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전설은 위장 취업으로부터 (3)
물론 대대장이 당장 튀어오는 일은 없었다. 그는 이쪽의 말을 아예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이젠 직접 쳐들어가시는 겁니까?”
“어. 그래야지.”
라키엘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데미안이 뒤를 따르며 물었다.
“괜찮으실까요?”
“음?”
무슨 뜻일까, 저 물음은.
녀석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위장 신분을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 덕분에 표면적으로는 일개 군의관일 뿐이고, 대대장이 내 말을 순순히 들을 리가 없을 거다?”
“송구하지만, 예.”
“괜찮아.”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아리송하다는 기색을 내비치는 데미안. 녀석을 뒤로 두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대대장의 지휘 천막을 찾기는 매우 쉬웠다. 가장 크고, 화려하고, 멀쩡한 천막을 찾으면 되었으니까.
‘거의 대궐이구만.’
뻥 좀 섞자면 한국에서 살았던 투룸 전셋집 크기는 되어 보이는 천막이었다.
그 안으로 들어갔다.
펄럭!
“실례합니드아.”
안쪽을 향해 상큼한 인사를 건넸다. 물론 돌아오는 훈훈한 화답은 없었다. 대신 노골적으로 삐딱한 시선만이 날아왔을 뿐.
“댁이 오늘 부임했다는 새 군의관이오?”
검은 콧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간이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마도 대대장이라는 프로뱅 자작인 듯했다. 그런데 저 작자, 설마 해가 중천에 떠오른 지금까지 자다가 일어난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라키엘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맞습니다. 군의관 리한입니다. 그런데 혹시 아까 상등병사를 통해 전달한 말을 못 들으셨는지?”
“들었소. 나보고 당장 와보라고 하셨다지?”
“그렇습니다만.”
“그게 얼마나 경우 없는 행동인지에 대한 자각은 있소?”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이쪽을 향해 노골적으로 따져 오는 대대장. 하지만 라키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태연하게 반문했다.
대대장의 콧수염이 꿈틀거렸다.
“나는 이곳 부상병 캠프의 최고 책임자요. 지휘관이기도 하고. 한데 일개 군의관인 그쪽이 나를 더러 오라 가라 할 수 있단 말이오?”
“아. 그래서 불만이셨군요.”
“당연하지. 군의관이 귀하다고는 하지만 내게 특별대우를 받으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으시오.”
대대장의 말투가 근엄해졌다. 자신의 권위가 통한다고 착각한 걸까. 아무래도 그런 거겠지.
같잖다.
라키엘은 더욱 노골적인 조소를 머금었다.
“특별대우라. 그건 제가 아니라, 부상병들이 받아야 하는 거 아닐까요.”
“……뭐요?”
멈칫하는 대대장.
그를 향해 말했다.
“오면서 봤습니다. 아니, 오자마자 봤지요. 이곳 캠프의 부상병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말입니다.”
“취급이라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제때에 치료받지 못하고 있더군요. 방치에 가까운 상태로 죽어가는 이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그런데 대대장님은 조금 전까지,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늦잠을 즐기고 있었지요. 하여 묻고 싶습니다. 여기, 부상병 캠프가 맞습니까?”
“당연히 맞소. 부상병이 있으니까 부상병 캠프지.”
“…….”
방금, 엄청난 대답을 들은 것 같은데.
라키엘은 귀를 의심했다. 대대장의 상식을 짓밟는 대꾸가 이어졌다.
“부상병이 모여 있으면 그게 부상병 캠프지, 뭐겠소? 그리고 나는 부상병을 관리하는 몸이오. 저들이 누워서 잘 수 있는 잠자리, 굶어 죽지 않도록 먹을 음식과 물을 관리하고 제공하는 사람이오.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니오?”
“뭐라고요?”
“틀렸소? 까놓고 말해서, 부상병이라는 것들 말이오. 어차피 못나고 약하니까 전쟁터에서 못 버티고 다친 것들 아닌가? 더 강하고 빨랐으면, 영리하게 움직일 줄 아는 놈이었으면, 저렇게들 멍청하게 다치고 다 죽어가는 꼴로 실려 오지도 않았을 테지. 안 그렇소?”
“…….”
“그러니까 나약하고 멍청한 것들한테 무슨 거창한 정성을 쏟는단 말이오? 잠도 재워주고 밥도 주면 됐지. 그 정도면 오히려 감사해 하면서 알아서 나아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오.”
“…….”
“내 말 틀렸소? 그러다가 못 나으면? 그것도 나쁘진 않지. 쓸데없는 입을 줄이는 거니까. 당장 전쟁터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밥만 축내는 놈들이 사라져 주는 거니까.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적당히 서로 봐주면서 지냅시다. 어? 나 안 그래도 바빠. 힘들어. 여기서 매일 죽어나가는 것들 태워서 처리하는 것도 지겹고. 이따위 거지 같은 좌천직에서 벗어나서 전쟁터로 돌아가고 싶고. 적군의 모가지를 썩썩 베면서 다시금 명예도 되찾고 싶단 말이오. 어?”
“…….”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몇 달쯤 부대시설 관리에나 힘쓰며 실적이나 쌓다가 다시 상부의 내 자리로 돌아갈 거요. 그러니까 당신도 적당히 합시다, 어? 보아하니 솜털도 보송보송한 것이, 전쟁터도 처음인 것 같은데. 괜히 쓸데없는 의욕으로 서로 피곤할 일이나 만들지 말고 말이오.”
“……하.”
라키엘은 웃어 버렸다. 제일 먼저 든 고민은 뭐라고 쌍욕을 박을까였다.
‘이 인간, 대놓고 쓰레기 꼰대 스타일이네.’
몇 마디 주절거리는 걸 듣다 보니 파악이 됐다. 한국에서도 저런 인간들 제법 봤으니까. 특히 전경 시절에 그랬다.
‘철밥통 간부들이 딱 저랬지. 조금만 신경을 쓰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얼마든지 생활을 개선할 수 있었어. 갖가지 부조리를 없앨 수 있었어. 모두가 나아질 수 있었어. 하지만 그걸 하지 않았지. 왜냐. 당장 귀찮으니까. 자신한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였다.
자기 편한 일만 추구했다. 아랫사람들이 힘들든 말든 나 몰라라 했다. 차라리 거기까지였으면 나쁘진 않았을 것이다.
‘더 최악은…… 부조리를 바꾸려는 의욕을 보이는 사람에게 사사건건 태클을 걸었다는 점이야.’
번번이 개혁 의지를 꺾어 버리곤 했다. 부조리와 불합리에 물든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왜냐.
그게 자신에게 편하니까. 유리하니까. 그렇게 했다.
‘뭐, 사회에서도 저런 스타일 제법 봤고.’
자신의 한의원에 영업을 오던 제약사 직원도 떠올랐다. 하루는 상사 때문에 고민이 많노라던 하소연도 들어주었다. 그 영업 직원의 상사도 저런 스타일이었더랬다.
그런 덕분이었다.
라키엘은 대대장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인간도 똑같아. 현상 유지. 현재 상태가 얼마나 거지 같든 말든, 상관없이 현상 유지만 하는 게 목표인 거야.’
그래선 곤란하다.
자신은 부상병들을 살려야 한다. 그래야 보너스 수명을 알뜰살뜰 적립할 수 있다.
‘한데 하필이면 내가 부임한 곳의 관리 책임자가 오직 현상 유지만을 목표로 두는 철밥통 스타일이라. 그럼, 마지막 기회만 살짝 줘볼까.’
대대장을 보는 라키엘의 눈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유지했다. 그가 말했다.
“쓸데없는 의욕으로 서로 피곤할 일이라…….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래서 저도 몇 가지 요청만 좀 하고 싶은데 말입니다.”
“요청 말이오?”
“예.”
“하아, 나 참. 뭘 요청하고 싶은 거요?”
“우선 부상병들이 머무는 천막부터 상급 신품으로 교체해 주십시오.”
“……뭐요?”
“말씀 그대로입니다. 오면서 캠프를 둘러보니 부상병들이 사용 중인 천막이 너무 심하게 낡았더군요. 추위나 비바람을 제대로 막을 수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면 곤란합니다. 부상병들이 최대한 편안하게 휴식하며 체력을 보존할 수 있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게 무슨 헛소…….”
“헛소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캠프의 기간병을 동원하겠습니다.”
“기간병을? 어째서 말이오?”
“부상병을 분류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분류……?”
“예. 트리아지(triage) 방식을 곁들일까 합니다. 워낙 다양한 부상병이 섞여 있으니까 말입니다. 중증부터 경증까지. 치료가 시급한 부상병과 다소 여유가 있는 부상병을 구분해야 합니다. 치료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치료를 시행해야 합니다. 부상병은 많고, 일손은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
“그리고 개인 위생과 보급에도 더욱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오면서 봤는데 부상병에게 지급되는 음식의 상태가…….”
“그만!”
“…….”
라키엘은 대대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대장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허. 참. 아까 내가 한 소리 못 들었소? 서로 피곤하지 않게 하자고 했잖소. 그런데 뭐? 천막을 전량 교체? 환자 분류? 위생? 음식을 뭐? 지금 이거, 뭐 하자는 거요?”
“부상병을 살리자는 겁니다.”
“허. 이거 참. 사람 또 피곤하게 만드시는구만. 이보시오, 군의관. 내가 댁 같은 군의관을 처음 겪어보는 줄 아는 거요?”
“더 있었습니까?”
“물론이지. 더 있었지. 제법 있었소. 다들 처음 부상병 캠프에 보송보송하고 순진한 얼굴로 부임 받아 와서는, 댁처럼 의욕을 불태우지. 순수한 열의와 열정을 내보이곤 하오. 환경을 바꿔야 한다고. 하나라도 더 살려야 한다고 말이오.”
“…….”
“그렇게 설치면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오. 처음엔 나도 호응해 주었소. 어쨌건 부상병이 조금이라도 살아나는 게 나쁜 일까진 아니니까. 귀찮아도 그 정도는 감내할 만하니까. 그런데 그렇게 호응해 준 결과가 뭐였는지 아시오?”
“뭐였습니까.”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다들 도망치더이다. 약속이나 한 듯이,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말이오.”
대대장이 이를 갈았다.
“하. 그래서 솜털 보송보송한 애송이들 장단에 맞춰 주는 게 아니었는데. 설치기는 더럽게 설치고. 그렇다고 딱히 부상병들이 더 많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괜히 사람 피곤하게만 만들면서 성과는 없고. 그러다가 스스로 감당이 안 되니까 얼굴도 못 들고서 다른 편한 곳으로 줄행랑을 치고 말이오.”
대대장이 울분을 터뜨렸다.
“그래서요. 나는 댁 같은 애송이들이 싫소. 제대로 피를 만져본 적도, 죽어가는 사람을 간호해본 경험도 없는, 오로지 책으로만 머릿속에 지식을 욱여넣은 애송이들 주제에 자기가 뭐라도 된 듯이 나서서 설치곤 하지. 그거, 서로 피곤해지는 거요. 알겠소? 댁도 다를 거라는 보장, 있소?”
“…….”
“어째서 대답이 없소? 그럼 나와 내기 하나 합시다.”
“무슨 내기 말입니까?”
“내가 보는 앞에서 부상병 하나를 살려보시오. 그럼 댁의 실력을 인정하고 순순히 협력해주지. 어떻소?”
“…….”
대대장 이 작자, 미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대대장이 휘하의 병사를 불렀다. 뭐라고 지시했다. 병사가 뛰어나갔다. 이윽고 천막 바깥이 분주해졌다.
그리고…….
“명대로 부상병을 데려왔습니다.”
병사들이 들것을 가지고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들것에 부상병이 실려 있었다. 딱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대대장이 부상병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보시오. 댁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려는 부상병을 데려왔소. 그러니 여기, 이 자리에서 이 부상병을 살려내 보시오. 어디 실력부터 좀 봅시다.”
대대장의 목소리는 어느덧 기세등등해져 있었다. 이쪽이 위축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쪽을 그렇게나 애송이로 여긴 걸까.
웃음이 나왔다.
‘허허허.’
이래 봬도 내가 한의원을 꾸리던 인간이었다. 지금도 별궁 한의원의 원장이다. 어쨌건, 대대장의 태도를 보니 확신이 들었다.
‘협상 결렬이네.’
솔직히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했다. 최대한 좋게 좋게 협력을 받아보려 했다. 그래야 자신도 편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곳 캠프의 운영 실태, 각종 물자의 보급 상태, 장구류 현황, 각 제대의 관리병 인원 동향 등등의 행정적인 부분을 저 인간이 가장 잘 꿰고 있을 테니까.’
어쨌건 대대장이니까.
지휘관이니까.
협조를 받으면 그런 자잘한 부분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질 거라고 보았다. 그러면 자신도 의술에만 힘을 쏟을 수 있으리라 보았다.
하여 협조할 각을 재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그런데 방금, 저 인간이 스스로 기회를 걷어찼다.
그렇다면 결론은 명확하다. 이쪽이 행할 일도 확실하다. 라키엘의 시선이 한층 서늘해졌다.
“데미안.”
곁의 데미안을 불렀다. 대대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 자를 제압하고 구금해.”
“알겠습니다.”
명령과 실행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쪽이 명령하자마자 데미안이 검을 검집째 들었다. 대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 하는 사이에 데미안이 움직였다.
후웅, 뻐걱!
“……억!”
데미안이 낮게 휘두른 검집이 대대장의 발목을 후려쳤다. 대대장의 두 다리가 허공에 떴다. 등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커억!”
대대장이 나뒹굴었다.
옆의 병사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반응할 틈은 없었다. 어느새 검집에서 뽑힌 데미안의 검 끝이 쓰러진 대대장의 면전에 들이대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커, 커으읍,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대대장이 시뻘게진 얼굴로 빼액 외쳤다.
“당신, 미쳤어? 어! 이게 무슨 짓이야! 여긴 내 캠프고, 내가 이곳의 지휘관이야! 지금 당신, 일개 군의관 주제에 이런 하극상을 벌이고도 무사할 줄 알아? 어!”
그가 이쪽을 삿대질했다. 소리치며 침을 튀겨댔다. 보고 있자니 비웃음이 나왔다.
“그만. 거기까지 합시다.”
“뭐? 내가 댁이 그만 하라면 그만 하는 뭐 그런 사람……!”
“이어야겠지. 이걸 본 뒤라면 말이지.”
팔랑!
더는 저 짖어대는 소리를 듣기 싫었다. 저 인간의 장단에 맞춰 주기도 싫었다.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넘어져 있는 대대장의 면전에 들이밀어 보여주었다.
“보이나?”
“이, 이건……?”
“왕국의 왕위계승 서열 1위이신 왕녀, 아델린 보아르네 앙부아즈께서 내게 직접 내리신 부상병 캠프의 전권 위임장이지.”
“…….”
“그런데 뭐? 저 부상병을 살리면 나한테 협력하겠다고? 내 실력을 인정하겠다고? 그쪽이, 감히, 날 평가하려고?”
“……어, 그, 그게.”
“그러니까 내가 좋은 마음으로 튀어오라고 했을 때 튀어왔어야지. 협력을 요청했을 때 순순히 응했어야지.”
“그, 저, 그건…….”
“데미안. 끌고 가.”
이쯤이면 많이 참아줬다. 변명을 더 들어줄 필요는 없다.
데미안에게 명령했다.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대대장의 얼굴이 극적으로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