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획기적인 마취법 (2)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촉이 오는 순간이 있다.
이유는 없다.
밑도 끝도 없다.
그런데 빡 하고 온다.
그런 촉이 전두엽 주름을 때리고, 십이지장 융털돌기를 짜르르 떨리게 하는 순간이 정말로, 가끔씩 있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이거, 어쩌면…… 미친 스킬인 거 같은데?’
라키엘은 트위스트를 추려는 눈동자를 꽉 붙잡았다. 그리고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의 제일 아래쪽을 뚫어지도록 노려보았다.
전에 없던 스킬이 그곳에 있었다.
[7. 내 손은 약손]
“…….”
저건 무슨 뜻일까.
일단 이름으로만 보아선…….
‘어릴 때 할머니나 엄마가 해주시던 거였는데. 배가 아프거나 할 때면 나 눕혀놓고선 손바닥으로 아픈 배를 살살. 그러면서 할매 손은 약손 하고 노래도 불러 주시고.’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등과 손바닥. 자신은 그 손을 요술 손바닥이라고 불렀던가. 어떻게 아프든, 어디가 아프든 할머니가 살살 쓰다듬어 주시면 거짓말처럼 아픈 게 나았더랬다.
‘그럼 이거, 내 손은 약손이라는 거. 내 생각대로라면 지금 상황에 딱 필요한 엄청난 스킬일 거 같은데. 미리보기나 설명 같은 건 조금 들을 수 없나?’
그러면 선택하는 데에 도움이 될 듯한데. ……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는 순간이었다.
딩동!
설마 이쪽의 마음을 알아챈 걸까. 아니면 그냥 타이밍이 맞아떨어진 걸까. 새로운 메시지가 상큼하게 주르륵 떠올랐다.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은 언제나 실시간으로 갱신됩니다.]
[당신이 새로운 재능, 기술, 지식을 습득할 때마다 목록에 새로운 스킬 후보가 생성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난 몇 개월 동안 수많은 환자를 정성으로 보살펴왔습니다. 그러한 마음가짐과 정성이 농염하게 농축된 끝에, 당신은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달래줄 수 있는 새로운 기예를 습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손은 약손> 스킬은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에 탁월한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거다!’
라키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역시나 촉이 맞았다.
더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 선택!’
설명으로 보아도 확실하다. 저 스킬, 마취와 강력한 연관성이 있을 터였다. 확신하며 ‘내 손은 약손’ 스킬을 선택했다.
딩동!
[목록 7번. <내 손은 약손>을 선택하셨습니다.]
[스킬 개방 (3회차) 비용 : 4,500 HP]
[스킬을 개방하시겠습니까?]
[YES / NO]
‘……뭐? 4,500 HP?’
입이 쩍 벌어지는 비용이었다.
라키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럼, 이거 하나 개방하면 한 큐에 HP 개털 되는 거네?’
순간 고민이 되었다.
원래는 ‘내 손은 약손’부터 개방하고, 옵션을 확인한 후에 침술이나 다른 스킬도 이참에 개방할까 싶었다. 한데 그게 불가능해 보였다.
‘지금 내가 가진 HP를 다 긁어모아야 4900인데. 스킬 하나를 개방하면 그냥 바닥이야. 다른 기회가 더 없어.’
그럼 어떻게 할까. 정말로 ‘내 손은 약손’ 스킬을 눈 딱 감고 개방할까.
아마 침술 등의 다른 스킬에도 유용한 기능이 잔뜩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마취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지금은 마취와 연관이 조금이라도 있는 ‘내 손은 약손’ 스킬에 투자를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터.
‘……가즈아!’
굵고도 짧은 고민이 끝났다. 라키엘은 과감하게 YES를 선택했다.
딩동!
[당신의 환자를 보살폈던 정성의 경험이 스킬로 변환됩니다.]
[<내 손은 약손>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400]
그동안 열심히, 알뜰살뜰 모아두었던 HP가 쑴텅 깎여나갔다. 대신 새로운 스킬로 연성(?)되었다.
[스킬명 : 내 손은 약손 Lv.1]
[대상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통증을 감소시킵니다. 국소마취 수준의 통증 감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마취의 강도와 범위, 지속 시간은 스킬의 레벨 성장과 함께 증가할 것입니다. (발동 조건 :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에헤이야~’라는 주문을 운율에 따라 정확하게, 지속적으로 불러주어야 함. 단, 주문의 노랫소리가 마취 대상과 주변인들에게 들릴 정도로 또렷하고 낭랑하지 못하면 마취 효과가 취소됨.)]
‘……됐다!’
과감하게 선택한 내 손은 약손 스킬. 설명을 다 읽은 라키엘은 내심 환호했다. 촉이 맞았다. 정말로 이거, 즉각적인 마취 스킬이 확실하다.
게다가 효과마저 엄청났다.
‘이거, 어떠한 약물이나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즉석에서 시전이 가능한 거잖아. 말 그대로 내 손이 휴대용 마취 도구가 된 거네.’
라키엘은 감탄했다.
놀라운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마취에 따르는 위험도 없어. 병원에서 약물로 마취를 시킬 때는 환자의 체중과 건강 상태를 전부 체크하면서 약의 양을 세심하게 조절해야 하는데. 안 그러면 바로 의료사고가 나 버리는데. 그걸 걱정할 필요가 없어. 이건 그냥 쓰다듬기만 하면 되니까.’
심지어 마취가 깨는 조건도 심플했다. 그냥 쓰다듬는 걸 그만두기만 하면 됐다!
‘사기네. 사기야.’
언제든지 쓰다듬기만 하면 되고. 마취의 부작용이나 위험성은 없고. 마취가 풀리는 시기도 즉각적으로 맞출 수 있다니.
이건 전국, 아니, 전 세계 종합병원의 마취과 전문의가 본다면 기절할 때까지 텀블링을 뛰면서라도 얻고 싶어 할 그런 능력이 아닌가.
‘……물론 요상한 노래를 다 들리게 불러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뭐,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약간의 쪽팔림.
엄청난 능력에 대한 대가치고는 싸다. 그렇게 생각하며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이쪽의 명령을 듣고서 짐을 주섬주섬 싸고 있는 가르딘 경이 보였다.
당장 수술을 할 수 없다고, 이대로 마취도 없이 했다간 환자가 죽을 거라고, 그러니 수술은 접어두라고 했던 말 때문에 시무룩해진 걸까.
‘가르딘 경, 침울해 보이네.’
아무래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여긴 건가 보다. 그럼 이제는 오해를 풀어줘야겠다.
아까와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마취, 할 수 있을 듯하니까.
“가르딘 경.”
“……예, 도련님?”
“아까 내가 했던 말 취소.”
라키엘은 희미하게 웃었다.
“잠깐 기다려봐. 어쩌면 환자를 마취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럼 술과 아편을 가져올까요?”
“아니. 다시 수술 도구 꺼내고 있어봐.”
“예?”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르딘 경. 이쪽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적응이 안 되는 듯했다.
하지만 자잘한 설명을 해주진 않았다. 일단은 스킬의 성능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라키엘은 부상병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봐, 대답할 수 있겠나?”
“으음…….”
겨우 눈을 뜨는 부상병.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뭐지?”
“티에…… 티에리…… 하급병사입니다…….”
“그래, 좋아. 티에리 하급병사. 이제부터 나와 여기 가르딘 경이 그쪽을 치료할 거야.”
“그…… 제 팔을…… 자르시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되고. 어딘갈 잘라내거나 하는 일은 최대한 없도록 할 생각이라서.”
“하지만…… 아프겠지요……?”
“안 아프게 해줄 거야.”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하급병사 티에리는 힘겹게 웃었다. 사실 그의 웃음은 자조적인 한탄에 가까웠다.
평범하게 살던 농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나라에 전쟁이 벌어졌다고 했다. 영주에게 징집되었다. 전쟁터로 끌려나갔다.
어떤 놈들이 적군인지는 전쟁터에 나가서야 뒤늦게 알았다. 같은 나라의, 똑같은 농부였다가 끌려온 자들이었다. 반란군이라고 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어쨌건 싸웠다. 죽기 싫어서였다. 싸우고, 격한 숨을 토하고, 그러다가 화살에 맞았다. 무려 세 발이나.
그렇게 여기까지 수레에 실려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희망은 있었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천만다행으로 화살촉이 내장을 찌르지 않았다고. 살갗과 근육만 찢어졌으니 죽을 일은 없을 거라고. 이제 치료를 받을 수 있겠다고. 다 나으면 감사의 인사를 꼭 해야겠다고.
……헛된 희망이었다.
죽지 않은 게 오히려 불운이었다. 치료를 받는 건 꿈 같은 사치였다. 일찍 죽었다면 받지 않았을 고통을, 살아서 천천히 받게 되었다.
‘오늘도 똑같겠지.’
티에리는 아무런 기대감 없는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화살에 맞은 자리가 가만히 숨만 쉬어도 아팠다.
한데 그때였다.
촵.
누군가가 옆구리를 짚어 왔다.
눈을 떠보니, 방금까지 말을 걸어주었던 적발의 뚱보 군의관이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쉿. 이제부터 마취를 시작할 거야.”
“……예?”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
내 손은 약손?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설마 사람 놀리는 건가. 티에리는 아픈 와중에도 짜증이 확 치솟는 걸 느꼈다.
한편 적발 뚱보 군의관, 라키엘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어후. 이거 실제로 해보니까…… 생각보다 훨씬 민망하네.’
하필이면 이런 노래를 구성지게 불러야 한다니. 엄청난 보상에 비하면 약간의 쪽팔림일 줄 알았다. 한데 막상 직접 해보니? 생각보다 훨씬 민망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라키엘은 눈을 질끈 감으며 노랫가락을 읊조렸다.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스사사사, 사삭.
나름 노랫가락을 읊으며 부상병의 옆구리 주변을 살살 쓰다듬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딩동!
[노래의 성의가 부족합니다.]
[<내 손은 약손 (Lv.1)>의 발동에 실패했습니다.]
“…….”
인생 진짜.
라키엘은 이를 꽉 깨물었다. 작정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소오온~ 에헤이야~”
아까보다 또렷하게. 확실하게. 어릴 때 듣던 할머니의 가락을 떠올리며. 구성지게 꺾던 할매표 바이브레이션 양념도 제대로 팍팍.
그러자 반응도 팍 왔다.
딩동!
[<내 손은 약손 (Lv.1)> 스킬이 발동됩니다.]
[환자 : 티에리의 통증이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츠즈즈즈……!
라키엘의 손끝에 미약한 빛이 일순간 깃들었다. 하급병사 티에리의 옆구리에 스며들었다. 티에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옆구리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아프던 게 점점 사라졌다.
‘뭐지?’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별안간 자신의 옆구리를 쓰다듬으며 이상한 노래나 부르는 군의관을 향해 화가 나려던 참이었다. 치료를 못 받아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모욕하는 것이냐고. 울분을 터뜨리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너무나 뜬금없이.
옆구리가 아프지 않았다.
‘이게 무슨…….’
화살을 맞은 뒤로, 성의 없게 화살을 뽑은 뒤로는 언제나 계속 아팠던 옆구리였다. 불로 지지는 듯하던 고통을 종일 느꼈던 터였다.
그런데 아픔이 확 줄어들었다!
절대로 착각이 아니었다!
“지금 무슨…… 대체 뭘 하신 겁니까?”
저도 모르게 물었다. 뚱보 군의관이 뜻 모를 미소로 되물어 왔다.
“내 손은 약손~ 어때? 옆구리 아프던 건? 내 손은 야아아악손~”
“아…… 안 아픕니다…… 조금 욱신거리긴 하는데…… 그래도 불에 지지는 듯이 아프던 전보다 훨씬 나아졌습니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다 방법이 있지.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야아↘아악↗소오온~ 에헤라디야~”
“…….”
부상병 티에리는 입을 다물었다.
진짜다.
비결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저 뚱땡이 군의관이 옆구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통증이 사라졌다. 확실하다. 이 군의관 덕분이다.
티에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라키엘의 입꼬리는 귀에 걸렸다.
‘됐다! 이 스킬, 정말로 확실히 효과가 있어.’
사실 그는 부상병의 옆구리를 문지르며 다른 손으로 근처를 강하게 꼬집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세게 꼬집은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피멍이 들고 상처가 날 정도로 작정하고 꼬집었다.
그런데 부상병은 그걸 모르고 있었다. 그 뜻은 즉, 스킬의 효과가 보통을 넘어서 엄청나다는 뜻이다.
‘이만하면 검증이 됐어.’
확신이 들었다.
고개를 들었다.
“가르딘 경?”
“예, 전ㅎ, 아니, 도련님.”
“마취 됐다. 수술 시작하자. 일단은 제대로 봉합도 안 된 상처 부위 정리와 봉합부터.”
“아, 알겠습니다.”
가르딘 경이 허겁지겁 수술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라키엘의 쓰담쓰담과 구성진 노랫가락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부상병 티에리는 통증에서 벗어나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선 수술을 앞둔 불안감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캠프의 관리병들은…….
‘봤어?’
‘어. 봤지.’
‘저거, 맨손으로 아프던 사람을 안 아프게 만든 거, 맞지?’
‘맞는 거 같은데.’
‘그럼 저거…… 말로만 듣던…….’
‘기적이다. 기적을 행한 거야, 저 군의관이!’
오직 선택받은 극소수의 성자들만 행할 수 있다는 성스러운 기적. 라키엘이 그러한 기적을 행하였다는 오해(?)가 병사들 사이에 쫙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