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11화 (111/468)

111화. 말벌 잡는 인간 (2)

‘이거, 생존이 문제가 아닌데? 잘하면 오늘…….’

저 베스파로스 여왕으로 말벌주를 담글 수도 있겠다.

허풍이 아니다.

진짜다.

라키엘은 묘한 일말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해보자.’

판단이 드는 순간. 그는 베스파로스 여왕을 똑바로 주시했다.

딩동!

[경혈 스캐닝 옵션이 Lock-on 대상을 포착하였습니다.]

[대상이 성공적으로 Lock-on 되었습니다.]

키이이잉!

시야가 변했다.

불길에 타오르던 숲이 순식간에 살짝 어두워졌다. 대신 포효하는 베스파로스 여왕의 몸체에만 밝은 형광색의 외곽선이 덧씌워졌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보였다. 날개를 접는 베스파로스 여왕의 몸체. 그 내부에 흐르는 기혈의 움직임. 모든 것들이 낱낱이 보였다.

베스파로스의 신체를 따라 어떤 식으로 경혈이 배치되어 있는지. 주요 대맥의 흐름 방향이 어떠한지. 그 흐름들이 어떤 방식으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신체의 순환과 균형을 만드는지까지.

‘보인다. 전부 보여.’

확실하게.

일목요연하게.

마치 네x버 길찾기 내비게이션을 띄운 것처럼. 어떤 도로가 막히는지 일목요연하게 관측하는 것처럼. 혹은 모의고사 점수를 통해 어떤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지 미리 각을 재보는 것처럼.

베스파로스 여왕의 움직임과 기혈이 모조리 보였다.

‘……대박.’

사실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기혈을 지닌 것이 당연한 이야기였다. 모든 생명에는 기가 순환하니까. 그래야 살아 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곤충이나 벌레에게도 사람과 비슷한 기혈이 있을 거란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어쨌건 있어. 그러니까, 할 수 있다.’

라키엘은 팔뚝에 힘을 주었다. 데미안에게 업힌 자세를 더욱 안정적으로 유지하려 애쓰며 외쳤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움찔!

이쪽을 업고 있는 데미안의 어깨와 등이 크게 흠칫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베스파로스 여왕의 위용에 녀석도 긴장하고 있었던 걸까. 돌아오는 대답을 들어보니 과연 그랬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녀석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굳어 있었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코끼리 사이즈의 장수말벌 여왕이 눈앞에 나타나서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서 포효하는 중이었다. 특유의 압도적인 위압감을 한껏 드러내는 중이었다.

전에 크레모 항구에서 맞섰던 우루스? 당시의 우루스보다 훨씬 흉포한 기세였다.

‘아마도 여왕이라서 그런 거겠지.’

선천적으로 평생 다른 개체를 압도해온 지배자 특유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똑바로 쳐다보고 있자니 저절로 오금이 꽉 저려 올 정도였다. 아니, 이미 앙부아즈의 기사들을 비롯한 일행 모두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마치, 독사와 마주쳐 버린 생쥐 같았다.

라키엘은 후들거리려는 다리에 힘을 꽉 주며 재빨리 말했다.

“이제부터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 걸으라면 걷고. 뛰라면 뛰고. 검으로 막아내는 지점, 공격하는 방향, 그 모든 걸 전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살고 싶으면 내 말을 들어. 내가 저놈의 움직임을 예측해서 알려줄 테니까.”

“알려주겠다고요? 저놈의 움직임을?”

“그래.”

“하지만 그걸 어떻게…….”

데미안은 곤혹스럽게 미간을 찡그렸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검술에 조예도 없는 황태자가 무슨 수로 저 거대한 말벌 여왕의 움직임을 예측한단 말인가.

그렇게 반문하려던 순간.

“주저앉아!”

등에 업힌 황태자가 외쳤다.

그와 동시에.

쿠와아아악-!

베스파로스 여왕이 포효했다.

놈의 거대한 날개가 한 차례 크게 떨쳐졌다. 공기가 부서졌다. 밀려났다. 막강한 반탄력이 생성되었다. 코끼리 사이즈의 거대한 몸체가 앞으로 밀려 나갔다. 아니, 튀어 나갔다.

콰학-!

아무런 예비 동작도 없는 돌진!

“……!”

데미안의 눈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눈매가 벌어지는 그 사이에 이미 베스파로스 여왕의 위턱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쇄도해 왔다. 반응하기도 어려운 속도였다.

만약, 앞서 들은 황태자의 외침이 없었다면, 정말로 반응하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크읏!”

데미안은 본능적으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직후, 머리 위에서 섬뜩한 굉음이 터졌다.

처컹-!

집게, 혹은 단두대 같은 위턱이 머리 바로 반 뼘 위에서 맞물렸다. 불똥이 튀었다. 방금 조금만 반응이 늦었더라면? 몸통이나 목이 잘렸을 것이다. 깔끔하게.

그러나 돋아나는 소름을 느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주저앉은 그대로 앞으로 다섯 걸음!”

“……!”

황태자가 외쳤다.

고개를 들었다.

베스파로스 여왕의 머리 아래쪽.

지면과 머리 사이에 공간이 보였다.

즉시 움직였다.

파사사삭!

앉은 채로 다섯 걸음을 신속히 전진했다. 그 직후, 베스파로스 여왕의 허공을 갈랐던 위턱이 아래로 내리꽂혔다. 콰작! 지면이 푹 파였다.

만일 방금 앞이 아니라 옆이나 뒤로 움직였다면? 황태자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운 좋게 저 내리찍기를 피했더라도…… 다음 동작에서 회피할 방향이 모두 막혔겠지.’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그때 황태자의 외침이 또 들려왔다.

“우전방! 2시 방향으로 굴러! 놈의 왼쪽 앞다리와 중간다리 사이 공간으로!”

“……!”

즉시 굴렀다. 동시에 베스파로스 여왕의 다리가 움직였다. 놈의 몸 전체가 시계 방향으로 살짝 회전했다.

쿠작작! 쿠작!

통나무 굵기의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지면을 짓뭉갰다. 그 틈을 아슬아슬하게 굴러서 통과했다.

“앞으로 도약!”

황태자의 외침이 귀를 찔러 왔다. 듣자마자 땅을 박찼다.

콰드작!

몸을 띄운 직후.

방금 박찬 자리에 베스파로스 여왕의 다리가 꽂혔다. 그 순간 황태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시계 방향으로 몸 틀면서 정중단 횡베기!”

“……흡!”

데미안의 허리와 코어에 힘이 들어갔다. 공중에서 몸을 뒤틀었다. 오른손의 검을 옆으로 눕혔다. 흩뿌리듯 가로로 크게 베었다.

‘허공을 베라는 걸까.’

견제를 위한 베기?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했다.

황태자의 말이 계속 들어맞고 있으니까. 허공을 베었다. 아니, 휘두르고 보니 허공이 아니었다. 베스파로스 여왕의 더듬이 한쪽이 살벌한 기세로 쏘아져 오고 있었다.

“……!”

말이 더듬이지, 곤봉보다 두꺼웠다. 끝머리는 모닝스타 그 자체였다. 맞부딪치는 충격 또한 그러했다.

콰앙-!

“……큽!”

어깨 관절이 빠질 뻔했다. 가까스로 검이 부러지지 않았다. 대신 전신이 허공에서 확 밀려났다.

“안정적으로 착지!”

콰츠즈즈즉!

무려 10미터 넘게 날려와 지면에 두 줄기 고랑을 기다랗게 만들었다. 등에 업힌 황태자가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잘했어. 예술점수 10점!”

“…….”

“계속 이렇게만 하자, 응?”

“…….”

“왜? 어디 다쳤어?”

“아닙니다. 그런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데미안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재빠르게 물었다.

“설마 진짜로 저놈의 움직임이 보이는 겁니까.”

“어. 내가 말했잖아. 보인다고.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대체 어떻게…….”

“아 그냥 보이는데 뭘 어쩌라고! 앞으로 달려! 다섯 걸음!”

“……!”

뒤가 아니고 앞으로?

순간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파앗!

땅을 박차는 순간.

베스파로스 여왕도 돌진했다. 거대한 몸체가 순식간에 쇄도해 왔다.

“검 세우고! 왼쪽 위턱 쳐내면서! 동시에 왼발 축으로 시계 방향 턴!”

카캉! 츠즛!

쳐냈다. 몸을 돌렸다. 여왕의 위턱이 아슬아슬하게 뒤쪽을 스쳐 갔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이 숨 가쁘게 외쳤다.

“제자리 뛰며 내리치기! 반동으로 썸머솔트! 착지하며 오른쪽으로 굴러! 일어나면서 메롱! 한 템포 죽이며 비스듬히 위로 찌르기!”

콰작!

데미안의 검 끝이 여왕의 오른쪽 뒷다리 두 번째 관절을 찔렀다. 여왕이 처음으로 움찔했다. 놀라움이 분노의 포효로 변했다.

퀴아아아악-!

하지만 라키엘의 입은 절대로 멈추지 않았다. 데미안의 동작도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그것은 일종의 목숨을 건 청기 백기 게임이었다.

“검 뽑으며 뒤로 벌러덩! 왼쪽으로 두 바퀴 데굴데굴 굴러! 구른 뒤에…… 그위의이잉입! 오른쪽으로 두 걸음 도약! 위쪽 쳐내고! 긔위의이잉입은 따라 하지 마, 멍충아!”

“긔위이잉…… 크긋!”

“집중해! 왼쪽 두 걸음! 전방으로 세 걸음 문설트 도약! 수직 회전베기! 등 위로 착지하며 왼쪽 뒷날개 뿌리 쪽 내리찍기!”

콰적!

이번에는 데미안의 검이 여왕의 등에 꽂혔다. 물론 깊지는 못했다. 단숨에 관통하기엔 베스파로스 여왕의 키틴질 외골격이 너무나 튼튼하고 두꺼웠다.

하지만 라키엘은 상관하지 않았다.

“검 뽑고! 제자리 탭댄스 두 걸음!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날개 밟아! 도약! 날려 간다! 균형 잡고!”

파앗!

성가신 이쪽을 떨쳐내듯 날아오는 여왕의 날개. 그 날개를 오히려 밟았다. 반동으로 몸을 띄웠다.

“뒤쪽! 나무 위에 착지!”

타앗…….

마침 날려가는 방향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굵은 가지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데미안은 흐르는 땀방울을 훔쳐내며 콧등을 찡그렸다.

“이거, 정말로 저놈의 움직임이 보이시는 거로군요.”

겪어 보니 확실하다. 황태자의 연이은 지시가 모조리 맞았다.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한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수많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좋습니다. 그렇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곤란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곤란? 무슨 곤란?”

“제 검이 놈의 껍질을 뚫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데미안이 재빠르게 말했다.

“보셨을 겁니다. 전하의 지시에 따라 공격이 두어 차례 성공했을 때 말입니다. 놈의 다리 관절과 등을 찔렀습니다. 하지만 놈에겐…….”

“아무런 타격이 없는 것 같다?”

“예.”

사실이었다.

찌르며 느낄 수 있었다. 검이 껍질을 완전히 뚫지 못했다. 그저 끄트머리 뾰족한 몇 센티만 간신히 부드러운 속살을 찔렀을 뿐이었다.

“인간이 상대라면 그 정도라도 조금씩 타격을 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저놈의 덩치는 거대합니다. 고작 몇 센티 깊이의 상처라면 수백 군데를 찔러도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없을 겁니다.”

그 또한 사실이었다. 막막했다. 한데 황태자의 생각은 조금 다른 걸까.

“제대로 된 타격? 이미 들어가고 있어.”

“예?”

“그러니까 지금까지처럼 시키는 대로만 잘해 보자고. 온다.”

“……!”

“나무 꼭대기로! 뛰어!”

“흡!”

파앗!

나뭇가지를 박찼다.

그 직후, 베스파로스 여왕이 날아왔다. 몸통으로 나무줄기를 으깨 버렸다. 나무가 쓰러졌다. 잔해가 여왕의 등 위로 어지러이 떨어졌다.

“잔해에 섞여서 엉덩이 위로 착지! 세 번째 가로무늬 중앙에 내리찍기!”

콰작!

또 몇 센티.

검 끝이 여왕의 배 부분 위쪽을 찍었다.

“뽑으면서 왼쪽으로 넘어져! 옆구리로 착지!”

“크억!”

“일어나며 위로 찌르기! 다섯 번째 가로무늬 중앙!”

콰즉!

“오른쪽으로 굴러! 그읩! 일어나면서 등 돌리고 저쪽으로 전력 도주! 도망쳐!”

“훅! 후욱!”

“몸 돌려!”

“후욱!”

“가만히 서 있어!”

“……예?”

“서 있으라고!”

황태자가 빼액 외쳤다. 그 말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분노한 베스파로스 여왕이 사방을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이쪽과 눈이 마주쳤다.

“……!”

하지만 놈은 곧바로 돌격해오지 않았다. 마치 이쪽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매번 공격을 해도 다 피하는 놈. 까다로운 사냥감. 그렇게 인식한 걸까.

과연 그런 듯했다.

하지만 여왕의 신중한 경계심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라키엘 때문이었다.

“매혹적인 양갈래 머리!”

“……!”

라키엘의 손이 움직였다.

데미안에게 업힌 채로, 데미안의 머리칼을 붙잡았다. 두 손으로 양갈래 머리를 만들었다. 요란하게 펄럭펄럭 흔들어댔다. 덕분에 베스파로스 여왕의 본능(?)도 흔들렸다.

……퀴쉬이익!

먼 조상 시절부터 벌집을 털어댄 최대의 숙적, 곰에 대항하기 위해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 모든 벌이 지닌, 검정색 털에 대한 선천적인 적대감과 호전성. 그 본능이 베스파로스 여왕의 분노를 일깨웠다.

퀴아아아악!

여왕이 신중함을 버리고 돌진했다. 라키엘이 외쳤다.

“양갈래 머리 흩날리며 도망치기!”

“…….”

“뛰어!”

“크읏!”

데미안은 뛰었다. 돌진해 오는 여왕을 피해 쫓기듯 뛰었다. 여왕의 분노한 날갯짓 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져 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데미안의 양갈래 머리를 풀지 않았다. 더욱 맹렬히 흔들었다. 여왕의 돌진도 한층 맹렬해졌다. 혹은 맹목적으로 변했다. 이쪽을 향해 도약했다.

퀴아악-!

땅을 박차며.

날개를 한껏 펼치며.

온몸으로 라키엘과 데미안을 덮쳤다. 거대한 위턱으로 두 인간을 겨누었다.

한데 그때였다.

“검 던져!”

라키엘이 외쳤다.

“왼쪽 겹눈 아래 반 뼘 지점!”

외침과 함께 데미안이 몸을 휙 돌렸다. 그가 던진 검이 허공을 갈랐다. 검 끝이 여왕의 왼쪽 겹눈 아래를 찔렀다.

콰즛!

물론 깊게 찌르진 못했다. 두꺼운 껍질에 겨우 박혔다. 속살을 고작 3센티쯤 찔렀다. 별다른 타격조차 주지 못했다.

여왕은 가소로운 듯 포효했다. 아니, 포효하려 했다. 그런데 어쩐지 포효가 나오질 않았다. 심지어 갑작스럽게 온몸에서 힘이 쭈욱 빠지기 시작했다!

……키익?

여왕의 벌어진 위턱이 당혹감에 떨리는 순간. 라키엘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맺혔다.

‘빙고.’

그것은, 처음 찔러 보는 경혈의 조합 효과에 실험적 확신을 얻은 한의사의 미소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