히 보이는 그 흐름에 앙부아즈 대사는 탄식했다.

‘이렇게 내 카드 하나를 없애 버리는 건가…….’

이 황태자, 보통내기가 아니다.

대사는 내심 이를 갈았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런 대사의 머릿속 계산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자신의 솔직하게 사과하는 태도가 대사의 속마음을 얼마나 뒤흔드는지 딱히 예상하지도 않았다.

‘나는 외교적 협상을 하러 온 게 아니니까.’

협상은 자신의 전문 영역이 아니다. 그걸로 협상의 전문가인 대사와 맞설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은?

‘협상이 아닌 일방적인 요구만 던져야겠지.’

그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게 만들면 된다. 그럴 자신이 있다. 그럴 수단이 있다. 스스로의 판단을 굳게 믿으며 라키엘은 말했다.

“어쨌건, 앞으로 건강 관리에 조금 더 신경을 써주시길 바라며 오늘 회담의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사님은 물론이고, 앙부아즈 왕가 측에서도 지난 크레모에서의 사고가 일어난 경위를 모두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물론입니다.”

“예,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니, 요구입니다.”

“마젠타노 황가 측에서는 무엇을 요구하고 싶으신 겁니까.”

“앙부아즈의 제1 왕위 계승자인 아델린 보아르네 앙부아즈 왕녀께서 향후 6개월간 황도 마젠타에 체류하시길 원합니다.”

“……예?”

대사가 어깨를 흠칫했다.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설마 미친 거 아닐까.

‘우리 왕녀님을? 왜?’

혹시 인질로 삼겠다는 걸까. 그렇게 앙부아즈 왕가에 능욕을 안겨주겠다는 것일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라키엘을 보는 대사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이 요구는 너무나 노골적인 모욕이었다. 아무런 실리도, 명분도 느껴지지 않는 치욕적인 요구였다.

차라리 무역관세를 없애달라는 요구라면, 국경의 영토 일부를 떼어달라는 요구였다면,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한데 그때였다.

라키엘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 요구 사항이 미친 것처럼 들리셨겠지요. 하지만 이 요구에는 엄연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젠타노 황가와 앙부아즈 왕가, 양쪽 모두를 이롭게 하기 위한 합리적인 이유가 말입니다.”

“……그 이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물론이다. 앞으로 벌어질 대전쟁을 막아야 하니까. 그러자면 앙부아즈의 왕녀가 죽으면 안 되니까. 왕녀를 6개월간 황도로 불러들여 머무르게 해야 한다.

그래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 모두가 평화로워질 수 있다. 자신의 황족 라이프와 노후가 보장될 수 있다.

야물딱진 일념으로 라키엘은 입술을 촵촵 적셨다. 새빨간 거짓말 한마디를 혓바닥 위에 장전했다. 비장의 카드를 거짓말에 슬며시 붙였다.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알뜰살뜰 모아두었던 거짓말 이용권이었다.

딩동!

[거짓말 이용권 1장을 소모합니다.]

[지정된 대상 : 앙부아즈 대사 뱅자맹 백작은 당신의 거짓말 한 가지를 무조건적으로, 영구적으로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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