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뒤틀린 역사 (1)
투두두두두……!
말발굽이 달린다. 아니, 마나가 달려온다. 대지를 박차고, 아니, 담석을 박살 낼 기세로 달린다. 달려와서 부딪친다.
꽝, 하고.
투콱-!
“……긔입!”
라키엘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했다.
아델린이 발출한 마나. 담석을 때린 마나. 그래서 발생한 충격파. 이걸 끌어들이는 순간은 언제나 극적이라고. 충격파를 흡수해서 타격을 감당할 때마다 식도와 괄약근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선수 교체를 외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아직 멀었나?’
라키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길을 들었다. 앞쪽에 띄워놓은 뽀복이의 불꽃 지느러미 디스플레이 속에 울퉁불퉁한 갈색 구슬이 비치고 있었다. 아델린의 담낭 속 마지막 담석이었다.
거의 다 깨져 간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 감개무량한 마음이 퐁퐁 솟구쳤다.
‘하. 길었다.’
정확히 16일 동안의 여정이었다. 그동안 아델린이 발출하는 마나의 충격파를 몇 번이나 감당하고 버텼을까. 100번? 200번? 아니. 줄잡아 500번은 족히 될 듯했다.
‘그동안 총 6번 기절했지. 헛구역질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했고.’
이처럼 밀도 높은 혹사의 나날을 보낸 적이 있었을까. 결단코 없었다. 역대급 개고생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짓도 끝이 보였다.
“자아, 거의 끝나 갑니다. 아마도 한 방만 더 때리면 될 거 같은데.”
“정말요?”
“예.”
“아쉽네요.”
“……예?”
“아뇨. 갑니다?”
투컥-!
“긥!”
아델린의 말이 끝나자마자였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강렬한 충격파가 쇄도해 왔다. 대비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명치가 푸확 뚫리는 기분. 예전이었다면 반드시 기절했을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읍!’
버텨냈다. 고개를 들었다. 디스플레이 속 담석의 모습부터 확인했다.
‘……됐다!’
담석이 제대로 뽀개져 있었다. 그걸 확인한 순간, 상큼한 알림음이 귓가에 울렸다.
딩동!
[당신은 외부에서 가해져 오는 501회의 마나 충격파를 굳건하게 버텨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아스라한 심법을 한계까지 활용하여 충격파를 흡수, 해소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히스토리가 당신의 마나써클을 한층 견고한 단계로 성장시키는 귀중한 경험적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아스라한 심법에 새로운 옵션이 개방됩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② : 격침불가 - 발동시 마나써클의 굳건한 내구력이 신경계를 보호합니다. 옵션 기능이 발동되는 시간 동안 어떠한 충격을 받아도 절대로 기절하거나 의식을 잃지 않고 버텨낼 수 있습니다. (제한 : 하루 1회 / 5분간 발동 가능)]
“…….”
이건 뭘까.
뜻밖의 메시지 내용이었다.
‘격침불가? 발동하면 하루에 한 번, 5분 동안은 절대로 기절하지 않는다고?’
군침이 절로 츄릅 넘어갔다.
딩동!
[오장육부가 새로운 스킬 옵션에 환호합니다.]
[심장 : 무려 500번이나 넘는 충격파를 버텨냈다. 우리는 강해졌다. 트라하하하!]
[허파 : 허파파파파!]
[대장 : 근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 말입니다.]
[간장 : 싸다구로만 500대 맞아도 댕근마켓에서 묫자리 알아봐야 할 각일 건데ㅋㅋ]
[위장 : 우리 주인이 선택한 길이었으니까 악으로 깡으로 버티긴 했는데 아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에게 2,2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4,700]
‘굿!’
라키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덤으로 HP 후원까지 받아냈다. 거기에 ‘격침불가’도 꿀옵션 냄새가 났다.
‘당연하지. 하루에 5분 동안은 기절에 면역인 거잖아. 살다 보면 기절할 거 같은데 기절하면 안 되는 상황이 몇 번은 있을 거니까.’
응급상황이라거나, 왕녀 같은 사람한테 얻어터지면서 도망쳐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릴 수도 있다. 하다못해 야식을 한 입이라도 더 먹고 싶은데 미칠 듯이 졸려서 쓰러질 거 같을 때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건 잘 됐어.’
라키엘은 만족감을 야물딱지게 촵촵 접어 넣었다. 아직은 이 정도로 만족할 때가 아니었다. 왕녀를 향해 말했다.
“후우, 다 끝났습니다.”
“……정말요?”
“예. 여기 보이시죠?”
지느러미 디스플레이 속의 깨진 담석을 가리켰다. 왕녀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렇군요. 그럼 이제 이 치료도 끝이겠군요. 한데-”
그녀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저렇게 깨진 담석은 어떻게 되는 거죠? 혹시 몸속으로 흡수돼서 사라지는 건가요?”
“아뇨.”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몸 밖으로 자연스럽게 배출될 겁니다.”
“어떻게요?”
“밥 먹었던 거랑 같이요.”
“…….”
“끄응차.”
“…….”
“흠흠, 어쨌건.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이릅니다. 치료 자체가 다 끝나진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설마 치료할 게 더 남았나요?”
“예. 이제부터 꾸준하게 관리를 해야지요.”
라키엘이 말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담석 치료는 담석만 없앴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
“원래는 담석이 너무 많이 생긴 경우엔 수술로 담낭 자체를 제거하는 게 제일 깔끔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수술을 해드릴 실력은 안 되고. 해서 담석만 제거한 거지요. 그러니 앞으로 관리를 안 하면 담석이 다시 생길 겁니다.”
“……다시 생긴다고요?”
“예.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이만한 담석이 벌써부터 생겼다는 것은 즉, 왕녀께서 담석이 잘 생기는 체질이라는 뜻이니까 말입니다.”
“…….”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담즙의 배출이 원활해지도록 돕는 약을 처방해드릴 거니까 말입니다.”
“그걸 먹으면 담석이 안 생기는 건가요?”
“담즙이 잘 흐르니 고이지 않을 거고, 돌처럼 뭉치는 일이 적어지겠지요. 설령 작은 알맹이가 생긴다 해도 원활한 담석의 흐름에 쉽게 쓸려 나올 겁니다. 알맹이가 커져서 문제가 생기기 전에 말이지요.”
사실이었다. 그게 관리의 기본이 될 것이다. 라키엘은 그 점을 명심하며 말했다.
“해서 인진호탕(茵蔯蒿湯)을 달여드릴 겁니다. 일단 보름 동안 그걸 꾸준히 복용하며 탕약이 체질에 맞는지, 담즙의 순환과 배출이 원활히 이루어지는지 살펴볼 거고 말입니다.”
“그게 체질에 잘 맞으면요?”
“평생 드셔야죠.”
“…….”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
“표정이 왜 그러신지…….”
“설마 그 인진호탕인지 뭔지, 그것도 코끼리 겨드랑이 맛이 나나 싶어서요.”
“어쩔 수 없습니다.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쓴 법이니까요.”
라키엘은 방긋 웃었다. 왕녀가 느낄 맛이 끔찍하든 말든, 자신이 먹을 게 아니니까 상관없었다.
그는 곧바로 인진호탕 생산을 시작했다. 인진호탕은 중국 한나라 시절의 상한론(傷寒論)과 조선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두루두루 언급된 바가 있었다.
‘특히 한의학의 올타임 레전드인 허준 선배님(?)도 즐겨 사용하신 처방이지. 간과 담낭에 열이 차는 증상, 황달, 습열의 징후가 있을 때 이만한 처방이 없거든.’
특히나 담석 생성을 예방하는 데에 탁월한 탕약이었다. 그는 미리 손질된 재료들을 꺼냈다. 인진호탕을 달이는 법은 비교적 간단했다. 먼저 인진호를 팔팔 달였다. 타이밍을 쟀다. 정확한 시점에 대황과 치자를 추가했다. 누그러뜨린 불로 한참을 은근하게 달였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보글보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속에서 인진호탕이 완성되었다.
“…….”
왕녀 아델린은 그릇 속의 탕약을 마뜩잖은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솔직히 먹기 싫다. 이미 냄새에서부터 사람을 압도(?)하는 기세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이쪽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태자는 즐기듯이 빙글빙글 웃을 뿐이었다.
“자, 제가 정성으로 달여낸 탕약입니다. 천천히, 차근차근 드셔 보시죠.”
“이거, 정말로 꼭 먹어야 하는 건가요?”
“예.”
“꼭 이렇게 끔찍한 냄새가 나는 약밖에 없는 건가요?”
“예.”
“이걸 먹으면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좋아진다는 거죠?”
“듣고 싶으십니까?”
“예.”
아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들려 있는 인진호탕이라는 이 괴상한 탕약. 이걸 한 번만 먹는 거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한데 문제는 이걸 평생 먹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게 싫었다. 벌써부터 끔찍했다. 할 수만 있다면, 핑계를 대서라도 좀 먹기 좋은 다른 약으로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바람은 이어지는 라키엘의 무호흡 16비트 자진모리장단의 연구논문 설명에 부질없이 쓸려가고 말았다.
“그럼 말씀드리지요. 흠흠! 우선 인진호탕이 담석증에 미치는 영향과 작용기전을 조사한 연구논문에 따르자면, 인진호탕 치료는 실험동물의 혈청 및 간의 생화학적 이상을 개선하고, 담도 불균형을 조정했습니다. 또한, 간과 소장에서 관찰되던 ATP 결합 카세트 서브 패밀리 G 멤버 5/8, 스캐빈저 수용체 클래스 B타입 l및 Niemann-Pick C1 Like 1의 발현 증가가 인진호탕에 의해 역전되었지요.”
“…….”
“이러한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보자면 말입니다. 인진호탕이 결석 유발 식이에 의해 담석증이 유발된 실험동물의 체내에서 담즙 콜레스테롤의 과포화와 콜레스테롤 대사 조절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즉, 담석의 생성을 매우 효율적으로 억제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
“왕녀님?”
“……네?”
“이 정도면 설명이 됐을까요?”
“제가 잘못했어요.”
뭔 말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사과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모든 설명이 왼쪽 귓구멍으로 들어와서 전두엽을 찰싹 때리고는 오른쪽 귓구멍으로 숑숑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무슨 반박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결국, 그녀는 항복하고 말았다. 인진호탕을 원샷했다. 맛은 역시나 썼다.
‘……이번엔 바다거북이 겨드랑이맛.’
그나마 코끼리 겨드랑이맛보단 좀 나은 걸까. 아델린은 구역질을 참아내며 라키엘이 건네는 사탕을 허겁지겁 받았다. 그렇게 그녀가 사탕을 오도독 씹는 순간이었다.
딩동!
라키엘의 눈앞에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은 직접 조제한 인진호탕을 환자 : 아델린 보아르네 앙부아즈에게 복용시켰습니다.]
[스킬 : 탕약조제 (Lv.1)의 효과로 약효가 10% 증가하였습니다.]
[환자 : 아델린은 당신의 적극적인 체외충격파 치료를 통해 체내의 담석을 모두 제거 받았습니다. 또한, 당신이 처방해준 인진호탕을 꾸준히 복용함으로써 앞으로 생겨날 담석과 그로 인한 각종 질환을 예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료비 청구 (Lv.2) 스킬이 발동됩니다.]
[환자 : 아델린은 당신의 치료를 통해 총 67년 10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당신은 67년 10개월의 1/1950에 해당하는 보너스 수명을 정산받습니다.]
[12.52일의 보너스 수명이 계산되었습니다.]
[정산되는 수명의 최소 단위는 1일입니다.]
[정산되는 보너스 수명이 반올림 처리됩니다.]
[총 13일의 보너스 수명이 정산됩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176일]
‘나이스. 굿!’
불끈 쥔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됐다. 드디어 해냈다. 왕녀가 완치되었다. 앞으로 그녀가 인진호탕만 꾸준히 복용해준다면? 담석증 때문에 사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무사히 앙부아즈의 국왕이 될 것이다.
그러면 된다. 소설 마검황에서 마젠타노 황가를 무너뜨린 대전쟁. 그 끔찍한 참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예방될 것이다.
‘원작에서 대전쟁을 일으킨 그 폭군, 쟈빌론이 왕위를 받지 못할 테니까. 왕녀가 건재하기만 하면 계속 그럴 거니까.’
그러니까 해낸 거다. 보람찼다. 감개무량했다. 진심으로 왕녀 아델린을 축하해 주려 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쿵쿵쿵!
별안간 밖에서 누군가가 진료실 문을 다급히 두드렸다. 설마 응급환자인 걸까. 그런 생각이 떠오르던 무렵.
“왕녀님! 안에 계십니까! 급보, 본국으로부터의 급보입니다!”
앙부아즈 특유의 억양 섞인 외침이 울려 퍼졌다.
“본국 서부의 방계 왕족, 쟈빌론이 일으킨 반란에 의한 내전이 발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