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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117화 (117/468)

117화. 등 뒤의 개소리 (2)

폭력은 부당하다.

함부로 휘둘러선 안 된다.

라키엘은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다. 한국에서도 그랬다. 남에게 폭력을 써본 적이 거의 없었다. 딱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랬다.

한의대생 시절이었던가.

같은 과 녀석과 사소한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다. 그놈이 패드립을 꺼냈더랬다. 부모님 안 계시냐고. 진짜로 안 계셔서, 가슴 아프게 떠나보낸 지 몇 년도 되지 않았던 터라 울분이 터졌다. 싸웠다. 쌍방폭행이었다. 그게 유일한 예외였다.

그런데 지금.

그때보다 심한 폭력을 저질렀다. 이번엔 울분이 터진 건 아니었다. 철저한 계산 끝에 실행한 주먹질이었다.

뻐억!

“……구윅!”

괴상한 비명과 함께 샹드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옥수수 알처럼 실한 어금니 하나도 반짝반짝 날아갔다. 샹드르가 한 큐에 쓰러졌다.

완벽한 기절이었다. 당연했다. 아스라한 심법을 동원했으니까. 마나를 살짝 실은 주먹질이었으니까. 아마 한두 시간은 푹 잠들지도 모르겠다.

“어엇?”

“어, 그, 어……?”

“저기, 저?”

나머지 파견 군의관들이 입을 뻐끔뻐끔. 놀란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가득하던 놀람이 서서히 분노로 바뀌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사람을, 그것도 군의관을 때리다니!”

“이러고도 뒤탈이 없을 것 같습니까?”

군의관들의 항의가 쏟아져 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대신 비웃음만 피식.

“무슨 짓?”

뻐근해진 주먹을 주물럭거리며 군의관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을 하나하나, 차례대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댁들, 뭔가 굉장한 착각을 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쪽들은 지금 여기 배우러 온 거야. 놀러 온 거 아니야. 시답잖은 그쪽 이분법이나 설파하러 온 건 더더욱 아니고.”

“…….”

“그런데 뭐? 부상병을 둘로 나눠야 한다고? 귀족인 자와 아닌 자로 구분해서 치료 순위를 정해야 한다고? 그래야 주머니가 두둑해져? 후원을 받아? 내 참. 듣다 보니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진짜.”

생각만 해도 웃음부터 나왔다. 뭐 이런 쓰레기들이 다 있나 싶었다. 한데 저들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다니요! 이건 부당합니다!”

“사과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이 일을 상부에 알릴 겁니다.”

군의관들이 더더욱 날뛰었다. 건수라도 잡은 사람들 같았다. 그래서 더 웃음이 나왔다.

“이 일을 상부에 알리겠다고? 어떤 명목으로?”

“그야 당연히 폭력 행위로 신고를…….”

“폭력 행위? 그전에 이자가 저지른 왕명 불복종은?”

“……뭐요?”

항의하던 군의관이 멈칫했다. 라키엘의 바늘로 찌르는 듯한 지적이 이어졌다.

“왕명 불복종. 앙부아즈의 위대한 국왕 전하의 명을 어겼지 않나, 쓰러져 있는 이 작자 말이야.”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무슨 소리긴. 댁들이 왜 여기에 와 있는 건지를 벌써 잊었어?”

“그건…….”

“댁들은 국왕 전하의 명에 따라 이 캠프에 왔지. 이곳 캠프가 달성하고 있는 높은 부상병 생존율의 비결을 배우기 위해서. 그렇지?”

“…….”

“그런데 왜 배울 생각을 하지 않지? 어째서, 내 안내에 따르지 않고 시답잖은 딴죽부터 걸어대는 걸까. 그거, 이미 왕명에 대한 불복종 아닌가?”

“비, 비약이 지나치시오!”

“지나치긴 개뿔.”

라키엘이 코웃음 쳤다. 그의 신랄한 말이 이어졌다.

“기껏 배우라고 보내줬더니 배울 생각은 없고. 알려 주겠다고 하니까 그런 거 필요 없노라 하고. 환자를 귀족과 평민으로 나누는 것을 요령이라 말하며. 그걸 모르는 내가 안타깝고. 이런 실태를 알면 국왕 전하께서도 실망하실 거라는 헛소리나 뱉어 대고.”

“…….”

“그 발언과 행동 어디에 배우겠다는 뜻이 있는 건지 오히려 묻고 싶은데.”

“하, 하지만!”

“하지만 뭐.”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이렇게 주먹질로…….”

“그럼 영창에 넣어 줘?”

“…….”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집어넣은 대대장이 아직도 거기 있을 텐데. 함께 오순도순 지내게 해 줄까? 여기 전부?”

“…….”

“쯧. 할 말 안 남았으면 다들 꺼져. 있어봤자 도움도 안 될 것 같으니까.”

진심이었다.

저런 마음가짐인 놈들 따위, 백 명이 있어도 도움이 안 될 거다. 아니, 오히려 방해라도 안 하면 다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어째서 저 인간들이 살리는 부상병이 10퍼센트밖에 안 되는지도 알 것 같았다.

‘평소부터 보통 병사들은 그냥 방치하는 거였구만. 그중에 집안이나 배경이 쓸 만한 귀족 출신 장교만 골라서 신경 쓰고 보살피는 거였어.’

생각하자니 욕지기가 나왔다. 저들이 지닌 자그마한 능력. 그 능력이 가져다준 초라한 권력. 자신들이 타인의 삶과 죽음을 선별하고 결정한다는 우월감을 만끽했을 터다.

그런 알량한 오만함에 도취된 저들의 면면이 역겨웠다. 그걸로 고작 한다는 짓거리가 제 주머니나 불리는 짓이라는 사실이 더더욱 역겨웠다.

때린 게 미안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까 주먹질을 할 때 조금 더 세게 후려쳤어야 했다는 후회마저 들었다. 한편으론 아쉬웠다.

‘모처럼 일손 좀 확보하나 싶었는데. 괜히 쓰레기들한테 기대했다가 귀한 시간만 날렸네.’

어느새 부상병 회진을 돌 시간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라키엘은 서둘렀다. 그는 쓰러진 군의관 샹드르와 나머지 놈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바삐 자리를 떠나갔다.

‘감히…… 어디서 굴러 왔는지도 모를 근본도 없는 놈 주제에…… 나한테 이런 짓을 했어?’

샹드르는 몇 시간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자신의 요구대로 여독을 제대로 푼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친절하게 재워(?) 준 라키엘에 대한 분노부터 불태웠다. 당연했다. 라키엘에게 죽통을 맞은 자리가 퉁퉁 부어 있었다. 날아간 어금니도 너무나 아팠다. 하지만 그 모든 통증보다도 굴욕감이 더욱 컸다.

‘그까짓 놈이 감히…… 내 자리를 빼앗아?’

샹드르는 이를 갈았다.

자신이 최고다.

자신을 넘어서는 군의관은 없다.

지금까지는 그렇게만 여겨왔다. 실제로도 그랬다. 왕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의과대학을 나온 자신이었다. 그곳에서도 가장 명망 높은 교수의 수제자였던 자신이었다. 군의관이 된 후에도 탄탄대로는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자신의 부상병 캠프가 최고였다.

내전이 발발하기 전에도 그랬다. 지금껏 참전한 크고 작은 전쟁들을 거치며 왕국군 내에서도 독보적인 성과를 냈다. 무려 부상병 생존율 15퍼센트. 특히, 귀족 장교들의 생존율은 더욱 높았다.

덕분에 항상 주목받았고, 제법 많은 귀족가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내전이 끝나면 자신의 주치의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보낸 대귀족도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자신은 최고였다.

리한, 그 근본도 없는 괴상한 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믿을 수조차 없는, 70퍼센트라는, 비정상적인 부상병 생존율을 기록한 그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2인자로 밀려났다.

그놈 때문이다.

까드득!

샹드르는 이를 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함께 파견 온 군의관들이 보였다. 다들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 눈빛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나 최고였던 자신에게 쏟아지는 염려의 눈빛이라니. 충분히 굴욕적이었다.

그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난 괜찮으니 그렇게 볼 필요는 없소. 한데 그놈은?”

“모르겠습니다. 군의관님에게 폭력을 행사한 뒤로 그냥, 자리를 떠나 버렸습니다.”

“자리를 떠났다니요?”

“부상병들을 보러 갔지요. 그 뒤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샹드르는 주먹을 꾹 쥐었다. 리한, 그 뚱땡이 놈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우릴 철저하게 무시하겠다는 거구나.’

감히. 근본도, 출신도 없는 놈 주제에. 그저 운 좋게 왕녀의 후원을 받게 된 주제에.

생각하자니 더욱 분통이 터졌다. 한데 그런 이쪽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료 군의관들이 눈치 없는 소리만 해댔다.

“그런데 샹드르 군의관님? 군의관님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말입니다. 여기 병사들에게서 조금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상한 소리라니요?”

“그 리한이라는 자 말입니다. 실제로 실력이 상당하다는 모양이던데요?”

“뭐요?”

“그자 덕분에 살아났다는 부상병들이 수두룩했습니다. 심지어 절단 수술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절단 수술을 안 했다는 말입니까?”

“예. 직접 캠프를 돌아다니면서도 봤습니다. 다들 사지가 멀쩡한 모습이었습니다. 절단 수술을 받은 병사가 거의 없더군요.”

“아니, 그런데 어떻게 70퍼센트나 되는 생존율을…….”

“뭔가 여러 가지 신기한 치료법을 쓴다고는 들었습니다.”

“신기한 치료법을요?”

“예. 가시로 온몸을 푹푹 찌른다고 들었습니다.”

“가시로 말입니까?”

“아마도 그걸 침술이라고 불렀던 것 같던데. 아, 그거 말고도 또 있습니다. 뜸이라고 부르는 방식이었던 듯한데, 괴상한 풀을 뭉쳐서 말린 덩어리를 피부 위에 올려 두고 불을 붙여 태운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한데 침술과 뜸을 받고 나면 그렇게도 몸이 개운해진다고 하더군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병사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

샹드르는 입을 다물었다.

침술?

뜸?

처음 들어보는 치료법이었다. 가시로 온몸을 찌른다거나, 뭉쳐서 말린 풀 쪼가리를 몸에 올려두고 태우는 치료법 따위는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덕분에 그는 확신했다.

‘그놈, 사이비로군!’

확실하다.

리한이라는 자, 사이비 돌팔이다. 어디선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상한 술법을 배워온 것일 터다. 그런 괴악한 사술로 순진하고 멍청한 병사들을 현혹한 것일 터다.

그럼 70퍼센트를 기록한 생존율은?

‘운이 좋았던 거겠지. 사실은 절단 수술이 필요하지도 않은 병사들이었던 거야. 그저 어쩌다 보니 크게 다치지도 않은 부상병들만 잔뜩 받은 거겠지. 그러니까 그토록 많은 수를 살릴 수 있었던 거겠지. 그게 당연한 것 아니겠어?’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랬다. 자신을 가르친 교수님이 뭐라고 하셨던가.

‘아무리 신과 같은 의술을 지니고 있어도, 전쟁터에서는 20퍼센트 이상의 병사는 살릴 수 없다고 하셨지. 사람인 이상 절대로 그걸 넘을 수는 없다고 하셨어.’

앙부아즈 최고의 의과대학에서도 가장 명성이 높은 스승이셨다. 그런 스승이 하신 말씀이니 틀렸을 리가 없다.

한데 리한 그놈은? 70퍼센트라는 비정상적인 성과를 기록했다. 당연히 믿음이 가지 않았다.

‘다들 속고 있는 거야. 이곳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왕국군의 정보부도, 국왕도, 모두가 그놈의 사술에 현혹된 거지. 어쩌면 그놈, 남들 몰래 흑마술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아마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그러면 자신은 어떡해야 할까. 사명감이 들었다.

‘그놈이 사술을 부린다는 진실을 널리 알려야 해. 그러자면…… 내가 실력을 증명해서 놈의 가면을 벗겨야 할 것이고!’

샹드르는 결심했다.

리한, 그놈의 더러운 뒷구석을 낱낱이 까발려 버리리라. 까맣게 속고 있는 모두를 일깨우리라.

다짐하며 일어났다. 자신의 도구를 챙겼다. 천막을 나섰다.

바깥은 캄캄한 밤이었다. 어느새 자정을 알리는 달빛이 머리 위에 휘영청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잘되었다고 여겼다. 이 시간쯤이면 리한, 그 사이비 놈도 잠들어 있을 테니까.

‘그놈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내 실력을 증명할 좋은 기회지.’

그는 어렵지 않게 부상병 천막을 찾을 수 있었다. 거침없이 들어갔다. 잠든 부상병을 살펴보았다. 마침 수술을 받고서 회복 중인 부상병이었다.

‘역시.’

부상병의 상태를 살핀 샹드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잠든 부상병의 상태를 보아하니 리한, 그자가 얼마나 엉망인지 더욱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수술 후에 당연히 해줘야 할 기본적인 처치도 하지 않다니. 역시 그놈은 사이비가 확실해.’

그러니 이제 그 더러운 가면을 낱낱이 벗겨 주마. 샹드르는 활짝 웃으며 가방을 열었다.

달칵.

갖가지 의료 도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서 피를 뽑아내는 ‘사혈 도구’를 집어들었다. 잠든 부상병의 팔뚝 정맥을 겨누었다. 그는 스승에게서 배운 의학의 상식을 경건하게 되새겼다.

‘모름지기 병이나 다친 곳이 생겼을 때는 몸속에 더러운 피가 잔뜩 생겨나니까, 그 더러운 피를 최대한 많이 뽑아 줘야 맑은 피가 빈자리를 채우며 몸이 건강해지는 법이지.’

서컥.

그의 날 선 사혈 도구가 섬뜩하게 빛나며 병사의 멀쩡한 정맥을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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