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꿀벌 잡는 말벌 (1)
[심장 : 이제부터 우리는ㅋㅋㅋ 여왕 애벌레를 납치할 거닼ㅋㅋㅋㅋㅋ]
[허파 : 헠ㅋ 파핰ㅋㅋㅋㅋㅋ]
[대장 : 와 우리 몸뚱이 양심ㅋㅋㅋ]
[간장 : 이거 이거 이 인간 이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일부러 입 싹 닫고 있다가 이제 와서 알려주는 인성 보소ㅋㅋ]
[위장 : 아 미리 스포하면 탈주한다고ㅋ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의 인성을 비난하며 미운 놈한테 떡 주듯 HP를 던져줍니다.]
[오장육부가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5,500]
“…….”
저런 비난,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사실 일부러 지금까지 안 알려준 게 맞으니까. 미리 알려주면 죄다 동행을 거부하거나 캠프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할까 봐 불안했으니까.
‘뭐, 어쨌건 계획은 대성공.’
라키엘의 입가에 사악한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일행은 모조리 경악의 도가니에서 어푸어푸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무리도 아니지. 거대 꿀벌인 아피로스는 깊은 숲에 흔하게 서식하는 것과는 별개로 제법 강한 몬스터니까. 개체 하나하나는 별거 아니겠지만, 집단으로 모이면 어지간한 오우거도 찜쪄먹는 놈들이니까.’
문득, 마검황 속의 스토리가 떠올랐다. 소설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그때쯤 아피로스가 제대로 언급된 적이 있었다.
‘아피로스는 은근히 순한 생물이라고 했지. 성향 자체는 공격적이지 않아. 인간이나 침입자가 둥지 근처를 배회해도 먼저 공격하는 일도 드물고. 하지만 누가 둥지나 애벌레를 건드리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지.’
그 어떤 몬스터보다도 공격적으로 변하게 된다. 침입자를 죽을 때까지 추적한다. 지구가 끝장날 때까지 달려든다. 본인(?)들의 목숨도 도외시할 정도로 집요해진다.
‘특히나 여왕 애벌레를 건드리면? 그건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거고.’
그만큼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여왕 애벌레가 분비하는 물질이 엄청난 항생 성분을 갖추고 있으니까.’
소설 마검황에서 그랬다. 그 분비물 덕분에 다 죽어가던 데미안이 살아났다. 덤으로 엘프들이 여왕 애벌레의 분비물을 추출하는 장면도 자세하게 묘사가 되었다.
‘엘프 특유의 동물과의 교감 능력을 활용했지. 물론 내가 그걸 따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 나름의 방법으로 추출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여왕 애벌레를 손에 넣어야 한다. 그 분비물만 뽑아내면? 캠프의 수많은 부상병들을 감염에서 해방할 수 있을 것이다.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보너스 수명을 왕창 챙길 수 있을 것이다. 풍요롭고 야물딱진 황족 라이프를 탱자탱자 즐기는 삶을 누리게 되리라.
‘…….’
순간 설렜다.
하지만 라키엘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다짐하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경악의 풀장에서 첨벙거리고 있는 일행을 둘러보았다.
“다들 표정이 왜들 그래? 왜. 문제 있어?”
“물론 문제야 있습니다만-”
데미안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애벌레를, 그것도 여왕 애벌레를 납치하겠다는 말씀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는 알고 계신 겁니까?”
“응.”
“그럼, 그걸 행동으로 옮겼을 때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도 알고 계신 겁니까?”
“응.”
“그런데 그걸 하겠다고요?”
“응.”
“…….”
데미안의 표정이 굳었다.
“가끔 황당할 정도로 무모한 일을 벌이시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모시면서 겪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아닙니다. 선을 넘으셨습니다.”
“선을 넘었어? 내가?”
“예. 여왕 애벌레를 납치하는 역할을 누구에게 맡기겠다는 겁니까. 그 역할을 맡는 사람은 반드시 아피로스 둥지의 모든 벌들에게 집중 공격을 당할 겁니다.”
“응. 그렇겠지.”
“그리고 십중팔구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끔찍하게 당할 겁니다.”
“응. 그렇겠지.”
“설마 그 역할을 일행 중의 하나에게 시키겠다는 겁니까?”
“응. 그럴 거야.”
“제정신이십니까?”
“응.”
“……설마.”
“응?”
“그런 미친 짓을 직접 하시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에이. 당연히 아니지.”
라키엘은 방긋 웃었다. 데미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그럼 누구에게……?”
“너.”
“……예?”
“너라고.”
“잘 못 들었습니다?”
“시치미 떼는 컨셉 잡지 말고. 너라고요. 너.”
“…….”
데미안의 한쪽 눈썹이 씰룩.
라키엘도 한쪽 입술로 씰룩.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안 다쳐. 안 죽어. 안전하게 해낼 방법이 있으니까.”
“안전한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어. 요 녀석 덕분에.”
툭.
안주머니가 있는 가슴께를 툭 쳤다. 안쪽에서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꼬슴!”
그 대답을 들으며 말해주었다.
“내 계획을 말해주자면, 네가 아피로스 둥지에 접근해야 해. 그리고 검으로 가장 강력한 일격을 둥지 옆구리에 콱- 그럼 둥지의 벌 떼가 화를 내겠지?”
“아마 그렇겠지요.”
“그래. 그럼 넌 달려드는 벌 떼 앞에서 10초만 댄스 타임으로 춤 좀 춰주고.”
“그럼 더 화를 낼 텐데요.”
“응. 그러라고 그러는 거야.”
“…….”
“어쨌건, 둥지의 아피로스들을 최대한 화나게 만들어야 해. 너한테 모든 어그ㄹ…… 이목이 집중되도록. 오직 너만 공격하도록.”
“그럼 저는?”
“도망쳐야지. 최대한 멀리. 최대한 오래. 모든 벌 떼를 데리고. 꾸준하게.”
“……유인작전이로군요. 맞습니까?”
“어.”
“하지만 제가 끝까지 도망칠 수는 없을 듯합니다만.”
“그때 얘를 쓰면 돼.”
툭.
“꼬슴!”
재차 들려오는 꼬슴이의 대답.
“얘한테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여. 그럼 커질 거야.”
“커지면, 어떡하면 됩니까?”
“그 아래에 깔려.”
“예?”
“꼬슴이가 널 배 아래에 깔고서 웅크리며 가시를 세울 거야. 그러면 돼.”
“……설마.”
“감이 잡혔냐?”
“예. 아피로스는 크기가 1미터는 족히 되는 놈들이니까…… 꼬슴 경의 촘촘한 가시를 뚫지 못하겠지요.”
“바로 그거지. 선인장 작전.”
“…….”
“그렇게 네가 둥지의 모든 아피로스를 끌고 가서 버티는 사이에 우리가 둥지로 들어가서 여왕 애벌레를 슥삭.”
“…….”
“알겠지?”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부분이 있습니다.”
“뭔데.”
“여왕 애벌레를 성공적으로 납치한다 해도, 저와 꼬슴 경은 어떡합니까? 제가 알기로 아피로스는 침입자에게 집요하기로 유명한 몬스터인데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 아마 굶어 죽을 때까지 포위망을 풀지 않겠지. 둥지에 불이라도 나지 않는 한에는.”
“…….”
“또 감 잡았지?”
“전ㅎ…… 아니, 도련님. 당신은 정말 악랄한 인간입니다.”
“응. 악랄해서 미안해.”
“…….”
“불 살짝만 지를 거야. 둥지 겉면만 살포시 그슬릴 정도로. 그 정도만 해주면 널 포위하고 있던 벌 떼가 모조리 둥지로 돌아올 거고. 둥지에 붙은 불도 분비액으로 금방 꺼뜨릴 수 있겠지. 그러니까 놈들한테도 큰 피해는 없을 거고. 그 사이에 너랑 꼬슴이도 도망칠 수 있고.”
라키엘은 안면 가득 철판을 촥촥 깔며 말했다. 데미안의 입가에 한숨이 서렸다.
“후우. 그럼 어쨌건, 제가 미끼 역할을 맡게 될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응. 그래서 위험수당 신청하게?”
“예.”
“원하는 금액은?”
“주급의 30배가 적당할 듯합니다.”
“쯧. 욕심이 과한데.”
“싫으시면 제가 오늘부로 퇴직하면 되겠습니까?”
“협박이야?”
“진심입니다.”
“아주 부자 되시겠어?”
“가급적 그러고 싶습니다.”
“그럼 20배로 가자.”
“퇴직하겠습니다.”
“25배는 어때.”
“감사합니다.”
그렇게 데미안과도 극적으로 협상 타결!
일행은 다시금 꾸준히 전진했다. 물론 다들 불안감을 떨쳐내지는 못했다. 아무리 계획이 있다 한들, 아피로스는 여전히 위험한 몬스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안감보다 라키엘에 대한 믿음이 아주 조금 더 컸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정체는 마젠타노의 황태자니까. 일정 이상의 위험한 짓은 안 벌이겠지?’
……라고 왕녀가 붙여 준 기사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왕녀 아델린을 따라 황도 마젠타를 방문했던 수행원이기도 했다. 라키엘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럼 길잡이 병사는?
‘저 군의관, 기적을 행했다고 들었어. 그럼 우리가 다치거나 해도 그 기적으로 우릴 살려줄 수 있겠지?’
캠프에 쫙 깔린 소문을 떠올렸다. 뚱땡이 군의관이 성자의 기적을 행했다고 하였던가. 그러니 자신들이 위험해져도 무사할 거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모두의 오해(?) 속에 반나절이 더 지났다. 그동안 라키엘은 각자의 역할을 숙지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습니다. 저 앞, 개울 건너편 비탈 앞 공터에 둥지가 있는 걸 봤습니다.”
길잡이 병사가 아피로스의 둥지를 발견했다. 일행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렸다.
“좋아. 일단 확인부터.”
풀숲 속에 몸을 낮추었다.
천천히 전진했다.
얼마나 기다시피 움직였을까. 길잡이 병사의 말대로 둥지가 보였다.
‘어우야. 크기 보소.’
말이 벌집 둥지지, 엄청나게 컸다. 거의 어지간한 동네 작은 마트 정도?
최소한 그 정도 크기는 되어 보이는 돔 모양의 둥지가 지면 위에 견고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 주위로는 진돗개 덩치는 되어 보이는 벌들이 붕붕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말이 붕붕이지, 저거, 거의 오토바이 소리가 나네?’
마치 배달 오토바이 수십 대가 날아다니는 풍경 같았다. 라키엘은 일행을 돌아보았다.
“시작하자. 계획대로.”
“…….”
다들 말없이 끄덕.
그때부터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까지 오며 한 아름씩 따온 들꽃을 꺼냈다. 꽃이며 줄기며 구분 없이 온몸에 비볐다. 라키엘도 똑같이 했다. 탐사복이 금방 꽃잎과 줄기에서 나온 즙으로 범벅이 되었다.
‘이래야 아피로스들이 우리를 덜 적대할 테니까.’
마검황에서 나온 언급이었다.
이러면 온몸에 들꽃 냄새가 밴다고. 벌들이 적대감을 덜 느끼게 된다고. 그걸 떠올리며 더욱 열심히 비비고, 발랐다.
“다음. 횃불.”
“준비됐습니다.”
기사들이 횃대를 꺼냈다. 송진을 잔뜩 발랐다. 작은 불꽃만 튀기면 곧바로 불을 붙일 수 있게 준비를 갖추었다.
‘이만하면 됐어.’
라키엘은 심호흡을 하며 데미안을 돌아보았다.
“자신 있지?”
“없습니다.”
“그래도 해야지?”
“……후우. 꼬슴 경이나 건네주시죠.”
꼬슴이를 건네주었다.
데미안이 몸을 풀었다. 일행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둥지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날카로워진 눈길로 주위 아피로스 떼를 관찰했다.
놈들의 움직임을 익히고, 적절한 타이밍을 재면서, 서서히 접근했다. 가장 강력한 일격을 위해, 둥지에 최대한 강한 타격을 주기 위해 검을 움켜쥐었다.
한데 그때였다.
부브브브브우우웅-!
둥지 주위를 날아다니던 아피로스 떼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분주해졌다. 날갯짓이 훨씬 빨라졌다. 사나워졌다. 마치 적을 만난 듯한 반응. 혹은 침입자를 감지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
데미안은 움찔했다.
설마 벌써 이쪽의 의도를 간파한 걸까. 그래서 저러는 걸까. 그는 검을 움켜쥔 채로 라키엘을 돌아보았다. 눈빛으로 강하게 항의했다.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라키엘도 데미안을 째려보며 눈빛으로 대꾸했다.
‘네가 너무 일찍부터 티 낸 거 아니냐?’
‘설마요. 기척을 최대한 죽였습니다.’
‘어설프게 죽인 거 같은데?’
‘어쨌건, 그럼 이제 어떡할까요.’
‘어떡하긴. 기왕 이렇게 된 거 당장 한 대 치고 도망쳐.’
‘……알겠습니다.’
쯧.
데미안은 혀를 찼다. 그리고 다시금 검을 움켜쥐었다. 질질 시간을 끌 때가 아닌 듯했다.
‘그러니까 그동안 연마했던 가장 강력한 일격을.’
꽈드득!
그의 손등에, 팔뚝에, 어깨와 상반신 전체에 힘줄이 돋아났다. 심장에 깃든 마나하트가 사납게 포효했다.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기 직전이었다.
콰아아아아아-!
하늘에서 갑작스러운 굉음이 울렸다. 거대한 실루엣이 내리꽂히듯 떨어졌다. 불운한 아피로스 한 마리를 순식간에 덮쳤다. 무지막지한 위턱으로 물었다. 찢었다. 아니, 잘랐다. 단숨에. 반응할 틈도 없이.
그리고 포효했다.
키이이이아악-!
“……!”
코뿔소만큼이나 거대한 말벌이었다. 그런데 한 놈이 아니었다. 첫 습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게 무슨…….’
데미안이 두 눈을 부릅뜨는 사이. 거대한 말벌 수십 마리가 아피로스 둥지를 향해 쏟아져 내려왔다.
자비 없는 사냥.
학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