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04화 (104/468)

104화. 획기적인 마취법 (1)

대대장은 구금되었다.

이미 마지막 기회까지 인심 낭낭하게 안겨줬던 터였다. 그런데도 대대장 본인이 그 기회를 대기권 돌파슛 쏘는 기세로 걷어찼으니, 봐주고 자시고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끌려가면서 발악하진 않았고?”

“의외로 얌전했습니다.”

“얌전했어?”

“네.”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라키엘. 그런 자신의 황태자를 바라보며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세상 다 끝난 듯이 고개를 숙이고서 한숨만 푹푹 내쉬더군요. 이제 승진이고 뭐고 다 끝났다나 뭐라나.”

“뭐,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라키엘은 콧방귀를 퐁 뀌었다. 여기는 부상병 캠프다. 엄연히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해 마련된 곳이다.

그런데 그 임무를 소홀히 한 자였다. 아니, 소홀한 정도를 넘어서 태업에 가까운 행태를 보였다. 심지어 개선안을 제시했음에도 거부하는 작태까지 보였다.

용서할 건덕지가 조금도 없었다.

“그 인간은 그대로 가둬둬. 나중에 왕녀께는 내가 알릴 테니까. 일단 그보다 지금은-”

라키엘은 이젠 자신의 소유(?)가 된 대대장 천막 안쪽을 죽 둘러보았다. 눈길을 받은 병사 서넛이 움찔했다. 아까 대대장의 명령을 받고서 부상병을 데려온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의 시선은 그들에게 머무르지 않았다.

“일단 여기 부상병부터 좀.”

그는 실려온 부상병의 상세부터 살폈다.

“으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화살에 다친 부상병이었다. 팔뚝에 두 발, 옆구리에 한 발. 어설픈 솜씨로 화살촉을 뽑아낸 자리에 붕대를 감아둔 게 보였다.

그런데 이 붕대, 마지막으로 갈아준 게 언제였을까. 과장 좀 섞자면 덕지덕지 배어난 시커먼 핏자국에 곰팡이가 피어날 기세였다.

라키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상처 부위 자체는 치명적이진 않아. 그런데 관리 상태가 너무 심하게 엉망이야. 이러다간 살릴 사람도 못 살리겠어.’

그야말로 처참할 지경이었다. 라키엘은 새삼 이곳 세상의 부상병에 대한 인식과 대우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소설 마검황의 전쟁 장면에서도 이런 상황을 묘사하던 부분이 아주 살짝 있었지. 잠깐 지나가는 듯하던 배경 묘사로.’

문득 떠올랐다.

데미안이 앙부아즈와 마젠타노의 대전쟁에 휘말렸던 에피소드였던가. 소설 속 그 지문이 뭐였더라.

[어디에나 널브러져 있는 부상병들의 모습. 그들을 동원한 영주들에게 버림받다시피 방치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데미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부상병이 죽은 신세나 다름없다지만, 그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럼에도 저런 모습에 안타까운 심정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라고 했던 것 같다.

‘당시엔 그냥 지나가는 듯하던 묘사라서 딱히 신경을 쓰진 않았는데. 그게 이렇게 정확한 묘사일 줄은 몰랐네, 진짜.’

생각할수록 한숨이 나왔다.

지구의 역사와 비교하면? 거의 17-18세기 수준쯤 될까 싶었다.

‘사실 지구에서도 멀리 갈 것도 없이, 1800년대 중반까지만 거슬러 가도 부상병에 대한 대우가 엄청나게 열악했지. 나이팅게일이 왜 유명해졌겠어. 전쟁터에서의 부상자 관리에 대한 신개념을 제시한 인물이니까 그런 거지.’

그만큼 전근대 전장에서 부상병의 신세는 암울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이걸 그대로 놔둘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많은 부상병을 살려내리라. 보너스 수명을 쑴펑쑴펑 퍼 받으리라. 야물딱진 다짐을 새기며 명령했다.

“데미안.”

“네, 리한 도련님.”

“당장 가르딘 경을 데려와 줘.”

“알겠습니다.”

잠시 후 가르딘 경이 천막으로 들어왔다. 예를 표하기도 전에 흠칫 놀랐다. 그의 눈길은 이미 부상병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경이 보기엔 어떤 것 같아?”

“당장 응급수술이 필요합니다, 전…… 도련님.”

“그렇지?”

“예.”

가르딘 경의 눈빛은 지금까지 본 어떤 순간보다도 활활 빛나고 있었다. 라키엘은 내심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가르딘 경을 데리고 오길 잘했어.’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가르딘 경의 전공에 대한 사실이었다.

‘얼마 전에 가르딘 경이 털어놓은 게 있었지. 실은 자신은 외과 수술이 주특기라고. 그래서 다른 주치의들이 다 도망가고 자신만 내 곁에 남았을 때, 솔직히 엄청나게 막막했다고 말이야.’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소설에선 엑스트라에 불과한 가르딘 경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었으니까. 당연히 가르딘 경의 특기가 무엇인지, 의술의 어떤 파트를 전공으로 삼았는지도 나오지 않았더랬다.

‘그런데 마침 가르딘 경이 외과 수술 전문이라면…… 나한테 딱 필요한 인재인 셈이지.’

라키엘은 자신이 익힌 한의술, 한의대의 커리큘럼을 되새겼다. 거기서 외과에 관련된 교육을 아예 안 받은 건 아니었다. 본과 과정에서 응급의학, 외과학을 익혔다. 해부학과 해부학 실습도 거쳤다.

하지만 거기까지일 뿐이었다.

졸업 후에 외과 수술에 대한 경험을 쌓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별궁 한의원을 운영하며 난감한 때가 종종 있었다.

한데 가르딘 경이 외과적 능력으로 지원을 해준다면?

‘내 가장 커다란 약점을 메꿀 수 있어. 진료 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힐 수 있을 거야.’

특히 온갖 외상이 난무하는 전쟁터의 부상병을 치료하자면? 가르딘 경의 조력이 필수일 것이다. 그래서 여기까지 데려왔다.

이제는 그 실력을 확인할 때였다.

“그럼 지금 당장 응급수술, 할 수 있겠어?”

“예, 물론입니다.”

기대감을 품으며 물었다.

가르딘 경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커다란 배낭을 테이블 위에 턱, 하고 내려놓았다. 배낭을 열었다. 수술 도구들을 척척, 테이블 위로 가지런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데 그 도구들의 모양새가 조금 이상했다.

터턱!

가르딘 경이 제일 먼저 테이블에 올려놓은 도구는 수술용 칼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보는 메스? 그거랑은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비슷한 걸 꼽자면 오히려…….

‘낫처럼 생겼는데? 칼날이 왜 저렇게 길고 커? 아예 정글도를 앞으로 휘어지게 만든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수술 도구가 아니었다. 차라리 망나니가 죄인 목 쑹컹쑹컹 베는 칼이라고 하는 게 맞을 듯했다.

그렇듯 망연자실(?)해진 이쪽의 눈길을 깨달은 걸까. 가르딘 경이 수줍게 웃으면서 말했다.

“살 찢는 칼입니다. 절단 수술을 할 때 피부와 근육을 잘라내는 용도로 쓰이지요.”

“……그게?”

“예, 도련님. 칼날이 묵직하고 앞으로 휘어 있어서, 힘을 적게 들이면서 근육을 한 번에 크게크게 잘라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터텅!

이번엔 톱이 테이블 위로 등장했다. 물론 역시나 심상치 않은 비주얼이었다.

‘나 저거 본 것 같아. 철물점에서 파는 줄톱이잖아, 저거.’

딱 철물점에서 파는, 두 갈래로 갈라진 줄톱과 거의 똑같이 생겼다. 가르딘 경이 여전히 수줍은 기색으로 말했다.

“뼈톱입니다. 사람의 뼈라는 게 워낙 단단해서 말이지요. 팔다리 절단 수술을 최대한 빨리 마치려면 반드시 필요한 도구입니다. 빠르게 끝낼수록 고통과 출혈이 적어지니까요. 참고로 저는 3분 이내에 장단지뼈를 잘라낼 수 있습니다.”

“3분…… 이내에?”

“예. 그 정도는 되어야 4명 중에 3명은 살릴 수 있거든요. 아, 그리고 이건 더 특별한 도구입니다.”

터턱!

이번에 등장한 흉기(?)는 전기톱을 닮은 도구였다. 아니, 아예 전기톱 한쪽에 수동으로 돌릴 수 있는 손잡이를 붙여둔 물건이었다.

라키엘은 아득해지는 심정으로 물었다.

“설마 그거, 체인톱은 아니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

“수동으로 여기, 체인 톱날을 회전시키는 톱입니다. 뼈칼을 대기에 애매한 부위나 두개골을 갈아낼 때 쓰는 톱이지요. 이래 봬도 최근에 구매한 최신품입니다.”

“어. 좋겠네.”

“물론입니다. 그리고 이거, 이거, 이것도…….”

턱, 터턱! 턱!

뒤이어 갖가지 다양한 고문, 아니, 수술 도구가 흉흉한 비주얼을 뽐냈다.

생살을 쫮 찢어 벌려서 그 안의 화살촉을 푸확 뽑아내는 화살촉 제거기. 여러 개의 대못을 한 큐에 살갗에 푹 찔러서 피를 왕창 뽑아낸다는 인조 거머리 기구. 대놓고 처형 도구처럼 생긴 두개골 관통기. 강제로 신선한 바람을 한껏 뿜어 넣어 인간의 항문을 활짝 오픈한다는 직장 관장기까지.

가르딘 경의 멋쩍은 표정 아래.

버라이어티한 고문 도구들이.

수줍은 자태를 착착 드러냈다.

그걸 보던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설마 이것들로 비밀기지 위치를 자백하게 만들려는 거야?”

“……예?”

“아, 아니. 농담이고. 조금 놀라서. 그나저나 그럼 마취는?”

라키엘은 물었다.

이토록 살벌한 수술 도구를 쓰려면 마취가 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가르딘 경이 당연하지 않다는 듯 되물어왔다.

“마취가…… 뭡니까?”

“어?”

“아, 혹시 도련님께서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을 물으신 겁니까? 그런 방법은 물론 있습니다.”

“그래?”

다행이다. 마취가 뭐냐고 물어오는 통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는데.

라키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성급한 안심이었다.

“보통은 독한 럼주에 아편을 타서 마시게 합니다.”

“……어?”

“그러면 환자가 인사불성이 되니까 말입니다. 맨정신으로 수술을 받는 것보단 한결 낫습니다. 까무러치거나 죽는 경우가 제법 줄어드니까 말입니다.”

“…….”

“하지만 제 경험상 럼주는 별로 좋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저는 다른 방법을 씁니다.”

“다른 방법? 어떤?”

제발.

좀 정상적인 방법 좀.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 희망도 금방 깨지고 말았다.

“보드카가 훨씬 낫습니다. 보드카에 레몬즙을 뿌리고 아편을 섞으면 됩니다.”

“……그럼 뭐가 더 좋아지는데?”

“더 맛있다고 환자들이 좋아하더군요.”

“…….”

“두려운 수술을 앞두고서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술을 맛보면 환자도 조금은 용기를 얻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x발.”

“……예?”

“아니, 못 들었으면 됐고. 어쨌건, 그럼 지금 하려는 수술은 뭐지?”

“절단 수술입니다.”

“뭐?”

“우선 화살에 맞은 쪽의 팔부터 잘라내면 어떨까 합니다.”

“……됐어.”

“예?”

“그 고문, 아니, 수술 도구 당장 넣어둬.”

라키엘은 넌더리를 내며 명했다. 가르딘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술 도구를 넣어두라니, 그럼 지금 수술을 안 하는 겁니까?”

“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해.”

“어째서 말입니까?”

“당장 환자를 죽일 수는 없잖아.”

그는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들어보니 마약을 푼 술을 진탕 먹이고서 진행하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무마취 수술이다. 한데 지금 실려온 부상병은? 이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부상 부위가 감염된 건지 열이 제법 끓고 있었다.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것은 물론이고, 면역력도 상당히 떨어져 있을 터였다.

한데 이런 상태에서 마취도 없이 수술을 진행한다면? 심지어 다짜고짜 팔을 잘라내는 절단 수술이라면?

‘환자가 못 버텨. 십중팔구 죽을 거야.’

라키엘은 쓰린 입맛을 다셨다.

자신은 이런 식으로 생사람을 잡는 치료를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효율적인 진료로 부상병을 살리고 싶었다.

그러자면?

‘마취가 필수야.’

팔다리를 자르든 뭘 하든. 하다못해 가벼운 봉합수술을 하더라도 마취는 필수일 것이다.

그는 가르딘 경을 비롯한 모든 이들을 물러나게 했다. 부상병과 둘만 남은 채 치열한 궁리와 고민을 시작했다.

‘마취. 효율적이고 신속하면서도 안전한 마취 방법이 필요해.’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가르딘 경의 방식은 절대 불가능.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침술을 응용해볼까. 아니스와 웨어울프 간호사들에게 시술해주었던 신경 교란 시술법은?

‘아니, 안 돼. 그건 특정 부위의 신경을 다른 신체 부위의 감각으로 대체하는 방법이니까. 통증 자체를 없애지는 못해.’

팔에서 느껴질 고통을 다른 곳에서 느끼게 할 뿐이다. 즉, 고통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다. 마취 효과가 없는 셈이다.

‘차라리 쿠스만에게서 강탈한 마비독? 아니야. 그건 통각 신경을 차단하는 효과보다 다른 위험성이 너무 크고.’

그럼 어떻게 할까. 어떤 방법을 써야 부상병을 마취시킬 수 있을까. 치열하게 고민하는 와중이었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고민을 엿듣고서 흥미를 나타냅니다.]

[심장 : 마취? 고통을 덜어낸다고? 훗, 나약한 정신이로군. 그 정도는 악으로 깡으로 기합으로 참아내면 되는 거 아닌가?]

[허파 : 허! 팝! 헙! 파합!ㅎ]

[대장 : 에이 그래도 수술을 하려면 안 아픈 게 좋지 말입니다.]

[간장 : 어차피 못 피할 고통이면 즐기면 안 됨?]

[위장 : 아 막막하면 스킬이나 개방해보든가ㅋㅋ HP는 뭐하러 모으는데ㅋ]

[오장육부가 당신을 격려하며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4,900]

“…….”

그래. 스킬. 어쩌면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키엘은 일말의 가능성을 떠올리다가 혀를 찼다.

‘쯧. 기왕이면 HP, 아껴두고 싶었는데.’

아무 때나 얻을 수는 없는 HP였다.

그만큼 귀한 자원이었다.

낭비하기 싫었다.

가급적이면 정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에 보유한 스킬의 레벨을 올리거나 하는 용도로 쓰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취를 성공하는 일이 가장 급선무야.’

그게 안 되면 아무것도 안 되는 상황이다. 기껏 머나먼 앙부아즈까지 고생하며 온 보람도 모두 사라진다.

그러니 가능성을 더듬어보자. 가능한 모든 방법을 써보자. 라키엘은 결심했다.

‘스킬을 개방할 때마다 뜻밖의 부가기능을 얻었으니까. 진맥 스킬을 얻으면서는 종합검진과 경혈 스캐닝을 얻었고, 탕약 조제 스킬을 얻으면서는 내가 조제한 탕약의 성분과 효능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게 됐지.’

게다가 진료비 청구 스킬은?

보너스 수명 획득이라는, 가장 귀중한 옵션을 안겨주었다.

‘그러니 해보는 거야.’

자신이 개방할 수 있을 스킬들. 어쩌면 그중에 마취에 유용한 옵션이 있을지도 모른다. 가능성이 느껴졌다. 결심하며 시스템 창을 열었다.

반응은 곧바로 왔다.

딩동!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을 열람합니다.]

화아악-!

눈앞이 환해졌다.

메시지가 위아래로 길어졌다. 일목요연한 목록이 눈앞에 펼쳐졌다.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

[1. 침술]

[2. 부항]

[3. 뜸]

[4. 약재 감별]

[5. 약초 탐색]

[6. 약술 주조]

[7……]

여기까진 전과 똑같았다. 그런데 제일 아래쪽에 새로운 목록이 생겨나 있었다.

[7. 내 손은 약손]

‘어?’

목록을 보던 라키엘이 멈칫했다. 불현듯, 한 가지 가능성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설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