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13화 (113/468)

113화. 뜻밖의 횡재 (2)

“꾸꺄!”

“…….”

“꾸꺄아?”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뽀송뽀송한 생명체를 쳐다보았다.

‘……바나나킥 닮았네.’

혹은 솜털 보송보송한 아기 물개 같았다. 이쪽을 올려다보는 해맑은 까만 눈망울이 특히 그러했다.

“꾸꺄! 꾸꾸꺄!”

꼬물꼬물!

눈이 마주치자마자 반가운 듯 빵긋 웃었다. 그러더니 겁도 먹지 않고서 열심히 기어오기 시작했다. 라키엘은 긴장하며 물러났다.

‘속임수일지도 몰라.’

저러다가 거리가 가까워지면? 갑자기 돌변해서 콱 깨물지도 모른다. 데미안도 비슷하게 느낀 듯했다.

“때려서 기절시킬까요?”

녀석이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였다.

“……꾸까아?”

열심히 기어오던 여왕 애벌레가 동작을 딱 멈추었다. 이쪽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그 눈망울이 어느새 그렁그렁해져 있었다. 마치, ‘나 때릴 거야?’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뭐지. 설마 이쪽 말을 알아듣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꾸꺄아……?”

녀석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웃. 눈망울을 더욱 그렁그렁하게. 몸을 돌리고 옆구리를 보였다. 그러더니 이쪽을 향해 떼구르르 굴러 왔다!

“……어엇?”

방심하고 있던 터였다. 라키엘은 녀석의 갑작스러운 고속(?) 이동에 미처 대처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굴러 온 녀석이 제 뱃살로 이쪽의 발등을 폭, 덮었다. 그러고서야 구르기를 멈추었다.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꾸꺄!”

“…….”

여전히 해맑은 눈망울이었다. 깨물리진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던 걸까. 라키엘은 내심 안도하며 애벌레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있잖아?”

“꾸?”

“너, 내 말을 알아들어?”

“꺄!”

끄덕끄덕!

애벌레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진짜인 걸까. 라키엘은 시험을 해보았다.

“오른쪽.”

“꾸!”

“왼쪽.”

“꺄!”

“…….”

진짜다.

라키엘은 놀라움에 잠긴 눈으로 애벌레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 오른쪽 왼쪽을 말할 때마다 정확한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자니 문득, 소설 마검황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피로스 여왕이나 여왕 애벌레는 엘프들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식의 언급이 있었지. 지능이 높은 건가? 아니면 특별한 교감 능력이 있는 건지도.’

라키엘은 생각에 잠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래는 여왕이 머물렀을 아늑하고 넓은 공간. 지금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쓰러진 여왕의 시체는 더욱 엉망이었다.

그때였다.

“꾸꺄아?”

이쪽의 발등을 뱃살로 덮은 애벌레가 정강이에 머리를 부벼 왔다. 동시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녀석의 말을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머릿속에 실시간 번역기가 켜진 듯한 느낌. 환상종과 대화할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선척전인 교감 능력인 건가.’

그렇게 추측하는 사이, 애벌레 녀석의 칭얼거림이 이어졌다.

“꾸우? 꺄아?”

“……어, 음, 그러니까, 엄마가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꾸! 꾸꺄!”

“뭐? 쟤랑 싸우고 나선 계속 코오 잔다고?”

“꾸!”

“…….”

고갯짓으로 한쪽을 가리키는 애벌레. 녀석이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그제야 구석 그늘진 어둠 속에 쓰러져 있는 거대한 형체가 보였다. 베스파로스 병정벌이었다.

‘헐.’

병정벌도 죽어 있었다. 놈의 전신에도 상처가 가득했다. 상처의 깊이나 크기가 아피로스 여왕벌의 위턱 크기와 거의 딱 들어맞았다. 머리 정중앙에는 지름 5센티쯤 되는 구멍도 뚫려 있었다. 아마도 여왕벌의 독침이 관통한 자리일 테지.

“…….”

살펴보니 대략적인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아피로스 여왕벌이 단독으로 이놈에게 맞서 싸운 거다. 전신을 난자당하면서도 끝까지 싸웠고, 거의 동시에 서로 죽게 된 거다. 여왕의 그런 필사적인 저항 덕분에 애벌레가 살아남은 거겠지.

애벌레는 그런 것도 모르고 여전히 해맑은 눈망울만 똘망똘망하게 뜨고 있었다.

“꾸우? 꾸꺄!”

“……어, 응. 그러니까 엄마가 얼른 일어나면 좋겠단 거지?”

“꾸꾸! 꺄!”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서 걱정된다고?”

“꾸꺄!”

“…….”

“꾸꺄꺄?”

여전히 해맑기만 한 눈빛. 라키엘은 잠시 고민했다. 고민의 끄트머리에서 애써 웃음을 머금었다.

“어, 으음, 엄마 일어날 거야. 나중에. 조금 더 있다가.”

“꺄?”

“음, 그러니까 엄청 나중에. 네 엄마가 저 덩치 큰 나쁜 놈이랑 싸우고 나서 많이 피곤해진 거거든. 그래서 좀 많이 자야 한대.”

“꺄꾸?”

“응, 진짜야. 진짜.”

“꾸꺄!”

“…….”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엄마가 그냥 자는 거라는 말에 기뻐하는 여왕 애벌레의 순진무구한 눈빛. 그 눈망울을 바라보고 있자니 ‘네 엄마가 죽었다’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가 않았다.

‘후우.’

과연 이런 거짓말이 옳은 걸까. 순간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아피로스 무리가 전멸했으니까. 이 녀석, 여기 남겨지면 백 퍼센트 죽겠지. 게다가 사실은 처음부터 이 녀석을 납치하려고 여기 왔던 거니까.’

어쨌건 목표는 달성이다.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아피로스 둥지가 천적에게 습격당하는 사고가 발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애벌레나마 살아남아서 정말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까 도망치지 않길 잘했어.’

베스파로스 여왕을 처치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이 애벌레마저도 베스파로스 무리에게 잡혀 고깃덩이 신세가 되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넌 나한테 감사해야 해.”

“꾸꺄아?”

“생명의 은인이라고, 들어봤어?

“꾸우?”

“못 들어봤으면 됐고. 어쨌건 너, 나랑 놀러 갈래?”

“꺄아?”

“네 엄마가 푹 자고 있으니까. 우리가 여기서 떠들고 있으면 엄마가 잠을 설칠 거야.”

“꺄아아?”

“그러니까 나랑 가서 놀자. 어때?”

“꾸꺄!”

에벌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쌍의 짧고 통통한 다리를 열심히 뽈뽈 움직이며 정강이를 기어서 올라와 품에 폭 안겨 왔다. 예상보다 훨씬 통통하고 복실복실했다.

뽀송하고 따스한 감촉.

귓가에 상큼한 알림음도 울렸다.

딩동!

[오장육부가 포근한 감촉에 힐링을 느낍니다.]

[심장 : 아…… 폭신하구나아…….]

[허파 : 허어…… 파아…….]

[대장 : 형님들 우리 이 몸뚱이랑 다니면서 이렇게 훈훈한 건 오랜만이지 말입니다? 요 보송보송한 놈 이름은 꾸꾸 어떻습니까?]

[간장 : 꾸꾸 좋네. 애벌레 주제에 커엽게 생겨갖고ㅋ 눈망울 까만 거 보소. 이게 힐링이지 캬.]

[위장 : 꾸꾸ㅋㅋㅋ 애벌레쉨ㅋ 딱밤 마렵네ㅋㅋ]

[오장육부가 뜻밖의 힐링에 기뻐합니다.]

[오장육부가 꾸꾸의 동심을 지켜준 당신의 임기응변에 박수를 보내며 5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6,500]

그렇게 아기 여왕 애벌레, 꾸꾸(?)를 품고 나왔다. 둥지를 빠져나오는 내내 꾸꾸의 머리를 품에 폭 파묻어 주었다. 눈도 살포시 가려 주었다.

사방에 널브러진 동족의 시신.

망가지고 무너진 소중한 둥지.

그런 참상을 보여주기 싫었다.

나오는 내내 꾸꾸가 품속에서 칭얼거렸다.

“꾸우? 꺄아?”

“응? 손 좀 치워 보라고?”

“꾸꺄!”

“안 돼.”

“꾸?”

“지금 이것도 놀이거든.”

“꾸우우?”

“내가 눈 가리고 있을 테니까, 그동안 넌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맞춰 보기. 어때?”

“꾸꺄!”

“그럼 시작한다?”

“꺄!”

꺄르르 품속에서 꼼질거리는 꾸꾸. 녀석의 눈을 가린 채로 둥지에서 얼른 빠져나왔다. 둥지 밖의 일행과 합류했다. 걸음을 서둘렀다. 꾸준히 걸었다. 이동했다. 둥지가 완전히 보이지 않는 곳까지. 숲을 벗어났다.

그사이 꾸꾸는 품속에서 쌔근쌔근 잠들었다. 그때까지도 라키엘은 꾸꾸의 눈을 계속 가려 주었다.

그렇기에 그는 몰랐다. 자신들이 숲을 벗어난 후, 뒤늦게 산불이 났던 현장을 발견한 어느 숲의 일족이 진심으로 분노했다는 사실을.

“감히 숲에 불을……? 나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우리 동년배들은 이런 짓은 상상도 못 했는데. 하여간 요즘 어린 인간들은…….”

파앗!

수백 년을 살아온 엘프 레인저가 땅을 박찼다. 그리고 라키엘 일행이 남긴 흔적을 맹렬히 추적하기 시작했다.

부상병 캠프로 돌아오는 길은 순탄했다. 일행은 숲을 벗어나고 만 하루가 지나서 무사히 캠프로 복귀할 수 있었다.

“……즈어어어어언-!”

“쉿.”

“…….”

복귀 소식에 맨발로 뛰어나오던 가르딘 경이 움찔했다. 경을 향해 째릿. 날카로운 눈초리를 쏘아 주었다. 뒤늦게 자신이 저지를 뻔한 실수(?)를 깨달은 가르딘 경이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오, 오셨습니까, 도련님?”

“어. 캠프에 별일은 없었고.”

“네.”

“부상병들은?”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기…….”

“아, 요놈?”

이쪽의 품을 힐끗거리는 가르딘 경. 그를 향해 빙긋 웃어주며 품속의 꾸꾸를 깨웠다.

“꾸꾸야?”

“……꾸꺄?”

“우리 도착했어. 여기가 내가 말했던 부상병 캠프다?”

“꾸꺄!”

쌔근쌔근 자느라 품속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힘차게 드는 꾸꾸. 그러다가 녀석의 눈길이 가르딘 경과 정면으로 딱 마주쳤다.

“……꾸우?”

“헉?”

“꾸우우?”

“…….”

“꾸꺄!”

꾸꾸가 더없이 반갑게 활짝 웃었다. 움찔하는 가르딘 경에게 말해 주었다.

“이름은 꾸꾸. 아피로스 여왕 애벌레야.”

“여왕 애벌레…… 말입니까?”

“어. 이제부터 부상병들의 감염 예방과 치료에 일익을 담당해 줄 녀석이기도 하고. 그런데 경이 놀랄 일은 이게 끝이 아닌데.”

“예? 그게 무슨……?”

“꼬슴아? 무겁지? 이제 그거 내려놔도 돼.”

“헥헥…… 꼬슴!”

라키엘이 일행 뒤쪽을 향해 말했다. 그 순간, 쿠웅! 하고 묵직한 물체 떨어지는 소리가 땅을 타고 울렸다. 덕분에 가르딘 경은 뒤늦게나마 발견할 수 있었다.

“허억?”

커다란 말벌이 널브러져 있었다. 무려 코끼리 사이즈의 말벌이었다!

“저, 저거…… 저거…….”

“베스파로스 여왕벌이야.”

“여왕…… 벌…… 말입니까?”

“어. 오는 길에 주웠어.”

“주웠다니, 저걸 뭐에 쓰시려고…….”

“술 담가야지.”

“……예에?”

“당연한 거 아냐? 저 아까운 걸 왜 그냥 버려.”

“…….”

“아무튼 그런 게 있어. 어쨌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라키엘은 베스파로스 여왕벌의 시체를 창고에 옮겨놓게 했다. 지금은 질질 시간을 끌 틈이 없었다. 환자는 이쪽을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 특히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은 환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제는 꾸꾸에게 밥값을 시킬 때다.

“그러니까 꾸꾸야?”

“꾸우?”

“너 혹시 속이 불편하진 않아?”

“꺄아?”

“아, 그게 무슨 소리냐면, 누가 그러더라고. 네가 토해 주는 물질이 아픈 사람들을 아야 안 하게 해줄 수 있대.”

“꾸꺄아?”

“정말이야.”

“꾸꾸꺄?”

“응. 진짜로.”

“……꺄꾸?”

“응. 맞아. 살짝만 구토해 주면 딱 좋을 거 같은데.”

된다.

설득이 통한다!

라키엘은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이내 돌아오는 꾸꾸의 반문에 그는 멈칫해야 했다.

“꾸꺄아? 꾸? 꾸꺄?”

“……뭐? 구토해 줘도 내가 그걸 잘 써줄지 모르겠다고?”

“꺄! 꾸!”

“그거 그냥 아무렇게나 쓴다고 해서 효과가 있는 게 아니라고? 게다가 한 달에 한 번만 토할 수 있어서 함부로 쓰기엔 아깝다고?”

“꾸꺄!”

“으음, 그러니까. 네가 구토해 준 물질을 내가 어떻게 활용할지 계획부터 들어보고 싶다는 거지?”

“꾸!”

“…….”

라키엘은 꾸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요 녀석, 생각보다 만만(?)하지가 않았다. 해맑은 것과는 별개로 은근히 따질 건 따지는 성격인 건가.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라키엘은 자신의 계획을 말해 주었다.

“우선, 난 네가 구토해 주는 물질에 한방 재료를 섞을 거야.”

“꾸우?”

“원래 한방에서 쓰는 자운고(紫雲膏)라는 연고가 있거든. 화상이나 피부 회복에 좋은 연고야. 약간의 항염 작용도 가능하고.”

“꺄아?”

“거기에 네가 토해 주는 걸 섞어서 훨씬 강력한 외상치료 전문 항생연고를 만들려고. 그걸로 아야 하는 사람들 고쳐 주려고.”

“꾸꾸꺄아?”

“연고 이름? 정해 놨냐고?”

“꾸꺄!”

“물론 정해 뒀지. 알려줘?”

“꾸우!”

“라키엘이 만든 연고니까 심플하게…….”

“꺄아?”

꾸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키엘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라데카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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