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15화 (115/468)

115화. 마음을 다하여 (2)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라키엘은 꾸준히 부상병들을 돌보았다. 새벽이면 가장 먼저 눈을 떴다.

‘내 보너스 수명!’

아무리 피곤해도, 온몸이 녹초처럼 느껴져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부상병들의 상태부터 가장 먼저 살폈다. 상처 부위에 라데카솔을 발라주었다.

전통적인 한방 연고인 ‘자운고’를 베이스로 삼은 연고였다. 당연히 효과가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자운고도 제법 쓸 만한 연고니까.’

갖가지 피부병과 화상, 외상 등에 두루 쓰이는 연고였다. 특히 자운고에 들어가는 당귀와 자근의 효과가 좋았다.

당귀는 피부에 영양을 공급하여 조직 재생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었다. 약간의 진통, 소염 효과도 갖추었다. 자근은 해열과 해독, 살균 능력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 아피로스 여왕 애벌레인 꾸꾸가 제공해 준 천연 항생물질이 첨가되었다.

그 효과는 엄청났다.

‘좋아. 덧나서 부어 있던 곳이 눈에 띄게 가라앉고 있어.’

새벽에 부상병들을 살피며, 아침에 붕대를 열어 볼 때마다 사실은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곤 했다.

상처의 끔찍한 모습 때문에?

물론 아니었다.

하루가 지나는 사이에 상처가 덧나 있을까 봐. 고름이 생기거나 염증으로 퉁퉁 부어 있을까 봐. 감염 반응 때문에 부상병의 상태가 악화될까 봐.

그게 제일 두려웠다.

이곳의 대부분이 중상을 입은 병사들이었다. 한데 세균 감염에 시달리면 회복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생명까지 위험해진다.

그걸 라데카솔이 효과적으로 막아 주었다. 덧날 곳은 가라앉혔다. 고름이 생겨 진물이 흐르던 상처도 진정시켰다. 말 그대로 새 살이 솔솔 돋아났다.

“자아, 오늘도 약 바를 시간이야. 움직이지 마시고.”

“으…… 으으…….”

“따갑지?”

“괜찮습니다, 군의관님.”

“좋아. 오늘도 잘 참아줬어. 꿰맨 곳도 잘 붙고 있고.”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다. 부상병들이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다.

그 사실이 희망을 주었다. 더 열심히 부상병들을 보살폈다. 거의 온종일 곁에 달라붙어 지냈다. 덕분에 일행도 덩달아 바빠졌다. 가르딘 경은 물론이었다. 라키엘의 호위를 위해 왕녀가 붙여준 앙부아즈의 기사들마저도 그러했다.

기사들도 소매를 걷었다. 라키엘과 가르딘을 도와 부상병을 돌보며 생각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 저 사람, 왜 이렇게 진심이지?’

‘여기 부상병들, 따지고 보면 자기네 백성도 아닌데. 우리 앙부아즈의 백성인데. 왜 저렇게 열심인 걸까.’

아니,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부상병을 보살필 생각을 품은 적이라도 있었던가. 정성을 기울이면 살릴 수 있는 목숨이라는 생각이라도 해 본 적이 있었나.

‘……아니.’

없다.

한 번도 없었다.

기사들은 내심 절감했다. 그리고 부상병에게 침을 놓아 주는 라키엘을 쳐다보았다.

“…….”

문득, 부끄러워졌다.

자신들은 기사였다. 명예를 중시하는 자들이었다. 한데 죽어 가는 병사들에게 한 번도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었다. 오로지 왕가를 수호하고, 개인의 명예를 드높이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데 진짜 명예라는 게 무엇일까. 전쟁터에서 용맹을 뽐내는 것? 왕실과 주군을 보호하는 것?

그것만이 다가 아니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처음 느껴보는 낯선 생각과 감정이었다. 의외로 거부감이 들지가 않았다. 오히려 배우고 싶다고, 바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기분을 느낀 이는 기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저기, 도련님?”

어느새 깊은 밤.

가르딘 경은 부상병 곁에서 꾸벅꾸벅 조는 라키엘을 조심스럽게 깨웠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곤히 잠든 탓인지, 라키엘이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결국, 가르딘 경은 주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도련님?”

“……으음, 어, 음?”

움찔하며 깨어나는 황태자. 이쪽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무방비한 모습에 가르딘 경은 그만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어? 나?”

“예.”

“……어우, 어깨야. 깜빡 졸았네.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침, 흘리고 계셨는데.”

“…….”

“거기 말고. 반대쪽.”

“이잇!”

라키엘의 소매가 바쁘게 움직였다.

그 소매 사이로 보이는 손목과 팔뚝이 참 가느다랗다. 원래부터 제법 깡마른 체형이셨는데, 요즘엔 부쩍 더 마른 것 같다. 아마도 부상병들을 돌보느라 피곤에 절어서 그런 거겠지.

가르딘 경이 걱정스레 말했다.

“저기, 요즘 너무 무리하시는 게 아닌가 염려가 됩니다.”

“나 말야?”

“예. 그러다 쓰러지실지도…….”

“아 괜찮아, 괜찮아.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하지만 도련님. 아니, 전하.”

가르딘 경이 정색했다.

“사실은 말입니다. 이런 말씀은 드리지 않으려 했는데, 오늘은 해야겠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라키엘도 표정을 굳혔다.

혹시 가르딘 경, 항의를 하려는 걸까. 혹은 쓰린 충언이라도 꺼내려는 건가.

‘하긴 내가 요즘 꽤나 무리하긴 했지. 날밤도 숱하게 지새고. 밥도 서서 허겁지겁 먹다시피 했고.’

물론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치료의 손길을 기다리는 부상병은 넘쳐나는데, 일손은 한참이나 모자란 상황이었다. 잠을 쪼개고, 쉬는 시간을 줄이고, 밥 먹는 시간마저도 뭉개야 겨우 부상병들을 빠짐없이 돌볼 수 있었다.

덕분에 오장육부가 매일 항의를 해댔다. 이러다 쓰러진다고. 훅 간다고. 조만간 파업이라도 선언할 기세였다. 한데 이젠 가르딘 경까지 잔소리의 대열에 합류하려는 걸까.

‘쓰읍. 만약에 진짜로 잔소리하면 그냥 혼내고 무시해야지.’

역시 권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라키엘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가르딘 경의 입에서 쓴소리가 아닌, 뜻밖의 말이 나왔다.

“저 요즘, 깊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응?”

“진심입니다.”

“…….”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뭘 반성하게 됐다는 걸까. 가르딘 경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여기 처음 왔을 때 말입니다. 아니, 그 전에 전하를 따라 앙부아즈로 오던 때부터, 황도에서 출발할 때부터 저는 전하의 계획에 회의적이었습니다.”

“회의적이었다고?”

“예.”

가르딘 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나서신다고 한들, 제가 전하를 돕는다고 한들, 병사들을 몇이나 살릴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여기 도착해서 캠프의 모습을 봤을 때도 그랬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다들 죽을 병사들, 제겐 그렇게만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전하께선 다르셨습니다.”

어쩐지 묘한 확신이 배어나는 목소리로 가르딘 경이 말했다.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현실과 타협하지도, 물러나지도 않으셨습니다.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면 필사적으로 새로운 길을 뚫고, 그 길이 험난할 때면 앞장서길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저, 이번에 많이 느끼면서 반성하고 있습니다.”

“……어, 그래?”

“예, 전하. 앞으로도 더 많이 느끼고 배우겠습니다. 그래서 전하의 건강을 더욱 성심껏 보살펴 드리고 싶습니다.”

가르딘 경이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진심이었다.

부상병들은 그저 방치되는 존재인 줄 알았다. 그게 당연한 줄로만 여겼더랬다. 하지만 아니었다.

주군을 따라 부상병들을 돌보며, 그렇게 치료받은 부상병들이 하나둘씩 병상을 털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그는 뼈저리게 반성했다. 자신이 나태했노라고. 더 많은 사람을 살릴 방법을 애써 찾으려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러니 앞으로도 절 곁에서 놓아 주지 말아 주십시오. 감히 드리는 부탁입니다.”

“……어, 으음, 솔직하게 대답해도 돼?”

“예, 전하.”

“나 방금 오글거려서 미치는 줄.”

“…….”

“손발 전부 사라질 뻔했네, 진짜.”

“…….”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오밤중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소리 할 시간 있으면 캠프 한 바퀴 돌면서 부상병들이나 좀 살펴보자, 응? 자다가 열 끓는 병사가 있는지, 호흡은 편안한지, 다른 응급 상황은 없는지.”

“…….”

“잘하자? 응?”

“……예, 전하.”

그렇게, 살짝 오글거리는 가르딘 경의 진심은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치료의 나날이 이어졌다.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응급수술과 봉합을 하고, 라데카솔을 바르고, 탕약을 처방하고, 필요한 이에겐 침을 놓았다. 균형 잡힌 식사와 꼼꼼한 위생 관리는 기본이었다. 나날이 누적되는 라키엘의 피로와 함께 무더운 여름날이 흘러갔다.

하루, 이틀, 열흘, 보름, 한 달.

그사이에 많은 부상병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캠프에서 최초로 응급수술을 받았던 상급병사, 티에리도 그중의 하나였다.

‘내가 이렇게 다시 걸을 수 있게 되다니.’

이거, 정말로 현실일까.

병상을 딛고 스스로 처음 일어선 첫날, 티에리는 감격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이마에 닿는 따가운 햇볕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렇게 회복되어 멀쩡히 걸을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나 가슴 벅찼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스스로를 포기하고 있었다. 더러운 침상에서 죽어가고 있던 때엔 정말로 그랬다. 살아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곪아 들어가는 상처가 너무나 아팠다.

차라리 이 고통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그저 이 삶의 끝이 너무 아프지 않기만을 바라며. 하루하루 헐떡이는 호흡을 내뱉으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토록 지독하던 상처가 나았다. 팔을 잘라내지도 않았다. 옆구리도 다 아물었다. 이렇게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의 삶을 희망할 수 있게도 되었다.

그런 감격은 그의 것만이 아니었다. 다른 수많은 부상병들이 차례차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회복의 기쁨을 누리며 서로를 얼싸안았다. 캠프 전체가 안도와 기쁨의 미소로 물들어 들떴다.

하지만 단 한 명.

이 상황에서도 들뜨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라키엘이었다.

무려 서른 명째의 부상병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저녁. 그 기념으로 캠프에서 조촐한 연회가 마련되던 와중이었다. 라키엘은 작고도 떠들썩한 병사들의 축배 사이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자신의 작은 텐트로 돌아와 궤짝을 열었다.

그 속에 다양한 잡동사니가 있었다. 아니, 사실 그것은 유품들이었다. 그동안 캠프에서 미처 살려내지 못했던 부상병들. 상처가 너무나 깊어서. 손을 쓰기엔 너무나 늦어서. 가능한 모든 치료를 했지만 역부족이어서. 안타깝게 죽어 간 병사들의 유품이었다.

누군가의 손때 묻은 장갑.

어떤 이의 초라한 목걸이.

모두가 라키엘의 당부로 죽은 병사에게서 한 가지씩 거두어들인 물건들이었다. 언젠가 훗날 유족들에게 전사자의 시신 대신에라도 보내어 주어야 할 유품이었다.

“…….”

그의 눈길이 유품들을 쓸어보았다.

유품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그걸 지녔던 병사들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헐떡이다가 끊어지던 숨결이, 채 감지 못하던 허망한 눈길이, 떨면서도 이쪽의 손을 꼭 그러쥐던 손길이. 모두가 방금 있었던 일인 것처럼 생생했다.

‘내 실력이 조금 더 좋았더라면, 살릴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다.

나름 노력했지만, 정말로 열심히 했지만, 그게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자신이 돌보던 환자들이었다. 끝끝내 살려내지 못한 이들이었다. 사실은 이런 경험이 낯설었다. 한의원에서는 돌보는 환자가 죽는 일 따위, 좀처럼 없으니까. 그런 환자들은 일찌감치 큰 병원 응급실로 가니까.

그래서였다.

자신이 돌보던 환자가 죽어가는 것도, 그런 환자를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한 사람이 눈을 감을 때마다 가슴에 대못 하나가 박혔다. 영원히 빠지지 않을 못이었다.

아팠다.

미안했다.

그래서 이렇게, 떠난 이들의 유품을 매만지며 못난 눈물만 흘린다.

“…….”

라키엘은 말없이 눈가를 훔쳤다. 한참을 우두커니 홀로 앉아 있었다.

그동안 천막 바깥에서는 수많은 눈길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연회에서 슬며시 사라진 군의관. 그런 군의관을 걱정하며 찾아온 부상병들이었다. 군의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안타깝게 죽어간 동료들. 그들의 유품을 매만지다 끝내 눈물을 보이는 군의관. 군의관의 뒷모습을 보는 병사들의 눈가도 서서히 젖어 갔다.

모두가 결심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설령 불구덩이에 뛰어들어야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저 군의관을 따르겠노라고. 영원토록 변치 않을 충성을 바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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