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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112화 (112/468)

112화. 뜻밖의 횡재 (1)

……퀴어어어억?

베스파로스 여왕의 겹눈이 경련했다. 더듬이가 서슴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았는데도 다리가 움찔댔다. 뱃속에 숨겨둔 독침마저도 흔들렸다.

도대체 왜 이런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쿼어억? 퀴이이익!

별다른 타격을 받은 적도 없었다. 검을 든 인간에게 따끔하게 네댓 번 찔렸을 뿐이다. 그저 작은 생채기. 신경 쓸 필요도 없을 미미한 타격.

그런데 세상이 흔들려 보였다. 모든 감각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위와 아래가 뒤섞이고, 앞과 뒤가 뒤바뀐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어지러웠다. 동시에 전신에서 힘이 쭈욱 빠져나갔다.

퀴이아악!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다.

군체를 모조리 끌고 온 사냥이었다. 이번 사냥을 성공해야 그 양분으로 건강한 알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세대의 애벌레를 배부르게 먹이고 성공적으로 키워낼 수 있을 터다. 그러니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베스파로스 여왕은 전신을 경련하며 흐려진 눈길을 들어 인간들을 노려보았다. 그곳에 회심의 미소를 짓는 라키엘이 있었다.

‘빙고!’

라키엘은 환호하며 외쳤다. 성공이었다. 그것도 기대 이상의 대성공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흉포하게 날뛰었던 베스파로스 여왕이, 이제는 마치 에프킬라를 정통으로 맞은 모기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게 정말로 될까 싶었는데…….’

경혈 스캐닝으로 또렷하게 보이던 베스파로스 여왕의 기혈 움직임. 경혈의 배치와 흐름. 덕분에 여왕의 의도와 움직임을 모조리 예상할 수 있었다. 데미안에게 외치며 적절한 동작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피하기만 하다간 승산이 없으리라 보았다. 그래서였다. 데미안에게 반격을 시켰다.

최소한의 힘으로.

낭비 없는 동작으로.

위험을 최대한 줄였다. 여왕의 경혈만 골라서 찌르게 했다. 물론 아무 경혈이나 되는대로 찌른 게 아니었다.

‘여왕의 다리 관절, 그리고 가슴의 등과 배의 아래쪽, 마지막으로 겹눈 아래 지점…….’

사람으로 치면 독맥과 임맥의 주요 경혈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호흡의 기운이 나가고 들어오는 곳. 기운이 뻗치고 수렴되는 곳. 시작과 끝. 끝과 시작. 그 과정이 맞물리며 순환하고 교류하는 자리들. 그곳들만 골라서 쏙쏙 찌르게 했다.

사람으로 치자면?

정수리의 독맥 백회혈(百會穴). 그리고 항문과 성기 사이의 임맥 회음혈(會陰穴). 두 곳을 파괴(!)당한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물론 이 방법에 확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곤충, 그것도 저렇게 거대한 곤충의 혈자리를 다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경혈 스캐닝으로 잠깐 파악한 것만으로는 효과를 100% 확신할 수가 없었다. 사람의 경우와 전혀 다른 효과가 나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했다.

그것만이 최선이었으니까. 가장 가능성이 큰 방법이었으니까. 시도할 가치가 보였고, 질렀고, 생각보다 훨씬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바로, 지금처럼.

“……저거 어떻게 된 겁니까?”

데미안의 얼떨떨한 물음이 들려왔다. 상념에서 깨어난 라키엘은 빙긋 웃으며 데미안의 등에서 내려왔다.

“글쎄. 약점을 정확히 공략한 덕분인 것 같은데.”

“약점 말입니까?”

“어.”

“설마.”

“눈치챘냐?”

“예.”

데미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찌르라고 지시한 자리, 모두 미리 간파한 약점들이었군요. 맞습니까?”

“물론.”

“한데 그 약점들을 대체 어떻게…….”

“파악했느냐고?”

“예.”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도 처음 보는 베스파로스였을 텐데. 그 약점을 간파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황태자의 대답은 뻔뻔 그 자체였다.

“난 그냥 보이던데? 넌 안 보였냐?”

“……예?”

“아니. 보면 보이잖아. 아, 쟤는 저길 때리면 아파하겠구나. 저길 찌르면 죽겠구나. 뭐 그런 거. 그게 안 보여?”

“…….”

“참 이상하네. 이해가 안 되네.”

“…….”

“노력 좀 하자. 노력 좀. 응?”

“…….”

이해가 안 되는 건 오히려 이쪽이다. 뭐가 보인다는 건지. 뭐가 저리 당연하다는 건지.

하지만 데미안은 마냥 의문에만 빠져 있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황태자 앞을 막아섰다.

“어쨌건, 물러나시죠. 아직은 위험합니다.”

약점을 공략당했건.

큰 타격을 입었건.

어쨌건 간에 베스파로스 여왕이 아직 살아 있었다. 전신을 부들거리고 있을지언정 언제 어떻게 돌변해서 달려들지 알 수 없었다.

데미안은 전신을 다시금 팽팽하게 조였다. 검을 겨누고서 베스파로스 여왕의 동태를 살폈다. 한데 뒤쪽의 황태자는 생각이 조금 다른 듯했다.

“아니. 이제 위험해진 건 저놈인 것 같은데.”

“쉽게 마음을 놓으셔선 안 됩니다.”

“정말인데.”

“하지만 우리에겐 저놈의 튼튼한 껍질을 쉽게 깰 수단이 없습니다. 다른 기사들에겐 무리입니다. 제가 전력을 다해도…… 같은 자리를 몇 번씩 베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있을 테고 말입니다.”

“아하. 그래서 다른 약점도 빨리 알려달라는 거지?”

“예. 가급적 신속하고 안전하게 끝내겠습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위를 봐.”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물음을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부브브브브우웅-!

돌연, 숲 상공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엄청난 숫자의 날갯짓 소리였다.

“……!”

설마 살아남은 나머지 베스파로스 무리가? 자신들의 여왕을 구하려고? 데미안은 경악과 위기감을 느끼며 검을 움켜쥐었다. 위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부브브브브!

수십 마리의 아피로스 떼가 날아오고 있었다. 숲의 불길과 매캐한 연기를 뚫고서. 이곳을 향하여 내리꽂히듯 급강하를 감행하고 있었다.

이쪽을 목표로 삼아서?

아니었다.

‘베스파로스 여왕.’

데미안이 직감한 순간.

수십 마리의 아피로스 떼가 베스파로스 여왕을 덮쳤다. 까맣게 뒤덮었다.

퀴아아아아악-!

여왕이 사나운 포효를 내질렀다.

하지만 여왕보다 한참 작은 아피로스 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욱 집요하게 여왕의 전신에 달라붙었다. 다만 여왕을 물어뜯거나 독침으로 찌르진 않았다. 대신 엄청난 기세로 날개를 진동시켰다.

부브브브브브브브!

“……!”

순간, 일대의 공기가 모조리 공명하고 진동했다. 지면마저 국지적 지진을 만난 듯 떨었다. 고막이 파괴될 것 같은 공명음, 상식을 초월하는 주파수의 날갯짓이었다.

날갯짓을 일으키는 아피로스의 근육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체온이 급상승했다. 그 상태로 베스파로스 여왕에게 더욱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한 놈이 달라붙고. 두 놈이 그 위를 뒤덮고. 다섯 놈이 다시 그 위를 덮었다. 둥글게. 공처럼. 빠져나갈 틈조차 없이. 공기가 통하지 않게. 치솟는 체온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몇 겹으로 둘러싸고서. 더욱 필사적으로.

브브브브브브-!

체온의 열기가 끔찍한 지옥의 업화로 변했다. 가장 안쪽, 여왕에게 직접 달라붙어 있는 아피로스의 전신이 열기에 익어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날개 진동을 멈추지 않았다.

기진맥진하던 베스파로스 여왕이 발악했다. 하지만 아피로스 떼를 떨쳐내지 못했다. 라키엘에게 맞은 침술 때문이었다.

일시적으로 전신의 힘이 빠져 있어서. 모든 감각이 모조리 둔해져 있어서. 마취에서 덜 풀린 것처럼 힘을 쓰질 못했다. 하여 평소라면 가볍게 털어냈을 아피로스 떼 속에 갇혀 속수무책으로 버둥거리기만 했다.

……!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단말마마저 아피로스 떼의 초진동에 묻혔다.

여왕의 날개와 더듬이가 녹았다. 껍질이 까맣게 탔다. 더듬이가 끊어졌다. 겹눈이 뭉개졌다. 이윽고 속살과 근육, 내장 조직이 통째로 익어 버렸다. 깊은 숲을 호령하던 베스파로스 군체의 심장이자 우두머리, 여왕의 허망한 최후였다.

그러나 여왕을 끝장낸 아피로스 떼도 무사하진 못했다.

브즈…… 브즈즈…….

여왕의 전신을 익혔을 정도로 엄청난 열기였다. 안쪽의 아피로스 떼는 여왕과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바깥쪽의 아피로스 떼도 탈진해서 차례차례 죽어갔다.

그렇게 모든 벌떼가 사라졌다.

날뛰던 베스파로스도.

저항하던 아피로스도.

타오르는 숲 곳곳에 벌떼의 시체만이 가득했다. 그 위로 하늘의 눈물이 쏟아졌다.

쏴아아아……!

소나기가 불길을 짓눌렀다. 번지던 산불이 주춤했다. 이내 사그라들었다. 불에 탄 잔해와 새하얀 연기만이 자욱한 숲에 적막이 깔렸다. 그 사이에서 앙부아즈의 기사들과 길잡이 병사가 환호했다.

살았노라고. 다행이라고. 서로를 얼싸안고서 안도의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라키엘은?

‘……후우. 살긴 살았는데, 망했구나.’

회한의 탄식을 푹푹 내뿜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왕 베스파로스? 잡으면 뭐하냐. 얻으려고 했던 아피로스 여왕 애벌레는 구하지도 못하게 됐는데.’

침울해진 눈길을 들었다.

그의 눈길이 향한 곳, 그곳에 반쯤 뭉개진 아피로스 둥지가 있었다. 베스파로스의 습격과 학살, 그리고 숲의 화재 때문에 곳곳이 무너지고 열기에 뭉개진 채였다.

둥지 안쪽에선 어떠한 기척이나 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몰살당한 것이리라. 서글픈 확신이 라키엘의 한숨을 더욱 깊어지게 했다.

‘쯧. 망했네. 망했어.’

원래는 야물딱지게 아피로스 여왕 애벌레를 납치하려고 했는데. 여왕 애벌레가 분비한다는 항생물질을 얻어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려고 했는데.

‘그래야 여기서 보너스 수명 왕창 얻을 수 있는 건데.’

그 계획이 때아닌 베스파로스의 습격 때문에 틀어져 버렸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아피로스 둥지를 찾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러려면 다른 숲으로 이동해야 하고, 새 둥지를 찾아야 하고, 며칠은 족히 걸리겠지. 그 사이에 부상병들은 죄다 죽어나갈 거고.’

그러니 이번 계획은 쫄딱 망했다. 각을 잴수록 더욱 서글퍼졌다.

“후우. 데미안?”

“예.”

“둥지에 남은 거라도 챙기자.”

“남은 거라고 하심은?”

“꿀은 있을 거 아니냐.”

아피로스가 거대한 꿀벌이니까. 최소한 둥지에 꿀은 남아 있으리라. 그거나마 챙겨서 부상병들에게 먹이면 원기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키엘은 그런 생각으로 데미안과 함께 둥지에 들어갔다.

둥지 안쪽은 어두웠다. 그나마 커다랗게 뚫린 통로 덕분에 움직이긴 쉬웠다.

‘역시, 다 죽어 있네.’

곳곳에 몸통과 머리가 잘린 아피로스 시체가 보였다. 아주 가끔씩은 산 채로 찜이 되어서 죽은 베스파로스도 보였다. 물론 그 주위엔 열기를 만드느라 죽은 아피로스 수십 마리도 함께였다.

‘그래서 꿀. 꿀은 어딨냐.’

라키엘은 둥지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꼬불꼬불한 통로를 따라, 동네 마트에서 특정한 물건을 찾기 위해 이 통로 저 통로를 서성거리듯. 점점 안쪽으로 들어가며 탐색의 범위를 넓혔다.

그렇게 얼마나 어두운 통로를 헤맸을까.

키륵…… 키륵…….

안쪽에서 웬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가 벽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살아남은 놈이 있나?’

아피로스?

혹은 베스파로스?

“전하. 제가 먼저.”

앞장서는 데미안과 함께 전진했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갔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다.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건 바로…….

“아피로스 여왕?”

여왕벌이 웅크리고 있었다. 다만 이미 죽은 채였다. 한데 그때였다.

키륵……! 키륵!

죽은 여왕벌의 몸체가 들썩였다. 품속에서 예의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뭔가가 불쑥, 여왕의 몸통을 간신히 밀어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라키엘은 깜짝 놀랐다.

“어?”

낯선 생명체였다.

동글동글한 얼굴과 통통한 몸매. 똘망똘망한 눈동자와 해맑은 입매. 전신을 뽀송뽀송하게 뒤덮은 하얀 솜털. 마치 새끼 물개처럼 보이는 그 생명체는 바로…….

“……아피로스, 여왕 애벌레?”

라키엘이 설마 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애벌레가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꾸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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