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21화 (121/468)

121화. 세상에 착한 성자는 없다 (1)

“그 어떤 값비싼 조건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반란군 수장, 쟈빌론은 웃었다. 그의 눈동자에 인재를 향한 갈망의 빛이 서렸다. 그것은 기회의 창을 엿본 전략가의 눈빛이기도 했다.

‘손길만으로도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성자라.’

사실 믿음이 가지는 않는다. 그 소문이 온전한 진실일 거라는 생각 또한 전혀 들지 않았다.

‘원래 소문이라는 것은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의술이 뛰어나다는 말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손길만으로 사람을 살렸다는 말은 명백한 과장일 것이다. 그런 동화 같은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분명 행운이든 우연이든, 혹은 속임수이든, 뭔가가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성자에 대해 생각하는 인식이지.’

과장된 허풍이라도 상관없다. 설령 속임수라 하여도 괜찮다.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했다. 그 성자를 지극히 존경하며 우러러본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하니 그자를 내 휘하에 두어야 할 것이야.’

그것만 성공하면 된다.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쟈빌론은 확신을 되새기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지지부진한 전황을 한 번에 뒤엎을 기회였다.

‘국왕 메로뱅거. 그자를 이대로 왕위에 앉혀둘 수는 없음이야. 그 늙은 여우의 딸인 아델린 또한 마찬가지. 마젠타노 제국과의 사소한 마찰이 생기자마자 냉큼 고개부터 숙이고는 왕족을 볼모로 보내는 그따위 나약한 핏줄이 이 위대한 왕국과 민족을 이끌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아암, 그렇고말고.’

앙부아즈는 결코 나약하지 않다. 우리 앙부안 민족은 훨씬 위대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지닌 저력을 제대로 떨치지 못하고 있음은 모두가 저 나약한 핏줄이 왕권을 독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격 없는 것들.

왕국과 민족의 수치.

저것들을 끌어내려야 한다.

그리하여야 왕국과 민족이 더욱 번영하며 그 역량과 자격에 걸맞은 지위를 누리게 될 것이다. 천세, 만세를 누리며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민족임을 대대손손 증명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그 초석을 놓아야 한다.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한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왕국군의 저항이 생각보다 훨씬 맹렬했다. 권좌에 기생하는 낡은 귀족 세력의 반발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이쪽의 명분이 빈약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까드득!

생각에 잠겨 있던 쟈빌론의 잇새에서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한낱 반란을 꿈꾸는 인간이 아니야. 이 왕국과 민족을 더욱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두기 위해 희생하고 노력하는 사람이야. 한데 저 멍청한 인간들은 그 진실을 모르지. 아무것도 모르고서 그저 눈앞의 작은 이득과 권리, 안정만을 꾀하고 있지.’

참으로 열등한 것들.

근시안적인 족속들.

낡은 구태의 한심한 것들을 떠올리자니 답답해졌다. 세상이 자신의 이상을, 순수한 열망을 몰라주는 것이 너무나도 원통했다.

더욱 큰 명분이 필요했다. 혹은 민중을 끌어들일 상징이 필요했다. 바로, 저런 성자와도 같은 인물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토록 우러름과 존경을 두루 받는 자가 내 휘하에 들어온다면…… 공개적으로 나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전황은 반드시 바뀔 것이야.’

확신이 들었다.

무식한 민중의 눈이 번쩍 뜨이게 될 것이다. 비로소 자신이 품은 원대한 이상에 관심을 보이게 될 것이다. 마침내 열광할 것이다. 앞다투어 혁명군에 지원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낡은 귀족들의 태도도 바뀌리라. 그들은 이득에 민감한 족속이니까. 이쪽이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는 것을 보는 순간, 이쪽이 대세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기꺼이 깃발을 바꾸어 이쪽에 동참할 것이다.

‘그러면 이 전쟁, 반드시 뒤엎을 수 있어. 승리를 거머쥐게 될 것이야.’

왕국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위대한 민족의 원래 지위를 온전히 누리게 될 것이다.

천세 만세.

영원히.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다.

‘설령 내 목숨을 바친다 하더라도. 혹은 그 성자에게 왕위를 내어주는 한이 있어도.’

굳이 자신이 권력을 쥐지 않아도 좋다.

이 왕국과 민족을 강성하게 키워줄 자라면, 설령 상대가 악마라 한들 기꺼이 권좌를 넘길 수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전에서 승리하고 싶었다. 자격 없는 나약한 것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 왕국과 민족에게 번영의 문을 활짝 열어주고 싶었다.

“……그러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라도, 그자를 끌어들이도록 하라.”

정보 참모를 바라보는 쟈빌론. 그의 두 눈이 숭고한 애국적 열망으로 이글거렸다.

“……그래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최고의 대우를 몽땅 보장할 테니, 반란군에 가담해 달라는 거지?”

“그렇소.”

“허. 참.”

이제 막 저녁 식사를 마친 시간. 방금 먹은 수프가 트림으로도 나오지 않은 시점. 자신의 단독숙소 천막으로 돌아온 라키엘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좀 쉬려고 했는데 이게 뭔 일이람.’

황당했다.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낸 터였다. 온종일 부상병들을 돌보고, 파견 온 군의관들에게 자운고 제조법을 가르쳤다. 그렇게 하드코어한 하루를 보낸 뒤의 피로를 풀어야 할 시간이었다.

한데 이런 난데없는 반란군 첩자의 노골적인 방문이라니. 심지어 첩자의 정체가 파견 온 군의관 중의 하나였다니. 라키엘은 살짝 가늘어진 가자미눈으로 첩자를 샐쭉하게 쳐다보았다.

“이봐?”

“듣고 있소.”

“혹시 저녁 식사 메뉴가 마음에 안 들었어?”

“아니오.”

“그럼, 챙겨 먹어야 할 약을 안 먹었어? 아님 안 먹어야 할 약을 먹었다거나?”

“그것도 물론 아니외다.”

“그럼 방금 했던 엄청난 말은 뭐야?”

확인차 물었다.

군의관, 아니, 첩자가 빼지도 않고 정색하며 대답했다.

“농담이 아니오. 엄연한 정식 제의외다. 왕국군은 썩었소. 이 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소. 그러니 우리에게 동참하시오. 내 주군께 충성을 맹세하시오. 그러면 최고의 명예와 영광이 주어질 것이외다. 물론 다소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놀라고 당혹스럽겠지만, 이건 엄연히 우리 주군의 뜻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일이오.”

“주군? 쟈빌론?”

“그렇소.”

“……너무 대놓고 노골적인데. 내가 지금 여기에 반란군의 첩자가 있다고 외치면 어쩌려고?”

“상관없소.”

“어째서?”

“당신이 외치면 내겐 두 가지 길이 남을 거요. 하나는 당신을 인질로 삼아 탈출을 시도하는 것. 하지만 그건 선택할 수 없소. 내 주군께서 당신을 최고의 귀빈으로 예우하라 특별히 명하셨으니까. 그러니 내겐 단 하나의 선택지만이 남을 것이오.”

“그게 뭔데?”

“순순히 체포되는 것이오.”

“그럼 잡혀가서 처형당할 텐데?”

“상관없소.”

“허.”

라키엘은 혀를 내둘렀다. 대꾸하는 투로 보아서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첩자의 말이 이어졌다.

“어차피 첩자가 나만 있는 것이 아니오. 내가 처형당하더라도 다른 이가 임무를 이어받을 테고, 다시 당신에게 접근하여 조건을 제시할 것이오. 당신을 휘하에 두고 싶다는 내 주군의 열망이 식을 때까지 말이오.”

“너무 질척거리는 거 아닌가.”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외다.”

“…….”

라키엘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듣고 있으면서도 잘 믿기지가 않았다.

반란군, 아니, 자칭 혁명군에 가담하란다. 혁명군의 수장 쟈빌론의 휘하에 들어오란다. 그럼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단다. 듣자마자 평소에 달팽이관 청소를 덜 해뒀나 싶은 생각이 드는 제안이었다.

‘쯧. 내 명성이 너무 높아져 버린 탓이겠지.’

문득 며칠 전, 이쪽에게 반발하던 샹드르 군의관이 일으켰던 사건이 떠올랐다. 수술 후 회복 중인 병사에게 제멋대로 사혈 요법을 썼던 사건이었다.

덕분에 난리가 났더랬다. 간신히 병사를 살렸다. 샹드르는 영창 신세가 되었고, 자신은 성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손만 대면 사람을 살린다는, 다소 부담스럽고 거창한 소문과 함께였다.

아무래도 그 소문 탓이겠지. 그래서 반란군 수장이 이쪽에게 군침을 흘리게 된 것이겠지.

‘흐음.’

원인을 추론하니 냉철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제안 앞의 황당함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덕분에 머릿속 계산기가 촥촥 돌아갔다.

예상되는 이득과 손해. 파생될 상황들. 적절한 출구전략까지. 그 끝에 방긋 웃는 결론은…….

‘……꼼꼼히 따져 보니까 이거, 나쁜 제안은 아닌데?’

아니, 좋은 제안이었다.

따져 볼수록 더더욱 그랬다.

일단 자신에게 손해가 될 일은 거의 없을 듯했다. 아니, 활용하기에 따라서 도움이 될 가능성이 느껴졌다. 개이득의 향연이 펼쳐질 각 또한 살포시 보였다.

라키엘은 첩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계산이 끝났다. 그러니 이제는? 확인의 시간이다.

“그럼 말이야. 내가 반란군에 가담하면 뭘 보장할 수 있는데?”

“……뭐요?”

“나한테 실제로 뭘 해줄 수 있느냐고.”

“어, 그건…….”

“방금 나한테 그랬잖아. 가담하라며. 휘하에 들어오면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며. 그런데 왜 구체적인 조건을 말하지 않느냔 거지. 영업 몰라? 이 사람 이거, 기본이 안 돼 있네.”

“…….”

뭘까.

지금 성자 군의관 이 사람, 뭐라는 거지?

첩자는 혼란에 휩싸였다. 솔직히 그는 오늘, 죽을 각오를 한 터였다. 상대는 성자라 불리는 군의관이었다. 그런 명망 높은 인물이 단 한 번의 제의로 깃발을 바꿀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은 그저 버려지는 패겠지. 자신을 통해 성자 군의관의 반응을 떠보려는 것이 주군의 의도겠지. 그 반응을 살펴보며 성자 군의관을 실제로 끌어들일 진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즉, 이제 곧 성자 군의관이 첩자가 있다며 외칠 거라고, 자신은 왕국군에 체포될 거라고, 처형당하게 되리라고,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만 여겼더랬다. 한데…… 성자 군의관이 이상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당황스러웠다.

‘…….’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당연히 거절당할 줄 알고 구체적인 조건 등의 대답은 준비하지도 못했는데. 아니, 아예 전달받은 사항 자체가 없는데. 그냥 최고의 대우와 명예를 보장한다는 말만 하면 된다고, 그 이상은 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들었는데.

‘뭐라고 해야 하지?’

라키엘의 전격적인 급발진 덕분이었다. 첩자는 대혼돈의 뇌정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동안 라키엘의 뻔뻔한 말이 깊은 산 속 옹달샘처럼 졸졸졸 이어졌다.

“하아. 영업을 하려면 말이야, 어? 이렇게 빈손으로 오는 건 좀 아니지, 이 사람아. 내가 영업 한두 번 받아본 줄 알아? 과일 바구니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요. 하다못해 박카ㅅ…… 아니, 시원한 음료라도 좀 가지고 오든가. 어?”

“…….”

“그리고 말이야. 기왕 말을 꺼냈으면 그렇게 멍 때리고 있으면 안 되지. 어필하고 싶은 장점 없어?”

“장점, 말이오?”

“어. 말해봐.”

“그, 그래도 되오?”

“그쪽이 먼저 제안을 꺼냈잖아?”

“하지만 나는 그저 명령을 받은 첩자일 뿐이라서…….”

“아 그러니까 조건 좀 들어보자고. 가능하면 구체적으로. 어?”

“…….”

성자 군의관 이 사람, 미쳤나 봐.

첩자는 조금 무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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