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뒤틀린 역사 (2)
“본국 서부의 방계 왕족, 쟈빌론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덜컹!
진료실 문이 열렸다. 기사가 뛰어들어왔다. 낯이 익은 자. 왕녀 아델린의 수행기사였다.
“뭐?”
아델린의 표정이 굳었다.
“반란이라니. 내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말씀 그대로입니다, 왕녀님. 방금 본국에서 보낸 전령이 왔습니다. 쟈빌론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서부의 귀족 다수가 반란에 호응하여 군사를 동원하였고, 현재 국왕 전하의 중앙군이 그들과 대치 중이라는 소식입니다.”
“……더 자세히. 그자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와 명분은?”
“그게…….”
“가감 없이 고하도록.”
아델린의 목소리는 더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말로는 표현 못 할 묘한 압도감. 듣는 동안 살짝 소름이 돋았다. 수행기사도 비슷한 기분을 느낀 걸까.
“아, 알겠습니다. 우선, 쟈빌론은 보다 위대해질 앙부아즈를 위하여 현재의 나약한 왕실을 타도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보다 위대해져? 지금의 왕실이 나약하다고?”
“쟈빌론의 주장에 따르면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이 왕실을 비난하는 근거가 있나?”
“그것이…….”
왜일까.
수행기사가 이쪽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러더니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그들은…… 국왕 전하께서 마젠타노에 쉽게 굴복한 외교적 나약함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무어라?”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건넨 무리한 요구를 아무런 저항 없이 수용한 국왕 전하의 결정이 굴욕적 외교였노라고, 왕족을 타국의 볼모로 손쉽게 보내 버리는 나약함을 방관할 수 없노라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
“어쨌건, 그 주장과 함께 쟈빌론이 반란을 선포했습니다.”
“그에게 가담한 서부의 귀족들은?”
“아마도…….”
“그들은 평소 동부의 중앙 귀족들에 비해 입지가 약했지. 그런 대우에 품고 있던 불만을 이번 기회에 드러낸 것일 테고. 맞나?”
“정확하십니다.”
수행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왕녀 아델린은 굳은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팔뚝과 주먹에는 힘줄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분노한 탓이리라. 본국에서 예고도 없이 날아온 급보. 방계 왕족 주제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자에 대한 노여움. 화가 난 것이겠지. 지금 이쪽의 심정과 똑같이.
‘후우. 미치겠네.’
라키엘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보람을 느끼고 있던 그였다. 무려 16일 동안 왕녀의 담석 치료에 매달렸다. 그 끝에 모든 담석을 제거하고, 왕녀의 수명을 성공적으로 연장시켰다.
이렇게 역사를 바꾸었노라고. 소설 속의 대전쟁을 예방해 냈노라고. 자신이 만든 성과에 뿌듯해하고 있던 터였다. 한데 그 행복감과 성취감이 앙부아즈에서 날아온 소식 한 방에 와르르 박살 났다.
‘내가 기껏 왕녀를 살려놨더니만. 그래서 왕녀가 안정적으로 왕위를 물려받고 평화의 시대를 열 수 있게 멍석까지 다 깔아놔 줬더니. 뭐? 반란? 바아안란?’
……x발 미친 거 아냐?
욕이 나올 거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뛰어가서 쟈빌론이라는 놈의 멱살을 짤짤짤 흔들고 싶었다.
‘미친놈. 어오, 그 미친놈이 진짜.’
하지만 마냥 화만 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대강 상황은 알겠다. 쟈빌론이라는 그놈. 원래부터 야심이 많은 놈이었던 거다. 내가 그 점을 너무 얕봤던 거다. 그래서 대전쟁이 아니라 앙부아즈에서 내전이 터져 버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왕녀와 수행기사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럼 현재 전황은?”
“전령이 가져온 소식에 따르자면 이미 수차례 큰 규모의 접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접전?”
“예, 안타깝게도…….”
“…….”
“처음에는 국왕 전하께서 직접 지휘하시는 중앙군이 반란군을 밀어붙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쟈빌론, 그 반란군의 수괴가 직접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뒤부터…….”
“역공을 받았다는 것이로군. 맞나?”
“예, 왕녀님.”
수행기사의 대답이 이어졌다.
“국왕 전하의 중앙군이 위험에 처한 적마저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전열을 재정비하였지만…… 이미 처음의 기세를 잃어버린 뒤였고, 발루아 요새까지 물러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는 소식입니다.”
“아바마마의 중앙군이, 물러나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고?”
“예, 왕녀님.”
“…….”
“앞선 큰 규모의 접전을 거치는 동안 입은 주력군의 손실이 심하다고 합니다. 예상보다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현재는 동부와 중앙 귀족들의 지원군을 기다리며 대치하는 상황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그런.”
아델린의 입에서 탄식이 나왔다.
생각보다 심각한 듯한 전황. 주력군이 많이 죽고 다친 상황. 그런 소식을 듣다 보면 절로 탄식이 나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이었다. 라키엘의 머릿속으로 뭔가, 새로운 생각이 번쩍하고 뇌주름을 스쳐 갔다.
‘……어라? 잠깐?’
그는 멈칫했다.
방금 뇌리에 스친 새로운 생각. 그 생각의 꼬리를 추적했다. 붙잡았다. 떠올렸다.
‘앙부아즈. 타국에서 생긴 내전. 주력군이 많이 다쳤다고? 부상병?’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앞선 생각이 따라오는 생각을 이끌었다. 서서히 새로운 발상이 뿌리를 내렸다. 펼쳐졌다. 거침없이. 활짝.
‘엄청나게 생긴 부상병…… 치료해야 할 사람들…… 그러니까…… 그들을 치료해주면? 살려주면? 그거 전부…… 보너스 수명이라는 소린데?’
쿠쿵!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생각의 흐름에 가속이 붙었다.
‘물론 전쟁은 안타까운 일이야. 비극적인 사건이지. 하지만 이미 벌어졌어. 그걸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어. 대신 이미 다친 사람들은? 내가 치료할 수 있어. 하나라도 더 살릴 수 있어. 그렇게만 되면? 나도 보너스 수명, 왕창 챙길 수 있어.’
마치 한철 대목 장사를 하는 것처럼. 한 시즌에 왕창 뽑아먹는 것처럼. 보너스 수명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별궁 한의원을 몇 년 동안이나 운영해야 얻을 보너스 수명을 이번 기회에 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건…… 대목 찬스!’
라키엘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차피 터진 내전.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은 소설 마검황의 내용과 달리 황제가 건재한 상황이었다. 2황자가 제국을 이끌던 때와 다르니, 설령 쟈빌론이 반란에 성공하여 대전쟁을 일으킨다 해도 소설에서처럼 제국이 무너지는 상황은 나오지 않을 듯했다.
즉, 저 내전은 강 건너편의 불이다.
그러니까 이건 기회다. 기회를 놓치면 바보다. 아니, 그냥 호구가 된다. 이런 기회는 무조건 잡아야 한다. 잘만 하면 수년 동안은 죽을 걱정 없는 수명을 챙길 수도 있으니까!
두쿵! 두쿵!
생각의 물살이 빨라지며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런 이쪽의 생각을 감지한 건지 오장육부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발상에 혀를 내두릅니다.]
[심장 : 부상병들 살려서 보너스 수명? 와 미친놈 진짜…….]
[허파 : 허허허허허파핳ㅋ]
[대장 : 우리 몸뚱이 인성 끝내주지 말입니다.]
[간장 : 근데 뭐 어차피 지들끼리 치고받는 전쟁인데, 부상병들 챙겨주고 살려주면 착한 행동 아님?]
[위장 : 그건 맞지. 그런데 그걸로 한철 장사를 하겠다는 마인드가 레전드인 거짘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의 미친 발상에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4,800]
“…….”
뭐, 비난받아도 어쩔 수 없다.
전쟁이 불행한 일이라는 거. 부상병들이 그 피해자라는 거. 충분히 알고 공감한다. 하지만 이쪽도 별궁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받는 보너스 수명으로 겨우겨우 연명하는 처지다. 게다가 이미 벌어진 내전이었다. 그걸 이쪽이 어찌할 수는 없다.
‘그래서야. 차라리 내가 할 수 있는 거. 사람 치료하고 살리는 거. 그걸 하면서 내 이득도 왕창 챙겨 보겠다는 거지.’
모두가 좋아지는 일이다. 모두에게 이득이 될 일이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니 이제는, 수작질(?)을 부릴 때다.
라키엘은 결심했다.
“왕녀님.”
수행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아델린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표정에, 분노가 가득했다. 본국에서 날아온 소식에 비통함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동시에 안타까워하는 기색도 엿보였다. 마치, 집에 일이 생겼는데 퇴근할 수가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내 요구 때문에 6개월간 황도에 머물러야 하니까.’
애초에 황도에 놀러 온 왕녀가 아니었다. 이쪽이 요구한 일이었다. 앙부아즈의 국왕이 수락한 일이었다.
즉, 그녀가 이곳에 온 것은 마젠타노와 앙부아즈 사이의 협정에 의한 결과였다. 그러니 그녀는 본국에 일이 생겼다고 해서,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돌아갈 수 없다.
‘내 허락이 없다면 말이지.’
싱긋.
라키엘의 입가에 사악한 웃음꽃이 피었다. 그는 미소를 얼른 감추고는 말했다.
“앙부아즈의 소식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듣고 있자니 비통함을 금할 수가 없군요.”
최대한 슬프게 들리도록. 왕녀의 분노에 공감하는 것처럼. 말했다. 미끼를 툭 던졌다.
“하면, 왕녀께서는 이제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실 예정이십니까?”
과연 아델린이 미끼를 콱 물었다.
“아뇨.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어서 말이지요.”
그녀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음만큼은 지금 당장에라도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아바마마를 도와 중앙군의 선봉에 서서 반란군을 깨부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허락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 허락 말입니까?”
“네. 부디.”
아델린이 간절한 눈길을 보내어 왔다. 좋다. 입질이 왔다. 라키엘은 회심의 미소를 삼키며 말했다.
“제 허락이라. 그럼 저도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조건인가요?”
“저도 데려가 주시죠.”
“……네?”
이쪽의 부탁이 뚱딴지같아서였을까. 아델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왕녀께서 본국으로 돌아가실 때, 저도 함께 데려가 달라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저를 수행원단에 포함시켜 주십시오. 신분은 적당히 위장하면 될 듯하고. 왕녀님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는 인물 정도면 적당할 겁니다.”
“…….”
“제가 왜 이런 부탁을 하는지 궁금하실 텐데 말입니다.”
“물론이죠.”
“밝혀드릴까요?”
“당연히요.”
“앙부아즈 왕국군의 후방 부대에 군의관으로 위장 취업을 하고 싶습니다.”
“……네에?”
“별거 아닙니다. 방금 귀중한 이웃인 앙부아즈에서 발발한 내전의 소식을 함께 듣지 않았습니까. 저 또한 그 소식을 들으며 비통함을 느꼈습니다. 안타까움도 느꼈습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생각이었죠?”
“제 나름의 방법으로 앙부아즈를 돕고 싶다고 말입니다.”
“설마.”
“예, 그 설마가 맞습니다. 왕국군의 후방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앙부아즈의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보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드릴 수 있을 도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황태자님.”
“예?”
“감사합니다.”
아델린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엄청나게 감동받은 걸까.
“…….”
사실은 앙부아즈를 돕겠다는 마음, 거의 없는데. 그냥 보너스 수명만 잔뜩 챙기겠다는 한철 장사꾼 다짐이 전부인데. 잠깐, 조금은 머쓱해졌다. 하지만 그런 본심은 금방 접어두었다.
“어쨌건 알겠습니다. 그럼 왕녀께서는 본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둘러 주시지요. 그동안 저는 다른 준비를 좀 해두겠습니다.”
“다른 준비라 하심은?”
“황제 폐하 말입니다.”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안정적인 앙부아즈행을 위하여. 보너스 수명 한철 대목 장사를 위하여. 이제는 황제와 담판을 지을 때였다. 물론, 황제를 구워삶을 무기도 이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