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전설은 위장 취업으로부터 (2)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데미안, 자네도 그러한가?”
“예, 가르딘 경.”
“그 예감, 아마도 착각이 아닐 걸세.”
“하면 우리는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방법이 있나. 우리가 선택한 주군이니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지.”
“…….”
따각따각 천천히 움직이는 일행. 그 행렬의 끄트머리에서 데미안과 가르딘 경은 나란히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눈길은 행렬 중간의 마차를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마차에 타고 있을 황태자를 향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시는 걸까요.”
“그러게나 말일세. 솔직히 나도 이해가 안 되는군.”
“가르딘 경도 그렇습니까?”
“그렇지. 대체 누가 선뜻 이해하겠나.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타국의, 그것도 일개 부상병들을 치료하겠다며 선뜻 나서는 황족이라니.”
“덕분에 가르딘 경과 저까지 함께 묶여서 여기까지 끌려오게 됐죠.”
“……하아.”
“후우.”
두 사람의 한숨이 깊어졌다.
이것은 악덕 업주의 전횡에 신음하는 피고용인의 애환!
“하아. 난 다음 주에 약속이 있었는데.”
“예? 약속이라니요?”
“데이트 말일세. 데이트.”
“……교제하는 여성분이 있었습니까?”
“교제까지는 아니고.”
“그럼?”
“그냥 만나는 거지.”
“…….”
“원래 다들 그러는 거 아닌가? 그러다가 마음 맞으면 교제하는 거고. 교제하다가 마음이 떠나면 헤어지는 거고. 난 항상 그래 왔는데 말이지. 한…… 스무 번쯤? 아니, 더 되나?”
“…….”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지?”
“아닙니다. 그냥 잠깐 화가 나고, 이게 나라인가 싶어서.”
“……으음? 왜?”
“됐습니다. 그나저나, 가르딘 경께서는 데이트 약속을 놓치셨으니 그만큼 더 많은 수당을 요구하셨겠습니다?”
“수당?”
“예.”
“무슨 수당?”
가르딘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미안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대꾸했다.
“파견 수당 말입니다.”
“파견…… 수당?”
“예. 황태자 전하를 따라 이렇게 멀리, 타국인 앙부아즈까지 왔지 않습니까.”
“그, 그렇지.”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장거리 파견 업무인 거고. 당연히 수당을 받아야지요. 게다가 이곳은 내전, 즉 전쟁 중인 국가입니다. 당연히 근무 환경의 위험성에 대한 위험수당도 따로 보장받아야 할 거고 말입니다.”
“음, 어…….”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게…….”
“그게?”
“난 그런 거, 몰랐는데.”
“설마. 수당 협상을 안 했습니까?”
“……어.”
“훗.”
“…….”
“1승 1패.”
“……쩝.”
가르딘 경과 데미안.
두 남자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서렸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둘 다 앙부아즈까지 온 사실에 대한 불만은 거의 없었다. 아니, 사실은 황태자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나에게 의술이 있고, 저곳에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있으니, 마땅히 만사를 제치고 달려가 환자를 돕고 구한다…… 사실은 그게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전하께서 선뜻 실천하실 줄이야…….’
가르딘 경은 가슴이 뜀을 느꼈다.
문득, 처음 의술을 배우던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보다 조금은 더 순수하고,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당연한 일을 실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만 여겼던 시절이었다.
한데 지금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가. 달라졌다. 어느 샌가부터 황태자 전하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의술을 펼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아직 한참 멀었구나.’
그는 반성했다.
제멋대로 오해한 황태자의 모습을 보며 다짐했다. 전하의 저러한 마음가짐을 배우자고. 더 노력하자고.
한편, 데미안의 감탄은 결이 조금 달랐다.
‘타국의 부상병을 치료하러 달려가는 황태자. 과연 진짜가 맞을까. 그런 미친 인간이 현실에 존재한다고?’
그런데 존재하는 것 같다. 무려 자신이 모시는 황태자다. 진심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상관없나. 나는 그저 수당만 제대로 챙겨 받으면 되니까.’
그게 전부라고 데미안은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일행이 마침내 앙부아즈 왕국군과 합류했다.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라키엘은 왕녀 아델린의 지원을 받았다. 그녀의 보증과 후원 덕분에 무사히 앙부아즈 왕국군의 군의관으로 위장 취업(?)할 수 있었다.
곧바로 부임지를 배정받았다.
안전한 후방의 부상병 캠프였다.
“고맙습니다. 왕녀님 덕분에 일 처리가 매우 간단했군요.”
“무슨 그런 말씀을. 저야말로 고맙지요.”
팔랑!
왕녀 아델린이 빙긋 웃으며 종잇조각을 흔들었다.
“여기 적힌 레시피대로 하면 인진호탕을 달일 수 있다는 거죠?”
“예. 인진호탕에 들어가는 약재가 단순한 편이라,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대신-”
“절대 빼먹지 말고 매일 복용할 것. 그래야 담석이 생기는 걸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을 테니까. 맞나요?”
“……맞습니다. 이제 한의사 다 되신 듯.”
“그럼, 부상병 캠프에서도 부디 무탈하시구요.”
“안전한 후방이니 별일 없을 겁니다.”
“네. 그럼.”
그렇게 아델린의 배웅을 받았다. 데미안, 가르딘 경, 그리고 왕녀가 붙여준 십여 명의 호위기사와 함께 왕국군 본진을 출발했다.
다시 여정이 이어졌다.
산 넘고 물 건너……진 않았다. 후방의 부상병 캠프는 왕국군 본진이 주둔한 발루아 요새에서 불과 반나절 거리에 있었다.
‘체감되는 거리로 따지면, 으음. 서울 연세대 앞에서 일산 정도?’
덕분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한데 도착한 부상병 캠프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상하다기보다는…….
“뭐야. 여기 왜 이렇게 허름해?”
본진에서 불과 반나절 떨어진 거리인데. 지척에 불과한 곳인데. 그런데 캠프의 상태가 굉장히 허름해 보였다.
“…….”
라키엘은 캠프를 슥 둘러보았다. 캠프 주위로 둘러쳐진 목책은 허술하기가 짝이 없었다. 유사시를 위한 방비나 방어? 사치일 듯했다. 저걸론 좀도둑도 제대로 못 막을 듯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곳곳에 세워진 천막 상태 실화? 찢어져서 너덜거리는 건 기본에다가, 최소한의 보수를 한 흔적도 거의 안 보여. 그냥 넝마 상태인데. 비라도 오면 줄줄 새겠구만.’
보고 있자니 이상했다.
라키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설마.’
문득 떠오른 역사적 지식.
그 순간 그의 걸음이 바빠졌다.
“여기, 의무병은 없나?”
펄럭!
가까이에 있는 천막으로 다가갔다. 천막 휘장을 걷으며 안쪽을 향해 물었다. 그 직후, 그는 흠칫해야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안쪽의 참상을 목격한 까닭이었다.
“…….”
천막 안쪽에서는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죽은 사람은 대답을 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천막 안쪽의 이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이게 무슨.’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새까만 파리 떼. 그 아래에 있는 여덟 구의 시신.
반듯하게 눕혀진 것도 아니었다. 나뒹굴고 있었다. 저렇게 방치된 지 얼마나 된 걸까. 이틀? 사흘? 나흘? 족히 그 이상은 되어 보였다. 이미 부패가 진행되는 시신도 있으니까.
그때였다.
“거기 누구십니까?”
뒤에서 누군가의 물음이 날아왔다.
돌아보았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병사가 보였다. 앙부아즈 왕국군의 군복을 입은 병사였다. 희한하게도, 병사의 군복은 전혀 허름하지 않았다. 표정도 태연했다.
천막 안쪽에는 방치되어 나뒹구는 여덟 구의 시신. 천막 바깥에는 멀쩡한 모양새의 왕국군 병사. 넝마가 된 천막 쪼가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서 나란히 놓인, 너무나 대조적인 광경.
이상했다.
정말로 이상했다.
라키엘은 굳은 눈길로 병사를 쳐다보았다.
“내가 누군지보다 그쪽부터. 누구지?”
“아, 본진에서 내려온 장교이십니까?”
“그쪽이 누구인지 물었다.”
“저는 부상병 캠프의 관리병입니다. 그런데 본진에서 내려온 장교가 맞으십니까?”
“군의관이다.”
“군의……관 말입니까?”
“그래.”
“으음, 그런 분이 오신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병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태연한 모습이 너무나 이상했다. 라키엘은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쪽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여기, 이 천막 안쪽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는 있는 건가?”
사람 여덟이 죽었다. 그러고도 며칠째 방치된 모습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부상병 캠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병사의 대답은, 더욱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천막 안쪽 말입니까? 알고 있습니다. 다 죽었겠지요.”
“……뭐?”
“아, 혹시 아직 안 죽은 인원이 있습니까? 그럼 곤란한데 말입니다. 다음 부상병들을 넣어둘 자리가 모자랄 거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지?”
“아아. 군의관님께서는 부상병 캠프가 처음이시라 아직 잘 모르시나 봅니다. 천막 안의 인원이 다 죽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리를 비울 거고, 다음 부상병들을 채워 넣을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뭐?”
“그래서 저는 천막 상태를 확인하러 온 겁니다. 안쪽의 인원이 때맞춰서 다 죽어 있으면 시신을 치워서 소각장으로 보내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혹시 안쪽에 파리가 많이 생겼습니까?”
“그건 왜?”
“시신 치울 때 성가셔서 말입니다.”
“…….”
라키엘은 침묵했다.
아까 얼핏 떠올랐던 역사적 지식. 언젠가 책을 통해 보았던 역사의 단편. 그 내용이 다시금 뇌리에 주르륵 펼쳐졌다.
‘중세 유럽. 그 시대의 전쟁과 부상병…….’
당시엔 부상병에 대한 대우가 매우 열악했다고 했던가. 전쟁터에 끌려온 징집병은 죽으면 끝인 소모품으로 여겨졌노라 했다. 그래서인지 부상병에 대한 제대로 된 치료나 간호, 재활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조금 다치면? 아무도 신경을 안 썼다지.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다치면?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중상을 입으면? 마찬가지로 아무도 신경을 안 썼어.’
그저 후방으로 옮겨두기만 했다고 하였다. 그 이유도 회복이나 치료를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했던가.
‘중상을 입은 자들을 부대에 함께 두면…… 함께 이동하기가 번거롭고 나머지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지. 그래서였어. 부상병들을 후방으로 옮긴 것은. 그저 보이지 않는 곳에 팽개쳐두고 방치하기 위함이었지.’
그럼 후방으로 옮겨진 부상병들의 운명은 어떠했을까. 비참했다고 했다. 정말 최소한의 치료만 받아도 감지덕지. 대부분은 방치되며 알아서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했다.
개중에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병사는?
그게 운명이었다며.
신의 은총이 깃들었다며.
커다란 행운을 받았다며.
다시 전쟁터로 보내지는 게 다였다!
‘딱 그거지. 알아서 죽거나. 운 좋으면 살아서 다시 전쟁터로 보내지거나.’
당시엔 책을 읽으며 얼마나 혀를 내둘렀던지. 뭐 저런 엿 같은 곳이 다 있나 싶었다. 그런데 여기 부상병 캠프가 딱 그런 듯했다.
눈앞의 태연한 병사를 보아도. 천막 안쪽의 죽어 있는 이들을 보아도. 도저히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아. 인생 진짜.’
절로 깊은 탄식이 나왔다.
비참하게 죽은 부상병들의 모습에 연민을 느껴서? 생각지도 못한 컬처 쇼크를 느껴서? 그건 당연했다. 한편으로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기껏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캠프 상태가 이러면, 보너스 수명은 어떻게 얻지?’
이대로면 망하는 각이다.
이래선 안 된다.
캠프의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 부상병에 대한 인식과 대우를 개선해야 한다. 그래야 부상병들이 산다. 자신도 여기까지 온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야말로 모두에게 윈윈이 되는 셈이다.
그러자면?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
결심한 라키엘이 입을 열었다.
“그쪽, 캠프의 관리병이라고 했나.”
“네? 네!”
“이름과 소속은?”
관등성명을 물었다. 이쪽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걸까. 병사가 얼른 답했다.
“21 지원대대 소속의 루에노 상등병사입니다.”
“그래. 루에노 상등병사. 그럼 이 캠프의 책임자가 누구지?”
“그…… 대대장님이십니다.”
“대대장 누구.”
“프로뱅 자작님이신데 말입니다.”
“그래? 프로뱅 자작이라. 지금 이 캠프에 있어?”
“예, 그렇습니다.”
“잘됐네. 튀어오라 그래.”
“……예?”
상등병사가 흠칫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 확신을 품고서 오히려 한결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전하란 말이다. 여기 대대장이라는 작자, 1분 줄 테니까 당장 튀어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