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기만자의 낚시법 (3)
“제가 왜 당신을 황도까지 불러서 6개월이나 머무르게 한 건지. 진짜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
웃음기라곤 없는 라키엘의 얼굴. 그 눈빛과 마주한 왕녀 아델린은 멈칫했다.
‘날 황도로 부른 이유?’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불안한 마음도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저 부왕과 왕실을 압박한 줄 알았다. 크레모에서의 사건을 빌미로 굴욕을 주려는 건가 싶었다. 한데 자신을 이곳까지 부른 이유가 따로 있다니.
‘무슨 속셈이지.’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묵묵히 라키엘을 마주 보았다. 따로 꿍꿍이가 있다면 밝히라는 듯한 눈길이었다.
그 모습에 라키엘은 내심 싱긋 웃었다.
‘잘됐네. 이런 기회가 이렇게 일찍 오다니.’
그는 만족감을 느꼈다.
모처럼 왕녀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어제부터 그토록 원하던 자리였다.
‘담석증을 치료해줘야 하니까. 담낭에 가득 차 있을 담석을 없애줘야 하니까. 그러려면 우선 왕녀가 자신의 증상을 자각해야 하니까.’
증상의 자각.
자신이 어디가 아픈지를 제대로 깨닫는 것. 질환이 있음을 인정하고 치료에 임하는 것. 그것이 모든 치료의 첫걸음이라고 라키엘은 생각했다.
‘당연하지. 의사나 한의사, 약사가 아무리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려도 환자 본인이 치료 의지가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무엇보다도 환자가 스스로 건강해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치료에 임하겠다는 마음가짐을 품어야 한다. 그래야 원활한 치료가 가능해진다.
한데 지금 왕녀는? 그 첫 단계가 안 되고 있었다. 자신이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담석증은 자각 증상이 거의 없으니까.’
어디 특정한 부위가 무진장 아프다거나. 열이 펄펄 난다거나. 불편해 죽겠다거나. 그런 류의 증상이 거의 없는 것이 담석증의 특징이었다.
실제로 한국에서 한 다리 건너 알고 지내던 웹소설가 백경 씨도 그랬다. 그냥 평범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죽을 것 같은 복통이 뽷! 응급실로 실려가서 검사를 받고 나서야 담석이 담도를 완벽하게 틀어막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던가.
‘아마 왕녀도 비슷하겠지. 담석 때문에 생긴 증상이라고는 그저 식사 후에 종종 속이 더부룩한 정도? 그 외엔 딱히 아픈 곳도, 불편한 곳도 없을 거야. 백경 씨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그게 바로 담석증이 까다로운 점이다. 증상도 모른 채 그냥 있다가, 상태가 심각해져서야 병원에 실려 오게 된다. 실제로 미국의 사례를 보자면, 전체 성인 인구 중에 담석을 지닌 사람이 15-20%나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중에 자신이 담석을 지니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인 거고.’
물론 한국인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다. 왕녀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이 담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다. 한데 다짜고짜 치료를 시작하자고 하면? 치료에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코웃음만 칠 것이다.
그래서였다.
‘일단은 자신의 병을 자각하는 것부터.’
라키엘은 다짐했다.
오래 기다린 기회. 그걸 붙잡으려 세심하게 준비한 멘트를 혓바닥에 촵촵 올렸다.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 소프트하게 노래하듯 섬세하고 부드럽게 발사했다.
“우선 말씀드리자면, 왕녀님께선 2년 안에 죽을 겁니다.”
“……네?”
“농담이 아닙니다.”
“네. 농담이 아니라 악담이겠죠.”
왕녀 아델린의 표정이 싹 굳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악담이라 여겨도 좋습니다. 사실이니까요. 이건 제국 황실의 직속 첩보부가 알려온 정보에 따라 추론한 결과니까 말입니다.”
“뭐라고요?”
“당신의 목숨이 2년도 남지 않았다는 거, 황실의 직속 첩보부가 보고한 최고 등급의 정보라는 뜻입니다.”
라키엘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황실의 직속 첩보부?
최고 등급의 정보?
물론 모조리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뻔뻔한 티타늄 철판을 얼굴 가득 3중 엠보싱으로 깔고서 말했다.
“왕녀, 당신은 모르겠지만 우리 황실의 첩보부는 세상의 거의 모든 곳에 눈과 귀가 닿아 있습니다. 앙부아즈의 왕실도, 당신의 일거수일투족도 예외가 아니지요. 그런 덕분입니다. 당신이 자각하지 못하는 질환의 사소한 징후를 우리가 먼저 파악하고 분석할 수 있었던 건 말입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당신의 몸속에서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심각한 병이 자라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병 때문에 제가 2년 안에 죽는다는 건가요?”
“예.”
“하. 참.”
왕녀 아델린은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가 산책 중에 우연히 발길이 닿은 이곳이었다. 궁금해서 들어왔다가 분위기에 휘말려 줄을 서고, 황태자와 마주 앉게 되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황태자를 조금은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던 자신이었다. 뜻밖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환자들. 헐벗은 이들을 대가 없이 치료해주는 사람일 줄은 몰랐으니까.’
실은 마젠타노의 황태자에 대한 소문을 일찌감치 들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을 치료한다고 했더랬다. 물론 그저 조금 특이한 취미활동 정도의 수준이겠거니 싶었다.
한데 오늘 본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본격적이었다. 아니, 앙부아즈의 어떤 유명한 의사도 이렇게 대규모의 의료 시설을 운영하는 이는 없었다.
뜻밖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황태자가 색다르게 보였다. 그가 꺼내려는 말이 무엇일지. 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을 황도로 불렀는지. 이제야 제대로 들어볼 수 있겠구나 싶기도 했다. 한데 막상 들어보니 실망스러웠다.
“고약하군요, 당신은.”
아델린의 목소리가 한층 싸늘해졌다. 라키엘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진실은 때론 고약한 법이니까요.”
“첩보부라니요. 그들이 제공한 정보 속에 제가 자각도 못 한 심각한 병의 증상이 있다니요. 황태자께서는 저를 바보로 여기시나 봅니다?”
“전혀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제가 믿을 줄 아셨는지.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절 농락하고 싶은 건가요?”
“농락이 아니라 치료를 하고 싶습니다.”
“지금 그런 말이 농락인 건 모르시는지?”
“그거야 왕녀께서 제 말을 전혀 믿지 않으시니 농락으로 받아들이는 거고 말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그럼 믿게 해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라키엘이 한마디도 지지 않고 물었다. 그제야 아델린은 깨달았다. 황태자 라키엘, 그가 아까부터 시종일관, 내내 진지한 눈빛이었음을.
“……대체 어떻게 믿게 해주겠다는 거죠?”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라키엘이 자신 있게 말했다. 자고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자각 증상이 없는 병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는 방법은 이게 최고지. 직접 두 눈으로 보게 해주는 거.’
세상만사가 그렇다. 인간의 심리가 그렇다. 부정하고 싶은 사실도 두 눈으로 보면 인정하게 된다.
가령 예를 들자면?
달랑 세 자리 숫자만 찍힌 통장 잔고가 그러하다. 힘차게 수직으로 파란색 번지점프를 시전하는 보유 주식시세가 그러하다.
그래서였다.
라키엘은 왕녀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녀가 지닌 담석. 그걸 부정할 수 없도록 명백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도록 확실하게.
“뽀복아?”
라키엘이 외투 안주머니를 향해 물었다. 안주머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뽀복!”
주먹 크기의 덩치. 동글동글한 외모. 하늘거리는 불꽃 지느러미. 약품 성분 분석 담당인 불사조 개복치 환상종, 뽀복이였다.
라키엘이 뽀복이에게 말했다.
“요즘 좀 심심했지? 모처럼 할 일이 생겼는데.”
“뽀보복? 뽀복!”
“아니아니. 오늘은 뭘 먹는 건 아니고.”
“뽀복?”
“일단 환자분께 인사부터 하자. 이쪽은 왕녀 아델린. 오늘 진료를 받을 환자셔.”
“뽀보복?”
뽀복이가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자신을 향한 경악의 시선을 깨달았다.
“뽀보복? 뽀복?”
“…….”
왕녀 아델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과 라키엘 사이에 불꽃 지느러미를 하늘거리며 동실동실 떠 있는 뽀복이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안녕?”
“뽀복! 뽀보복!”
뽀복이가 반가워하며 지느러미를 내밀었다. 아델린은 얼결에 뽀복이와 악수까지 나누었다.
라키엘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쪽은 뽀복 경입니다. 제 별궁 한의원의 약품 성분 분석 담당자죠.”
“약품…… 성분 분석이요?”
“예.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역할을 맡을 예정입니다.”
“그게 무슨…….”
아델린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황태자가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내가 죽을 거라며. 자각 못 하는 병을 가지고 있다며. 그래서 악담하지 말라고 따졌는데. 증거를 직접 보여주겠다며.’
그런데 왜 난데없이 처음 보는 환상종을 꺼내서 소개해 주는 걸까. 이 환상종에게 무슨 역할을 맡기겠다는 걸까.
짐작되는 곳이 없었다.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때였다.
“뽀복아? 시작하자.”
“뽀보?”
“알잖아. 그거.”
“뽀!”
라키엘의 의미심장한 눈빛. 뽀복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불꽃 지느러미를 최대한 활짝 펼쳤다.
“뽀보복!”
화아악-!
뽀복이의 지느러미가 16:9의 반듯한 비율로 펼쳐졌다. 마치 허공에 태블릿을 띄워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델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녀가 느껴야 할 놀라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검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잠시 손을 좀.”
라키엘이 한 걸음 다가섰다. 아델린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길에 아델린이 깜짝 놀랐다.
“……!”
찰싹!
그녀가 반사적으로 라키엘의 손을 쳐냈다. 라키엘을 노려보는 눈길 또한 살벌해졌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실례했습니다. 그래도 검사를 위한 자료는 방금 다 수집됐으니 안심하고 잠시만 기다려 보시죠.”
“……네?”
아델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사를 위한 자료?
수집이 다 됐다고?
뭐가?
어떤 게?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너무나 알쏭달쏭했다. 이 황태자라는 인간,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싶었다. 아니, 어쩌면 겉으로만 멀쩡한 미친놈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더는 참지 못했다.
드르륵!
거칠게 의자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황태자의 괴상한 장단에 맞춰주기 싫었다.
당장 진료실을 나서리라. 붙잡아도 뿌리치리라. 다시는 상종도 하지 않으리라. 행여나 멀리서 보이더라도 기필코 무시하리라.
다짐하며 몸을 돌리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뽀보보보보보보보보!”
별안간, 뽀복이가 요란한 소리로 기합성을 외쳤다. 동시에 16:9의 비율로 반듯하게 펼쳤던 불꽃 지느러미에 변화가 생겨났다. 불꽃이 현란하게 일렁거렸다. 마구잡이로 색상이 변화했다. 이윽고 뭔가를 비추듯이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다란 모양의 주머니였다. 주머니가 주기적으로 꿈틀거렸다. 그 속에 잔뜩 담긴 갈색 구슬도 보였다. 온통 울퉁불퉁한 형상의 못생긴 구슬이었다.
‘저게 무슨.’
아델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는 이쪽에게 병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했는데. 그런데 지금 보여주는 저 이상한 영상은 대체…….
“왕녀님, 이게 바로 CT로 촬영한 당신의 담낭입니다.”
“……네?”
아델린이 멈칫했다.
라키엘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는 문득, 오늘의 이 CT 촬영을 위해 며칠 전의 자신이 야물딱지게 준비한 것들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