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기만자의 낚시법 (2)
흠칫.
왕녀 아델린은 멈칫했다. 자신의 면전에 내밀어진 물체를 쳐다보았다. 분홍색 사탕. 달콤한 향이 났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자두맛이었다.
그녀의 눈길이 라키엘을 향했다.
“…….”
이거 우연일까. 아니면 이 인간, 설마 내 취향을 파악해둔 걸까.
‘후자겠지.’
이쪽의 환심을 사려고. 경계심을 무너뜨리려고. 수작을 걸어대는 것일 터다. 왕녀는 미간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이거, 뭐죠?”
“사탕입니다. 자두맛.”
“그러니까 이거, 무슨 뜻이죠?”
“쓴 약을 먹은 뒤엔 달달한 사탕. 그게 국룰이니까요.”
“…….”
“안 드실 겁니까?”
“…….”
아델린은 번민했다.
어쩔 수 없이 약을 먹어야 하는 분위기였다. 결국엔 먹었다. 한데 너무 썼다. 비리고 쓰고 시큼했다. 코끼리 겨드랑이를 핥으면 이런 맛이 날까. 연달아 속이 울렁거렸다. 당장에라도 속의 것을 게워내고 싶었다.
그런데 눈앞에 사탕이 내밀어져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맛이었다.
본능이 외쳤다.
그냥 받으라고.
당장 먹으라고.
녹이지도 말고 아주 그냥 와자작 씹어먹으라고.
반대로 이성이 고개를 저었다.
‘미쳤어? 저걸 받게?’
그러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어쩐지 저 황태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기분이 한없이 더러워졌다. 사탕을 내밀고 있는 저 가녀린 손바닥을 당장에라도 찰싹 후려치고 싶었다.
‘나는…….’
상상을 초월하는 미각 테러에서 벗어나고픈 본능. 그럼에도 자존심만은 챙기자고 외치는 이성. 둘 사이에서 맹렬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아델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식은땀이 쑴펑쑴펑 피어났다.
라키엘의 한마디가 그녀의 번민에 결정타를 가했다.
“여기, 청포도맛도 있습니다.”
……덥석!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아델린의 손이 빛의 속도로 움직였다. 라키엘이 내민 두 가지 사탕을 낚아챘다. 한 큐에 입에 털어 넣었다.
와그작!
“하아…….”
입안 가득 퍼지는 천상의 단맛!
하드코어한 시궁창에 처박혔던 입맛이 구원을 받았다. 대지모신이 앞길을 비추는 듯한 쾌감이 느껴졌다. 자두와 청포도에게 설탕신의 축복을. 극락에 한쪽 발가락을 걸친 안도의 미소가 입술 사이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아델린은 깨달았다. 라키엘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어흠! 흠! 흠!”
그녀는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하지만 빨개진 얼굴빛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흠흠! 마, 마젠타노의 사탕은 엉망이로군요. 제가 평소에 좋아하던 맛이라 아주 조금은 기대를 하였는데, 이렇게 수준 이하일 줄은 몰랐습니다. 참으로 실망입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렇다마다요. 이런 엉망진창인 디저트를 먹어보니 권해주신 식사를 거절하길 잘했다는 생각부터 드는군요.”
“하지만 점심을 아직 안 드신 걸로 알고 있는데.”
“괜찮습니다. 격이 떨어지는 음식을 보면 식욕도 함께 떨어지는 편이라서.”
“그런가요?”
“네.”
“정말로요?”
“네. 확실히.”
아델린은 애써 표정을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내걸고서 라키엘을 빤히 마주 보았다.
그때였다.
……꼬르르륵?
침묵 속에서 별안간 터진 웅장한(?) 외침. 눈치 없는 그녀의 위장이 밥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
아델린은 굳어 버렸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황태자 라키엘. 그의 눈이 슬쩍 웃고 있음을.
‘……크읏.’
어디라도 좋으니까 숨고 싶다. 아니, 저 인간의 면상을 딱 한 대만 투쾅 때려보고 싶다.
그녀는 영혼의 뿌리까지 착잡해지는 기분을 만끽해야 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티를 내지 않았다. 조금 더 붉어진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권해주신 약과 디저트는 잘 먹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벌써 가십니까?”
“네. 제가 여기에 더 있어야 할 이유라도?”
“물론 없지요. 머무르실 숙소는 시종장이 안내할 겁니다. 부디 편히 푹 쉬시길.”
“감사합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시여.”
아델린은 진땀을 털어내듯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오찬장에서 빠져나왔다. 한편으로 내심 다짐했다.
앞으로 이곳 별궁에서 지내야 할 6개월. 그 시간 동안 가급적 저 황태자와 마주치지 말자고. 다시 만나면 저 인간을 잘근잘근 짓밟는 사고를 칠지도 모르겠다고.
‘후우!’
거친 숨을 내뱉는 그녀의 주먹에 힘줄이 불끈 섰다. 물론 그녀는 까맣게 몰랐다. 지금 품고 있는 다짐이 딸랑 하루 뒤에 무너지게 되리라는 것을.
♣
하루가 지났다.
별궁에 딸린 부속 별채. 그곳의 호화로운 방에서 왕녀 아델린은 낯선 아침을 맞이했다.
“…….”
이곳은 적지다. 적들이 득시글거리는 중심부다. 자신은 그런 곳에 내던져졌고, 앞으로 6개월 동안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짝! 짜악!
그녀는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손바닥으로 자신의 양 볼을 거칠게 쳤다. 정신을 무장했다. 호화로운 숙소의 면면에 현혹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본국에서와 똑같이 꽉 짜여진 아침을 시작했다.
별채에 딸린 연무장으로 내려갔다. 호위기사들을 사열했다. 아침 훈련으로 땀을 흘렸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뭐지? 몸이 왜 이렇게 가뿐하지?’
뜻밖에도 컨디션이 좋았다. 아주 그냥 날아갈 듯이 몸이 가벼웠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장거리 여행을 마친 다음 날 아침에 이럴 리가 없을 텐데?’
제법 피로할 것을 예상했다. 하여 평소보다 훈련 강도를 낮추려 했다. 그런데 컨디션이 너무나 좋았다.
‘설마. 어제 먹은 그 약 덕분에?’
불현듯 코끼리 겨드랑이맛 탕약이 떠올랐다. ‘피로 회복에 좋은 탕약’이라던 황태자의 말도 떠올랐다.
“…….”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고작 탕약 한 번 마셨다고 피로가 싹 날아가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녀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훈련에 집중했다. 탕약을 잊고, 황태자를 지웠다.
하지만 훈련 후의 아침 식사를 마주하며 다시금 끔찍했던 전날의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식사 후의 디저트와 함께 그 탕약이 제공됐기 때문이었다!
“……치워.”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났다. 그녀는 기겁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도망치듯 별채를 나섰다.
훈련 후의 근육 회복을 위한 저강도의 산책을 했다. 마침 정원이 광활했다. 걷기에 좋았다. 마음을 다스렸다.
한데 그러던 도중이었다. 이상한 무리가 눈에 띄었다. 제법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뭐지?’
그녀는 괴상함을 느꼈다.
이곳은 제국의 황태자가 머무르는 별궁이었다. 한데 그런 별궁의 정원을 저런 차림의 사람들이 돌아다닌다니.
‘정원 관리사인가? 아닌데. 늙은 노파에 어린아이까지 있잖아. 그렇다고 잡일꾼도 아닌 것 같고.’
그녀는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러다가 문득, 사람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노파는 절뚝거리고 있었다. 어린아이는 어디가 아픈지 어미의 등에 업혀서 울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중년 사내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즉, 다들 어딘가가 아픈 사람들. 병자들이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모두가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별궁 본채가 있는 방향이었다.
“…….”
대체 뭘까. 병자들이 왜 별궁 본채로 가는 걸까. 몹시 궁금해졌다. 아델린은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을 따라갔다. 덕분에 목격하게 되었다.
“……허?”
그것은 매우 기이한 광경이었다.
사람들.
별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수십 명의 환자들이 줄을 서서 본채로 들어갔다. 아델린도 그들과 섞여 들어갔다.
궁금해서.
홀린 듯이.
환자들의 행렬을 지나쳤다.
그 행렬의 끝에 방이 있었다.
‘여긴 뭘 하는 곳이기에 환자들이 차례로 들어가는 걸까.’
그녀는 방으로 슬며시 들어갔다.
그리고 목격했다.
“……으음, 간에 열이 차서 그러는 겁니다. 일단 당분간 술을 끊으세요. 기름진 음식을 줄이고, 지나치게 피로해지는 행위도 가급적 삼가야 할 겁니다.”
“그, 그렇습니까요, 전하?”
황태자 라키엘이 노인과 마주 앉아 있었다. 더없이 진지하고도 친절한 표정으로 노인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물론이지요. 그러니 일단 오늘은 뜸으로 기혈을 다스리겠습니다. 처방해주는 탕약은 빼먹지 말고 같은 시간에 꼬박꼬박. 아시겠죠?”
“명심하겠습니다요, 전하.”
“그럼 뜸부터 맞으러 갑시다. 자 이쪽으로…… 어?”
“……!”
라키엘과 눈이 마주쳤다.
설마 저 인간, 또 어제처럼 이쪽을 농락하는 건 아닐까. 그녀가 미간을 찡그리려던 순간이었다.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마치 선수를 치듯.
라키엘이 굳은 눈길로 따지듯 물어왔다. 덕분에 아델린은 당황하고 말았다.
“네?”
“네, 라니요. 여긴 진료실입니다. 진료 접수증 작성했습니까? 줄은 제대로 섰어요?”
“그게 무슨…….”
당혹감이 더욱 커졌다.
자신은 왕녀인데. 설마 이름도 모를 허름한 환자들의 줄을 무시했다고 저러는 걸까. 그런 그녀의 생각을 깨부수듯 라키엘의 일침이 꽂혔다.
“지금 제가 장난을 하는 걸로 보입니까? 이곳은 환자들을 보살피는 곳입니다. 그만큼 평등한 곳입니다.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는 신분도, 성별도, 나이도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까?”
“그럼…….”
“여기 들어오고 싶으면 진료 접수증부터 작성하세요. 줄 서서 순서대로. 알겠습니까?”
“…….”
꿀꺽.
아델린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뭔가 굴욕적이었다. 한편으로는 부끄러워졌다. 권력과 지위를 남용하는 왕족. 그런 무개념한 종류의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쫓겨나듯 진료실에서 나왔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떠나지는 않았다.
‘이대로 떠나면 내가 지는 거 같잖아.’
그건 싫었다.
특히나 황태자, 저 인간에게 이상한 인상만 남기는 굴욕을 겪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실수(?)를 깔끔하게 만회하고 싶었다.
자신은 그런 사람 아니라고.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야 찜찜함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녀는 환자들의 행렬 끝으로 갔다. 진료 접수증이라는 것을 정식으로,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작성했다.
환자들의 틈바구니에 함께 줄을 섰다. 지루함과 초조함을 동시에 인내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무려 두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정식으로 진료실에 입장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입장하자마자 따지듯 말했다.
“자, 절차대로 순서를 지켜서 들어왔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권력과 지위를 남용하는 그런 왕족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걸 증명하고 싶었던 겁니까?”
“네. 아까의 경험은 충분히 굴욕적이었으니까요.”
“그랬나요. 어쨌건 잘 왔군요. 한 번쯤은 반드시 왕녀님과 진료실에서 진지하게 마주하고 싶었는데.”
“……네?”
아델린은 미간을 찡그렸다.
저게 무슨 소리일까.
의문을 품는 순간이었다.
“제가 왜 당신을 황도까지 불러서 6개월이나 머무르게 한 건지. 진짜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라키엘이 웃음기라곤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