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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120화 (120/468)

120화. 성자 탄생 (2)

서걱!

수술칼이 움직였다.

손등이 화끈해졌다.

베어낸 손등에서 흘러나오는 새빨간 핏물. 그 기세(?)가 생각보다 훨씬 맹렬했다. 과장 조금 보태자면 콸콸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랄까.

‘쓰읍. 너무 깊이 베었나.’

아주 잠깐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이다. 라키엘은 자신의 손등에서 나오는 핏물의 기세를 감상했다.

물론 주위에서는 난리가 났다.

“……헉.”

제일 먼저 기겁한 반응을 보인 이는 가르딘 경이었다. 그가 입을 뻐끔거렸다. 이쪽을 향해 던지는 경악에 찬 눈빛이 이렇게 외치는 듯했다.

‘즈어어어어어언하아-!’

하지만 차마 외치지는 못하고 뻐끔뻐끔. 병사의 팔뚝을 꿰매던 손길마저 덜덜덜. 놀란 반응을 보인 이는 비단 가르딘 경뿐만이 아니었다.

“…….”

부상병의 다리를 들어 올려 주고 있던 데미안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샹드르를 비롯한 군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편, 천막 입구 쪽에서 수군거리며 모여 있던 캠프의 관리병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 모두의 눈빛을 종합하자면?

‘저 인간이 왜 갑자기 자해를 하지?’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오장육부의 반응 또한 비슷했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또라이짓에 기겁합니다.]

[심장 : 야! 너 뭐해! 미쳤냐!]

[허파 : 허억…… 파핛……?]

[대장 : 형님들 이 인간 드디어 맛탱이가 가려는 것 같지 말입니다?]

[간장 : 아니 부상병이 과다출혈인데 얘는 왜 지 피를 빼고 난리임? 설마 병사한테 피를 먹여 주려고? 그런다고 수혈이 돼?]

[위장 : 아 요즘 수혈은 와이파이로 한다고ㅋㅋㅋ 아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의 행동에 물음표 백만 개를 띄우고 있습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정신 건강을 염려하며 격려의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7,400]

“…….”

역시나 다들 난리였다.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옆에서 누가 뭐라 하건 말건. 미친놈 쳐다보는 눈빛을 보내건 말건. 브레이크 댄스를 추며 걱정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다친 손등을 들었다. 입으로 가져왔다. 상처를 입으로 덮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입안에 확 번졌다. 그대로 빨아먹었다.

“쯥! 쯔읍!”

행여나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그러고도 놓치는 핏방울이 있을까. 마치 열흘 굶다가 꿀물 마시는 사람처럼 손등을 맹렬히 쭉쭉 빨았다. 꿀꺽꿀꺽, 피를 삼켰다.

“……허억.”

이쪽을 보는 모두의 눈빛에 더욱 큰 염려가 깃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으니까. 과다출혈로 죽어가는 부상병을 살려낼 유일한 방법. 그 희망의 각을 엿보고서 이러는 거니까.

‘써클 슬롯 활성화.’

속으로 되뇌는 순간.

딩동!

맑은 알림음이 귓가에 울렸다.

[써클 슬롯의 저장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써클 슬롯이 비어 있는 상태이므로 저장 기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현재 섭취 중인 물질 : 인간의 혈액(Rh +O) 이 감지되었습니다.]

[감지된 물질을 써클 슬롯에 저장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예스지!’

저장 기능을 활성화했다. 그때부터였다. 꿀꺽꿀꺽 삼키는 혈액이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 대신 마시는 족족 써클 슬롯에 저장되었다.

[1번 슬롯에 물질 저장 중입니다.]

[1번 슬롯 저장량 : 인간의 혈액(Rh +O) 0.1 리터…… 0.2 리터……]

쯥쯥!

계속해서 삼켰다. 써클 슬롯에 담기는 혈액량이 순조롭게 늘어갔다. 0.3리터를 넘겼다. 일반적인 헌혈량인 0.4리터도 금방 채웠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걸론 부족해. 더!’

기왕 하는 거, 확실하게 살려야 한다. 그러한 일념으로 계속 삼켰다. 0.5리터를 넘어. 마침내…….

[1번 슬롯 저장량 : 인간의 혈액(Rh +O) 0.6리터]

그제야 라키엘은 자신의 손등에서 입을 떼었다.

“……파하!”

입을 떼자마자 붕대로 손등을 꽉 눌러 지혈했다. 그리고 곧바로 부상병에게 다가갔다.

“괘, 괜찮으십니까?”

가르딘 경이 창백해진 얼굴로 물어왔다. 그 모습에 쓴웃음이 나왔다.

그래, 지금 이쪽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겠지. 부상병이 과다출혈로 죽어 가는데, 난데없이 이쪽이 셀프 자해를 한 것도 모자라 그 피를 한참이나 벌컥벌컥 마시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다. 당장 병사의 상태가 위태로워지는 중이다.

“괜찮아.”

그는 부상병의 용천혈(湧泉穴)을 짚었다. 발바닥의 가장 중심에 있는 오목한 자리. 흔히 ‘족심’이라 부르는 자리였다.

‘인체의 제2의 심장이기도 하지.’

12경혈 중에서 족소음신경(足少陰腎經)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곳. 몸에서 가장 아래쪽에 있는 혈자리였다. 그렇기에 심장에서 뻗어온 기운이 가장 아래쪽으로 가라앉아 머물고 깃드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니 마나를 담아서 수혈을 한다면…… 이곳이 가장 제격이야.’

라키엘은 확신을 담고서 병사의 용천혈을 엄지로 강하게 눌렀다. 동시에 써클 슬롯의 방출 기능을 발동했다.

딩동!

[1번 슬롯의 방출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방출량을 설정해주십시오.]

‘0.01리터.’

과하지 않게.

부드럽게 천천히.

그러나 절대 끊김 없이.

[써클 슬롯에 저장된 <인간의 혈액(Rh +O) : 0.01리터를 방출합니다.]

키이이잉!

슬롯이 활짝 열렸다.

심장을 둘러싼 마나써클이 역회전을 시작했다. 슬롯에 저장되어 있던 혈액을 농축된 마나에 담았다. 혈맥을 따라 이동시켰다. 심장을 출발지로 삼아, 어깨와 팔뚝의 혈맥을 지나, 손길을 따라, 엄지손가락으로.

마침내 병사의 용천혈로 밀어 넣었다.

울컥!

10밀리리터의 혈액이 마나에 담겨 용천혈 주위를 자극했다. 미약하지만 적절한 자극이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그 자극에 용천혈을 둘러싼 혈관들이 반응했다. 마나에 담겨서 건너온 혈액 10밀리리터를 받아들였다.

새로운 영양과 산소.

작은 활력이 혈관을 따라 번졌다.

‘……된다!’

라키엘은 환호했다.

혹시나 하며 엿본 희망의 각이었다. 나름 떠올린 유일한 수혈 방법이었다. 한데 그게 제대로 통하고 있었다.

‘다시, 10밀리리터!’

키이이잉-!

계속해서 조금씩. 끊어지지 않도록 꾸준하게. 차근차근 수혈을 해주는 것처럼. 슬롯에 담긴 혈액을 마나에 실어서 건네주었다. 0.1리터, 0.2리터, 0.3리터…… 마침내 0.6리터를 건네주고 슬롯이 텅텅 비어 버릴 때까지.

그동안 건네준 혈액이 병사의 전신을 순조롭게 일깨웠다. 부족했던 산소와 영양을 공급했다. 죽어가던 육신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병사의 족소음신경 또한 반응했다.

건네준 마나가 용천혈을 거쳐 발바닥 안쪽 면의 연곡혈(然谷穴)을 두드렸다. 아킬레스건 주위의 태계혈(太谿穴)과 대종혈(大鐘穴)을 간질였다. 종아리를 타고 올라갔다. 무릎 뒤편 오목한 자리의 음곡혈(陰谷穴)을 때리고, 아랫배의 횡골혈(橫骨穴)과 대혁혈(大赫穴)을 어루만졌다.

그 뒤로도 마나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배꼽 어름의 황수혈(肓兪穴)을 지나, 윗배와 명치의 음도(陰都), 복통곡(腹痛谷), 유문혈(幽門穴)을 상쾌하게 두드렸다. 그리고 마침내 앞가슴의 신봉혈(神封穴)과 영허혈(靈墟穴)을 통과했다. 앞가슴 위쪽의 신장혈(神藏穴)을 통해 가슴 안쪽 깊은 곳을 두드렸다.

지쳐가던 심장이 그 자극에 호응하였다.

두쿵!

수혈이 시작된 뒤 처음으로, 병사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반격의 서막을 알리듯 심방과 심실을 쥐어짰다.

모처럼의 강력한 혈류가 심장을 떠나 대동맥을 일깨웠다. 경동맥을 내달렸다. 새로운 혈액의 흐름이 목줄기를 타고 대뇌에 이르렀다. 전신의 활력을 되살렸다.

그리고 마침내, 병사의 창백하던 안색에 홍조가 떠올랐다. 숨소리가 안정되었다. 차가워졌던 손발이 따뜻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딩동!

[당신의 긴급수혈을 받은 환자 : 랭스가 출혈성 쇼크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당신은 아스라한 심법을 활용한 새로운 개념의 수혈법을 창안하였습니다. 다만, 이는 오직 당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수혈법이며, 따라서 대중적으로 널리 퍼지지는 못할 것입니다.]

귓가에 울리는 상큼한 알림음. 덕분에 라키엘은 확신했다.

‘됐다!’

살렸다.

위험한 고비를 넘겼단다.

뒤늦은 안도감이 들었다. 병사의 용천혈에서 손을 떼었다. 한데 긴장하고 있다가 갑자기 안심을 해서일까. 혹은 아스라한 심법을 동원하느라 마나써클을 지나치게 사용한 탓일까. 그도 아니면 피를 제법 많이 흘려서일까.

“……어.”

별안간 현기증이 몰려왔다.

눈앞이 확 노랗게 물들었다.

다리가 풀렸을까. 세상이 낮아졌다. 궁둥짝에 둔한 충격도 느껴졌다. 이쪽을 향해 손을 뻗는 데미안. 무어라 다급하게 소리치는 가르딘 경의 모습도 보였다. 비로소 라키엘은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하. 또 무리했네.’

아직 약골인 주제에. 병약의 극치를 달리는 시한부 환자 주제에. 그런 주제도 모르고서 설치고 말았다. 덕분에 이렇게 혼절하고 있는 거겠지.

‘그래도 사람 하나 살렸으니까.’

이만하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겠다. 라키엘은 흐뭇한 마음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눈을 감았다. 귓가에 흐릿한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딩동…….

[당신은 자신의 혈액을 소모하여 타인을 살리는 극한의 이타적 행위를 실천하였습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당신의 치료를 통해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려던 사람이 회생하는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아스라한 심법과 써클 슬롯의 존재를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은 당신의 이러한 행위를 일종의 ‘성스러운 기적’으로 간주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명성이 한없이 드높아집니다…….]

‘하. 명성…….’

그거 좋지.

그 생각을 끝으로 의식의 끈을 놓았다. 세상이 어두워졌다. 완벽한 기절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라. 그것도, 왕국군의 일개 부상병 캠프에서?”

어둑한 실내. 호화로운 내부를 밝히는 촛불 하나.

앙부아즈 반란군의 수장, 쟈빌론은 고개를 들었다. 일렁이는 촛불 너머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를 굽어보았다. 왕국군의 동향을 보고하러 온 정보참모였다.

“그렇습니다, 주군.”

참모가 고개를 조아렸다.

“소식에 의하면 군의관 하나가 몸을 어루만지는 행위만으로 죽어가던 병사의 생명을 살렸다고 합니다.”

“어루만졌다고? 병사의 몸을?”

“예, 주군.”

“도구를 사용하진 않았고?”

“맨손이었노라 들었습니다.”

“흐음. 과장된 소문은 아닐까.”

“그것은 아닌 듯합니다.”

“근거는?”

“왕국군에 심어둔 첩자가 직접 그 모습을 목격하여 보고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쟈빌론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그의 눈동자에 짙은 관심이 배어났다.

‘흐음.’

단지 어루만지는 손길만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존재라. 확실히 성자라 불릴 수 있을 듯했다. 그 능력에 흥미가 생겨났다. 그 상징성에는 더더욱 큰 욕심이 배어났다.

‘만약, 그런 자가 내 휘하에 들어오면 어떤 일이 생겨날까.’

생각해 보니 더욱 탐이 났다.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야 그렇다 치고. 그런 성자가 나를 따르게 되면? 공개적으로 내 휘하에 합세하게 된다면? 왕국의 수많은 이들이 나와 내 군대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되겠지. 성자가 따르는 군대라고. 성자가 지지하는 군주라고. 그것만으로도 이번 내전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 것임이야.’

그의 계산이 깊어졌다.

부족한 정통성. 그것이 자신의 가장 커다란 약점이었다. 반란군의 세력이 성장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한데 만약, 성자라고 추앙받는 인물이 자신의 신하가 된다면? 반군에 합류한다면?

그 상징성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꽈악.

계산을 마친 쟈빌론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확신이 들었다.

“하면 이렇게 해보도록 할까.”

그가 정보참모를 굽어보며 말했다.

“왕국군에 심어둔 첩자를 통하여 그 성자라는 인물과 접촉하도록.”

“예? 접촉을…… 말입니까?”

“그래. 끌어들여야지. 내 휘하로. 그 어떤 값비싼 조건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명을 내리는 반란군 수장 쟈빌론. 그의 눈동자에 탐나는 인재를 향한 짙은 갈망의 빛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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