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16화 (116/468)

116화. 등 뒤의 개소리 (1)

“그럼 지금부터, 앙부아즈의 합당한 지배자이신 국왕 전하께 영원한 충성을 다시금 표하오며, 전황 보고를 드리겠사옵니다.”

이곳은 발루아 요새.

앙부아즈 왕국 중부 험준한 산맥의 유일한 통로. 그 천혜의 요새 회의실에서 앙부아즈의 국왕, 메로뱅거 발루아 앙부아즈는 정보참모의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내심 분노했다. 그것은 반란을 일으킨 친족에 대한 새삼스러운 분노였다.

‘쟈빌론, 그놈이 기어코…….’

쟈빌론 플람베르 앙부아즈. 선대와 핏줄이 이어져 있는 방계 왕족. 동시에 그는 소드마스터였다.

귀한 인재였다.

하여 아꼈다.

애초에 소드마스터가 왕가에 둘밖에 없기에 더더욱 그러하였다.

‘한데 그런 내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는가? 정녕?’

쟈빌론이 야심이 많은 자임은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몇몇 신하들은 노골적인 염려를 표하기도 하였다. 흑심이 많은 자라고. 그만큼 능력 또한 출중한 자라고. 그런 자에게 많은 권한을 주어선 아니 되신다고.

하지만 자신의 생각은 달랐다.

야심이 많은 자일수록 잘 품어야 한다고 여겼다. 지나치게 홀대를 하면 반발심이 쌓여 더욱 위험할 것이라 보았다. 오히려 적당한 권한을 주어 지닌 능력을 적절히 사용하도록 해주면 어느 정도는 야심을 달랠 수 있으리라고도 보았다.

하여 동부의 사령관직을 맡겼다. 몇 년 동안은 그 생각이 옳은 듯했다. 실제로 쟈빌론은 그동안 얌전했으니까.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여겼다.

한데 그 생각이 틀렸다.

“……를 드린 바와 같이, 현재는 북동부 일대의 소규모 교전을 빼면 큰 충돌은 없는 상황입니다. 물론 그 원인은 반란군의 주력이 이곳 발루아 요새를 목표로 집결 중이기 때문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귀를 쿡쿡 찌르는 정보참모의 보고. 국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곳으로 주력을 집결 중이라. 놈은 우리와의 일전을 피할 생각이 없는 게로군.”

“아마 그런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후우.”

국왕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반란군과의 거대한 일전이라. 부담감이 가슴을 꽉 채웠다.

“다른 보고할 것은 없는가?”

“아, 있사옵니다.”

혹시나 조금 희망적인 소식은 없을까. 별다른 기대 없이 물었다. 한데 정보참모의 표정이 뜻밖에도 밝아졌다.

“최근 기이하도록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는 부상병 캠프가 있사옵니다.”

“훌륭한 성과? 부상병 캠프가?”

“예, 전하.”

국왕 메로뱅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란군과의 일대 격전을 앞둔 지금 시기에 고작 부상병 캠프에 대한 보고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개 부상병 캠프가 성과를 내봤자 얼마나 되겠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정보참모의 보고가 그의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최근 2개월간 부상병 생존율이 무려 70퍼센트를 넘은 곳이옵니다.”

“……뭐?”

70퍼센트?

국왕은 하마터면 목에 담이 쎄게 걸릴 뻔하였다. 믿어지지 않는 수치였다.

“그럼, 열 명이 다쳐서 실려 가면 그중에 일곱이 살아서 나온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정녕 그게 사실인가?”

“예, 전하. 실은 저도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사옵니다. 보통 부상병 캠프의 생존율이 기껏해야 10퍼센트 내외임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좋은 성과였기 때문이었사옵니다. 하온데…….”

“하온데?”

“자체적인 조사 결과, 그 성과가 어떠한 조작도 없는 투명한 사실로 판명되었사옵니다.”

“정말로 그게 사실이라고?”

“예, 전하. 심지어 현재 왕국군 각급 부대의 병사들 사이에도 해당 캠프의 소문이 널리 번지는 중이라 하옵니다.”

“소문?”

“전장에서 어떻게 다치든 그곳, 21지원대대의 부상병 캠프로 실려 가면 살 수 있다는 믿음이 퍼지고 있사옵니다. 하여 병사들이 그곳을 부르는 별칭마저 생겨난 상황이옵니다.”

“별칭마저?”

“예, 전하.”

국왕의 물음에 정보참모가 싱긋 웃었다.

“병사들이 21지원대대를 가리켜 부르길…….”

“힐링 캠프?”

“예.”

“힐링 캠프가 왜 여기서 나와?”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한 눈길로 가르딘 경을 쳐다보았다.

“혹시 가르딘 경, 열혈 공중파 시청자셨어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 별건 아니고.”

라키엘은 피식 웃었다.

“경이 방금 그랬잖아. 왕국군 내에서 우리 부상병 캠프가 특이한 별칭으로 불린다며. 그런데 경이 어쩐지 나한테 익숙한 이름을 꺼내 버려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이곳에 온 지도 2개월째. 그동안 여기 부상병 캠프에 대한 소문이 왕국군 병사들 사이에 쫙 퍼졌단다. 여기로만 실려 오면 살 수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단다. 심지어 별칭까지 생겼단다.

‘그런데 그게 힐링 캠프래. 커허.’

그는 숑숑 떠오르는 옛 기억, 한국에서의 어떤 방송에 대한 생각을 접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가르딘 경의 뒤에 서 있는 스무 명가량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뭐 어쨌건 우릴 부르는 별칭이야 그렇다 치고. 그래서, 그 소문을 들은 국왕…… 전하께서 저 사람들을 우리 캠프로 보내셨다고?”

“예, 도련님. 정확히는 우리 캠프의 소문이 아니라 성과를 보고 매우 흡족해하셨다고 합니다.”

“흡족해하셨다고?”

“네. 부상병들의 생존율이 70퍼센트가 넘었으니까요.”

“원래 다 그런 거 아닌가?”

“아닙니다, 결단코.”

가르딘 경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보통 10퍼센트만 넘어가도 훌륭하다는 평가가 나오니까요.”

“그런가.”

“예. 정말입니다.”

“그럼 어쨌건, 우리 성과가 좋아서 국왕 전하께서 매우 기뻐하셨고, 저 사람들을 여기로 교육 파견을 보낸 거라고?”

“그렇습니다, 도련님. 왕국군의 각 부상병 캠프에서 차출된 군의관들입니다.”

“오오.”

내내 심드렁하던 라키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 스무 명이 전부 현역 군의관들이라고? 그럼 생초짜는 아닌 거네? 대박. 안 그래도 일손 모자랐는데!’

실제로 일손 때문에 허덕이던 그였다. 제대로 된 의료 인력이라고는 자신과 가르딘 경밖에 없던 처지였다. 그런데 실려 오는 부상병은 끝이 없었다. 덕분에 이곳에 온 뒤로 하루도 편안하게 자본 날이 없었다.

‘앙부아즈의 국왕이 날 살려 주는구나!’

라키엘은 눈가의 다크써클 가득 피어나는 광명을 느꼈다. 과로사의 위기를 걷어내고 승천하려는 광대뼈를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군의관들을 향해 빵긋 웃었다.

“흠흠, 다들 반갑습니다. 처음 뵙는군요. 저는 군의관 리한이라고 합니다.”

“…….”

“교육 파견을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테지만 우선 다들 절 따라오시죠. 직접 캠프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상병들의 상태와 회복 상황에 따라 천막의 구역을 구분해 두었으니, 우선 그것부터 파악하시는 게 앞으로의 업무에 도움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

“다들 뭐 하십니까?”

“…….”

이상했다.

스무 명의 군의관 중에 그 누구도 이쪽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다들 멀뚱멀뚱 이쪽을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한데 그 눈빛이 좀 이상했다.

그건 마치…….

‘왜 네가 우리한테 명령을 하느냐는 듯한 눈빛인데?’

묘하게 거슬리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실례지만, 우선 쉴 곳부터 좀 안내해 주면 좋지 않을까 싶은데 말입니다?”

스무 명의 파견 군의관.

그들 중의 하나가 나섰다.

유독 잘생기고 키가 훤칠한 자였다. 목소리도 당당했다. 혹시나 저 군의관들 중에서 나름 목소리 좀 내는 리더인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리한 군의관님? 아시다시피 우리는 국왕 전하의 지엄한 명에 따라 숭고한 사명을 지니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결코 안락한 여정은 아니었지요. 무려 엿새 동안의 강행군이었습니다. 한데 그 고생 끝에 도착하자마자 피로를 풀 틈도 주지 않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너무하다고요?”

“예. 배려가 없는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

너무나 당당하게 꺼내는 발언. 그 말을 들으며 라키엘은 가출하려는 어처구니를 꽉 붙들어야 했다.

그가 반문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제가 그쪽 분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일을 시키려 하는 게 배려가 없는 행위다, 이 말입니까?”

“당연하지요.”

“어째서 당연합니까?”

“예?”

“그쪽 군의관님, 이름이 뭐지요?”

“샹드르입니다만.”

자신의 이름을 밝힌 군의관. 그는 여전히 당당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마치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 시켜놓고 서비스 군만두가 왜 안 나오느냐고 따지는 사람 같았다. 라키엘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어짐을 느꼈다.

“샹드르 군의관님?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환자가 의사를 기다려 줍니까?”

“예?”

“당장 목숨이 까딱까딱 넘어가기 직전인 환자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환자가 의사를 얌전히 기다려 줍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이곳에 당장 죽어가는 부상병들이 지천에 널려 있는데, 피곤하니까 쉬는 게 권리라는 요구가 그렇게 쉽게 나오느냐는 말입니다.”

라키엘의 목소리가 착 깔렸다. 그의 마음속에 빡침이 그라데이션으로 깃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내 보너스 수명!’

할 일이 태산이었다.

원래라면 부상병 회진을 돌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딴 놈과 아웅다웅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자니, 그 시간이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한데 샹드르는 이쪽의 빡침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 괴상한 소리를 했다.

“죽어가는 부상병들이라 봤자 그들 중에 귀족 장교는 거의 없을 텐데 말입니다? 혹시 있습니까?”

“……뭐요?”

귀족?

그게 무슨 소리일까.

샹드르의 반문이 이어졌다.

“귀족 말입니다. 혹시 리한 군의관님께서는 귀족을 따로 분류하지 않은 겁니까?”

“그야 당연히…….”

“안 하셨군요. 쯧쯧. 그런 기본도 못 지키셨다니. 실망입니다.”

“…….”

사람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지면 할 말이 그냥 사라지나 보다. 라키엘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칫 입을 열면 쌍욕이 나올 것 같았다.

그동안 샹드르의 헛소리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리한 군의관님? 제가 교육을 받기 위해 파견을 온 입장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조금 조심스럽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모름지기 부상병은 둘로 나뉩니다. 귀족인 자와 아닌 자. 극진히 보살펴서 반드시 살려야 할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그렇게 둘 말입니다.”

“…….”

“조금 비인간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부상병을 둘로 나누는 걸까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의료 인력은 한정되어 있고,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은 넘쳐나니까 말입니다. 그게 전쟁터의 부상병 캠프니까 말입니다.”

“…….”

“그런 와중에 우리는 과연 누구부터 살려야 할까요? 누구를 살리면 두둑한 사례금을 받게 될까요? 당연히 귀족이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죽어가는 귀족 출신 장교를 살려내면 얼마나 큰 칭찬과 명성을 얻겠습니까. 게다가 더 좋은 점도 있습니다. 운이 조금만 좋다면 살려낸 귀족 장교 가문의 두둑한 후원도 받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

“그럼 반대로 짚어볼까요? 온 힘을 다해서 평민 병사를 살리면, 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입으로만 고맙다는 말을 들을 뿐이지요. 주머니에 들어오는 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손해를 볼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귀족 장교를 살릴 귀중한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게 되는 셈이니까 말입니다.”

“…….”

“그래서 제가 리한 군의관님께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조언을 드리는 겁니다. 후우, 실로 큰일이 날 뻔했군요. 전하께서 이곳의 이런 안타까운 속사정을 아셨다면 크게 실망하셨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그 전에 저희가 와서 그런 점을 지적해 드릴 수 있게 된 것이 말입니다.”

“…….”

“리한 군의관님?”

“…….”

“어째서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 아, 놀라셨습니까? 하지만 이게 실제 현장의 냉엄한 논리이자 요령입니다. 아무래도 아직 경험이 적으시니 그러시는 것 같…….”

“그만. 개소리는 거기까지.”

“……예?”

샹드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개소리라니, 갑자기 들은 폭언 때문에 얼떨떨해졌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고 있는데 저 빨간머리 뚱땡이 군의관이 왜 갑자기 욕을 하는 걸까.

하지만 샹드르의 생각은 거기에서 끊어졌다.

뻐걱!

“……!”

라키엘의 월별 한도 초과의 개빡침을 담은 주먹질이 작렬했다. 샹드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몸뚱이도 트리플 악셀의 우아한 궤적을 그리며 홱 돌아갔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옥수수, 아니, 어금니 하나가 허공을 날아가며 반짝, 빛났다.

나머지 군의관들의 눈동자가 칠성장어 승천 댄스를 추며 몹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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