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전설은 위장 취업으로부터 (1)
“그래서 짜잔, 황제 폐하께 써먹은 비장의 무기가 제대로 먹혀들었습니다.”
“……그대는 누구지?”
왕녀 아델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별궁의 숙소로 들어온 사내를 쳐다보며 눈꼬리를 가늘게 떴다.
황태자 라키엘이 황제를 만나러 가겠다며 나선 것이 한 시간 전의 일이었다. 반드시 이쪽의 일행에 합류하겠다고. 앙부아즈로 가서 의술을 펼쳐 부상병들을 치료하겠노라고. 그렇게 돕겠다고, 고마운 제안을 건넸더랬다.
하지만 그녀는 황태자의 제안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마젠타노의 황제가 그걸 허락할까.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생각해볼수록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먼저 별궁 별채로 돌아왔다. 수행원들을 시켜 짐을 싸게 하였다. 황태자가 돌아오면 작별 인사를 하고선 곧바로 본국으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겨우 한 시간쯤 되었을까.
난데없이 낯선 사내 하나가 별채 숙소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다가오더니 이렇듯 뜬금없고도 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닌가.
‘뭐지?’
이상했다.
말투와 목소리가 황태자와 똑같았다. 처음 목소리만 들었을 땐 황태자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외모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은발벽안에 창백한 안색의 황태자와 정반대였다.
적색 곱슬머리와 눈동자. 얼굴에는 주근깨도 있었다. 심지어 체격도 달랐다. 왜소하기 그지없는 황태자와 달리, 저 흑발의 사내는 배를 때리면 통통 소리가 날 듯이 빵빵한(?) 체형이었다.
그나마 키만 황태자와 비슷할까.
참으로 이상했다. 희한하기가 그지없었다. 뚱보를 향한 아델린의 미간이 한층 찡그려졌다.
“쯧. 어째서 대답이 없을까. 나는 앙부아즈의 왕녀로서 방금 그대에게 누구인지를 물었건만.”
“접니다, 저.”
“누구?”
“황태자. 라키엘이요.”
“……티에리 경? 이 자를 체포해. 죄목은 황태자 사칭죄다.”
왕녀가 곁의 수행기사를 불렀다.
수행기사가 적발의 뚱보에게 위압적으로 다가갔다. 적발 뚱보가 억울하게 외쳤다.
“아니, 진짜라니깐? 힘을 합쳐서 담석 16개를 열심히 뽀갠 지난날의 우정을 잊은 겁니까?”
“……뭐?”
아델린이 멈칫했다.
뚱보의 외침이 이어졌다.
“내가, 어! 왕녀 당신이 쏘는 마나 충격파도 500번이나 넘게 맞아주고, 어! 바다거북 겨드랑이 맛이 난다는 인진호탕도 정성껏 달여서 호호 불어주고, 어! 그랬는데!”
“…….”
“게다가 내가, 어! 탕약 먹일 때마다 자두맛 사탕이랑 청포도맛 사탕도 꼬박꼬박 챙겨주고, 어!”
“설마. 진짜 황태자, 당신이에요?”
“맞다니깐요!”
적발 뚱보가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였다.
“그분은 황태자 전하가 맞으십니다, 앙부아즈의 왕녀시여.”
잘생긴 중년의 사내가 숙소로 들어오며 말했다. 눈에 익은 모습. 황태자의 주치의. 가르딘 경이었다. 뒤이어 흑발의 사내, 데미안도 따라 들어오며 덧붙였다.
“외모만 보아선 절대로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말입니다.”
“…….”
가르딘과 데미안.
둘 다 황태자의 심복이다.
그러니 저 말은 사실이리라.
적발 뚱보, 아니, 라키엘(?)을 돌아보는 왕녀의 눈길에 황당함이 배어났다.
“아니, 이게 진짜.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셨지요?”
“꼴이라니요. 지금 내 모습이 어때서요?”
“최소 1년은 매일 꾸준하게 밤새도록 야식을 즐긴 것 같은 몸매인데요?”
“행복한 몸매 아닙니까?”
“우리 인류는 그걸 비만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
“어쨌건, 황태자 당신의 심복 두 사람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믿지 못했을 거예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무슨 일이 있었기에 황제 폐하게 허락을 받으러 갔던 황태자께서 이런 모습으로 돌아오신 건지…….”
왕녀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라키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났다.
“뭐, 아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황제 폐하께 허락을 받으려고 준비한 비장의 무기가 제대로 먹혔습니다. 허락을 받아냈지요.”
“허락을요?”
“예.”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문득, 아까 황제에게 허락을 받으러 갔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사실 허락을 받는 일은 쉬웠다. 그냥 쉬운 정도가 아니었다.
엄청나게 쉬웠다.
‘앙부아즈로 가고 싶은 이유를 황제의 취향에 적당히 맞춰서 말하면 됐으니까.’
내전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노라고. 부상병이 엄청나게 생겼고, 생길 것이라고.
그들을 치료하겠다는 구실로 왕녀의 도움을 받아 앙부아즈 왕국군에 위장취업(?)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비교적 안전한 후방에서 복무하며 타국의 지휘체계, 군사행정, 운용, 전황의 흐름을 직접 보고 느낄 기회라고.
이런 생생한 경험의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라고. 반드시 가서 많이 배워오고 싶노라고.
그렇게 말했다.
그랬더니?
손에 합격 목걸이가 쥐어졌다. 요청의 내용이 황제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덕분이었다.
‘그 요청을 듣자마자 황제가 반색했지.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자식들을 끊임없이 시험에 빠뜨리는 황제였다. 어떻게든 후계자를 조금이라도 더 빡쎄게 단련시키려고 기를 쓰는 자였다.
한데 이쪽이 먼저 타국의 전쟁터로 가겠노라고, 적당히 몸을 사리며 생생한 경험치를 빵빵하게 채우고 오겠노라고 요청을 한 것이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엄마 나 영어 학원 더 다닐게요. 엄마 나 과외 하나만 더 해줘요. ……라는 요청과 비슷한 게 아닐까.
어떤 부모라도 아이에게서 저런 자발적인 요청을 받으면 엄청나게 기뻐할 것이다. 가정 형편이 허락하는 한 요청을 들어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요청을 듣자마자 호탕하게 웃었다. 더욱 자세한 계획을 물어왔다. 조금만 더 나갔으면 아예 기립박수까지 할 기세였다.
“……그래서입니다. 궁정마법사의 변장 마법을 요청했지요. 물론 폐하께선 흔쾌히 허락하셨고 말입니다.”
“덕분에 온몸이 빵빵해지신 거군요?”
“너무 직설적인데요. 기왕이면 후덕해졌다고 해주시죠.”
“그래서 스테이크 몇 장까지 드실 수 있으세요?”
“겉모습만 이런 거지, 신체적인 특징은 원래 그대로입니다.”
아델린의 짓궂은 물음.
라키엘이 콧김을 풍 내뿜었다.
“모습만 바뀐 겁니다. 체중은 원래 그대로고 말입니다. 뭐, 소화력이 달려서 입이 짧은 것도 그대로일 겁니다. 이건 그저 ‘겉모습만’ 바꿔주는 변장 마법이라서 말이지요.”
“아, 그런 건가요?”
“예. 심지어 강한 물리적 충격을 받으면 변장 마법이 풀릴 수도 있습니다.”
“강한 충격이라면 어느 정도……?”
“한 방에 기절할 정도쯤이라더군요.”
“그럼 일상생활에선 마법이 풀릴 걱정이 없겠군요?”
“예. 덕분에 안심하며 위장 신분을 유지할 수 있을 테고요. 예를 들자면 이런 신분 말이죠.”
팔랑!
라키엘이 서류를 내밀었다.
아델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황제 폐하께서 마련해 주신 위장 신분증명서입니다.”
“…….”
아델린의 눈길이 증명서를 훑었다.
“이름…… 리한 벨킨…… 나이는 23세…… 몰락한 귀족가 벨킨 가문의 후예이며, 황도 마젠타에서 공공 의료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였음…… 이라고요?”
“뭐, 구색만 그럴듯하게 갖춘 가짜 신분입니다.”
“이름이 리한이라. 특이한 이름이군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즉석에서 지은 겁니다.”
라키엘은 멋쩍게 웃었다.
리한.
사실은 자신의 한국 본명을 영문 표기로 부르던 이름이었다.
“어쨌건, 그게 앞으로 제가 써먹을 위장 신분입니다. 몰락 귀족인 젊은 의사 리한, 앙부아즈에서 온 왕녀와 우연히 친교를 다지게 되었고, 왕녀에게서 후원을 약속받고서 앙부아즈로 동행하게 되는 인물이지요.”
“소설 같은 이야기로군요?”
“뭐, 그렇게 왕녀의 후원을 받으며 앙부아즈 왕국군의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자신의 재능을 연마하려는 진취적인 청년이랄까요.”
“진취적인…….”
“왜요. 이상합니까?”
“네.”
“…….”
아델린의 돌직구가 명치에 콱 꽂혔다.
그녀가 물었다.
“그럼 여기 두 사람은요? 혹시 동행하는 건가요?”
그녀가 가르딘 경과 데미안을 가리켰다.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둘은 이제부터 저를 도련님이라고 부르게 될 겁니다.”
“도련님이라뇨?”
“몰락한 가문에 남은 충신이라는 설정이지요.”
“……의외로 설정에 충실하시군요.”
“그래야 위장 신분이 그럴듯해질 테니까 말입니다.”
어쨌건 앙부아즈에 갔을 때 티만 나지 않으면 된다. 내전이 끝날 때까지 적당히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게다가 후방에서 근무하는 일개 군의관이 주목을 받을 일도 없을 거니까.’
말 그대로 내전이 끝날 때까지 열심히 부상병들만 돌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철 장사에 매진하듯. 대목 시즌에 아주 뽕을 뽑듯이. 그렇게 얻어낼 이득만 치킨 다리만 빼먹듯이 쏙쏙 챙길 생각이었다.
‘그거만 마치고 돌아오면 되는 거야. 그러면 보너스 수명, 왕창 얻을 수 있어. 잘만 하면 별궁 한의원을 몇 년씩 운영해야 얻을 수명을 단기간에 챙길 수 있을 거야.’
그러기 위한 준비도 착착 갖추었다. 별궁 한의원은 웨어울프 간호사들에게 임시로 맡겼다. 뛰어난 후각으로 자잘한 병은 진단이 가능한 간호사들이었다. 심지어 어지간한 의사들보다 적중률이 뛰어날 정도였다.
그들에게 각 병의 치료에 적합한 탕약 몇 가지의 레시피를 전수했다. 기존의 입원 환자들 각각에 맞는 처방도 모조리 기록하여 전달했다. 최소 몇 개월 정도는 자신이 없어도 그럭저럭 한의원을 굴리는 데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황태자 라키엘은 당분간 건강의 이상을 이유로 침상에 누워 요양하며 외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한다…… 라고 대외에 알려질 겁니다.”
“그럼, 이제 준비가 끝난 건가요?”
“예. 왕녀님 측은?”
“우리도 끝났습니다.”
왕녀가 마차에 올라탔다.
라키엘도 함께 탑승했다.
이로써 모든 준비가 끝났다.
덜컹!
마차가 출발했다.
왕녀의 수행원단에 섞여 별궁을 떠났다. 황도 마젠타를 금방 벗어났다.
관문을 지나.
대로를 가로질러.
들판과 강을 건너고.
언덕과 산을 넘었다.
몇 개의 도시와 요새를 지나쳤다. 낮과 밤이 몇 차례씩 바쁘게 뒤바뀌었다. 마젠타노와 앙부아즈 사이의 국경을 통과했다.
국경을 넘으며 라키엘은 내심 다짐했다.
‘부상병들 치료, 잘해보자.’
최대한 많이 살려내리라. 보너스 수명을 왕창 얻어내리라. 그 외엔 어떠한 일에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 오직 부상병 치료와 보너스 수명 획득에만 집중하는 몇 개월을 보내리라.
‘그러니까 절대로 튀지도 말고. 내 할 일만 묵묵하게 하면 돼.’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래서였다.
그는 몰랐다.
절대 튀지 않겠다는 다짐. 묵묵히 부상병만 살리겠다는 다짐. 그렇게 보너스 수명만 야물딱지게 쌓겠다는 다짐.
그 개인적이고도 이기적인 자신의 다짐이 앞으로 앙부아즈의 국가적 내전에 얼마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지를, 장차 역사서에 길이 새겨질 거대한 업적을 만들어내게 될지를. 이 순간의 그는 전혀 예감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