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적과의 동고동락 (2)
“……헉! 허억!”
한 남자가 호화로운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두 손 가득 서류철을 들고서, 온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렸다. 그의 표정에는 낭패의 감정만이 가득했다. 지각이다. 평범한 지각도 아니다. 남자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존재를 생각했다.
마젠타노의 황제.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
대륙 최강국의 지배자가 지각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다. 아니, 도사리고 있을 터다. 그 생각에 남자의 다리가 잠시 풀릴 뻔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응원하고 있을 토끼 같은 자식들과 불곰 같은 마누라를 떠올리며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았다. 더욱 열심히 서둘렀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황궁 가장 깊은 곳. 황제의 쉼터였다.
“……늦었군.”
나름 열심히 옷매무새를 고르며 들어서는데 곧바로 날아오는 한마디. 황제의 묵직한 목소리. 남자는 재차 다리가 풀릴 뻔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아니,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이 땅의 합당한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나이다. 보고를 위해 정시에 움직이려 하였으나, 때마침 추가로 들어온 정보가 있었기에 내용을 취합 및 정리하느라 죽을죄를 저질렀사옵니다.”
“추가로 들어온 정보라.”
“황태자 전하에 대한 내용이옵니다.”
“고하라.”
황제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남자, 제국의 정보사령 장관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황태자 라키엘을 살포시 원망해 보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태자 라키엘이 앙부아즈로 떠난 뒤부터였다. 그는 거의 매일 황제에게 들들 볶여야 했다. 황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황태자의 동향을 물었다.
황태자가 앙부아즈에 잘 도착하였느냐, 도착한 황태자는 누구를 만났느냐, 그 아이가 오늘은 어떤 일을 하였느냐, 아침은 잘 먹었느냐, 밤에 뒤척이진 않느냐, 환절기에 기침을 하진 않았느냐, 등등.
귀에 못이 박일 지경이었다. 이제는 ‘황’자 소리만 들어도 밤에 자다가 경기가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자신은 정보를 담당하는 최고 책임자였고, 상대는 고용주(?)이셨다. 까라면 까는 게 최선이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매일, 정기적으로, 같은 시간마다 황제의 면전에서 황태자의 동향 보고를 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제107차 정기보고를 드리옵나이다. 우선, 닷새 전에 황태자 전하가 앙부아즈 왕국군의 부상병 캠프, 일명 ‘힐링캠프’를 떠났사옵니다.”
“힐링캠프를 떠났다고? 그 녀석이?”
“그렇사옵니다, 폐하.”
“어찌하여?”
“저희도 처음 보고를 들었을 때는 황태자 전하의 목적을 짐작할 수가 없었사옵니다. 하여 추가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데에 시일이 걸렸던바, 마침내 내린 결론은…….”
“결론은?”
“전하가 곧, 황도 마젠타로 귀환할 듯하옵니다.”
“그래?”
황제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다만, 그의 솔직한(?) 상체는 어느새 살짝 앞으로 기울여져 있었다.
정보사령 장관의 보고가 이어졌다.
“그렇사옵니다. 힐링캠프에 심어 둔 특급 정보원들의 보고에 따르자면, 지금으로부터 이레 전의 시점에 황태자 전하가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고 하였사옵니다. 그것이 전하의 귀환을 추측하는 근거이옵니다.”
“전서구가 근거라. 어떠한 경위로?”
“전서구를 입수하였사옵니다. 티가 전혀 나지 않을 방법으로 전서구의 서신을 열어 내용을 확인하고, 다시 밀봉을 하여 원래의 목적지로 날려 보냈사옵니다.”
“그래, 누구에게 어떤 내용으로 보내는 서신이었는가.”
“앙부아즈 왕녀에게 보내는 작별의 서신이었사옵니다.”
“작별?”
“그러하옵니다, 폐하.”
“보다 자세히.”
“예, 폐하. 전하가 앙부아즈 왕녀에게 당부하길, 이제 자신이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모두 끝난 듯하며, 따라서 별궁 한의원으로 돌아갈 때가 된 듯하노라 하였사옵니다. 거기에 아울러, 대형 오크통에 담가둔 베스파로스 여왕벌술을 별궁으로 꼭 배송해달라는 당부도 덧붙어 있었사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예, 폐하. 금일의 보고는 여기까지이옵니다.”
“그렇군. 물러가도록.”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보고를 마친 정보사령 장관이 물러났다. 어느새 홀로 남은 황제는 침묵에 잠겼다. 방금 들은 보고 내용을 떠올리며 근엄하게 턱을 괴었다.
그리고 슬며시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웃어도 되겠다.
“……흐흠, 흐흠흠.”
무성한 수염 속에서 어느새 하늘로 승천하는 그의 입꼬리!
‘이제 매일 걱정에 휩싸여 잠을 뒤척이는 나날도 안녕이로구나.’
황제는 진심으로 기뻤다. 아들이 온단다. 전쟁터로 떠났던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단다. 그 단순한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걸치고 있는 옷이 주렁주렁한 장식으로 거추장스럽지만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였다.
사실은 그동안 너무나 걱정이 되었던 터였다. 보낼 때는 자신이 이럴 줄은 몰랐다. 그저 첫째가 귀중한 경험을 쌓을 수 있겠거니 싶었다. 한데 막상 보내 놓으니 뜻밖의 기분이 들었다. 며칠간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다. 잠깐 선잠이라도 들라치면 어김없이 악몽을 꾸었다. 첫째가 사고를 당하는 등등의 흉흉한 꿈이었다.
불안했다. 뭘 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노심초사의 나날이었다.
그런데 첫째가 온단다.
가슴이 벅찼다. 입꼬리가 주책스럽게 계속 말려 올라갔다.
“흐흠, 흠흠흠.”
하지만 지금은 웃자. 녀석이 돌아오면 지금처럼 기쁜 티를 내진 못할 터이니. 녀석을 위해서라도 엄한 얼굴을 유지하여야 할 터이니. 지금 이렇게라도 미리, 몰래, 많이 기뻐해 두어야겠다.
‘그러니 하루바삐 돌아오너라. 이 아비에게 무사한 모습을 보여 주거라. 어서.’
권좌에 도사린 황제의 근엄한 어깨가 두근두근 설렘의 바이브를 싣고서 남몰래 들썩거렸다.
♣
“흐흐, 후흐흐.”
아침이 밝아왔다.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사골육수처럼 짙은 현자 타임을 느끼며 어깨를 들썩였다. 한편으로 생각했다. 아, 내가 어쩌다가 반란군 수장 놈의 주치의가 되어 버렸나, 라고.
‘인생 진짜.’
사람 일 모른다더니.
살다살다 졸지에 적이라 여겼던 자의 주치의가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이른 아침부터 방긋방긋한 미소를 지으며 그 인간을 깨워야 하는 순간이 올 줄도 몰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살려면 해야지.
“에휴. 내 팔자야.”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이제 일어나셨소?”
바로 옆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언제 다가온 걸까. 기척 같은 것도 없었는데.
“……뜨릡!”
너무나 놀란 까닭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기이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런 후에야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이른 아침부터 내가 주치의를 놀래켜드렸군.”
“…….”
반란군 수장, 쟈빌론이었다. 그가 특유의 서늘하고도 정중한 미소를 지었다.
“어땠소?”
“예에?”
“잠자리 말이오. 불편하진 않았소?”
“……예? 아, 조금.”
“조금?”
“괜찮았습니다?”
“다행이군.”
피식, 그가 또 웃었다.
“그대는 나와 다르군. 나는 잠자리가 바뀌면 영 뒤척이는 편이라서.”
“그, 그렇습니까?”
“으음. 하여 걱정이었소. 모처럼 제공한 새 숙소의 잠자리가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 하여서.”
“…….”
대놓고 이렇게 마음 써주는 걸 고맙다고 여겨야 하나. 그런데 쟈빌론이라는 이 인간, 항상 정중하게 웃는 듯하지만 눈동자만큼은 아니다. 잘 보면 눈빛만은 언제나 시릴 정도로 형형하게 가라앉아 있다.
아무런 웃음기도 없이. 그 어떤 일말의 감정조차 없이. 마치, 사냥감을 탐색하는 늑대처럼.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아침 진찰을 하겠습니다.”
라키엘은 목구멍으로 넘어가려던 마른침을 얼른 붙잡았다. 잠깐 둘 사이에 깔리려던 어색함을 황급히 걷어내듯, 주치의가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한데 쟈빌론의 반응은 뜻밖의 것이었다.
“아니, 그대는 그럴 필요 없소.”
“예에?”
“진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오.”
“하지만…….”
“나는 소드마스터요. 그 사실은 그대도 익히 알고 있겠지.”
“예.”
“그래서외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아오. 가장 미약하고 사소한 마나의 흐름에서부터 근육과 혈관 사이의 순환, 균형, 조화까지. 끝없는 마나의 순환을 이루어낸 자의 특권이랄까.”
“그, 그렇습니까.”
“그렇지.”
“한데 그럼 어째서 저를 주치의로 삼으신 건지.”
“궁금하오?”
이야기를 나누는 잠깐 사이에 당번병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침상이 순식간에 차려졌다. 한데 식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그의 앞에는 냉수 한 잔만이 놓였다. 반대로 이쪽의 앞에는 빵 두 덩이와 달걀 프라이 접시가 놓였다.
쟈빌론이 자신의 냉수를 집었다. 마치 건배를 하듯, 잔을 들어 올렸다.
“내가 그대에게 어제 이르지 않았소. 내 곁에 24시간 머무르라고. 내 이상과 목적,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보고, 느끼라고 말이오.”
그러고는 벌컥.
한 모금 냉수로 식사를 마쳤다. 이내 턱짓으로 이쪽의 앞에 놓인 접시를 가리켰다.
“드시오. 기다려 줄 터이니.”
“아, 예…….”
부담스럽다.
미치도록 부담스럽다.
자신은 정작 냉수 한 컵 원샷으로 아침 식사를 넘겨놓고선. 이쪽이 빵이며 달걀 프라이 먹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다니. 노골적이라 말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대놓고 쳐다보는 시선이었다. 체할 것 같았다.
‘이거 좀, 비매너 아닌가?’
하지만 대놓고 따질 수는 없었다. 이곳은 그의 소굴이고, 그는 소드마스터다. 마검황의 주인공인 데미안조차도 제법 성장하기 전에는 이자와의 정면 대결에서 버티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 이자의 비위를 함부로 거슬렀다간?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생존을 위한 진심(?)을 담아 포크를 들었다. 보란 듯이 일부러 더욱 복스럽게 빵과 달걀 프라이를 뜯어먹었다. 시선도 접시와 음식에만 고정시켰다. 괜히 먹다가 저 인간과 눈이 마주쳤다간 진짜로 체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움, 쩝쩝, 쯔접접. 빵이 굉장히, 쩝쩝, 달달하군요.”
“…….”
“후루룩, 와구와구. 달걀도 제법 든든하고 말입니다.”
“…….”
“벌컥벌컥, 크야아. 물도 이렇게 상큼할지는 몰랐습니다.”
“그럴 수밖에. 달달하고, 든든하고, 상큼할 수밖에. 바로 어젯밤 인근의 농장을 약탈하고 불태워서 가져온 재료로 만든 음식이니 말이오.”
“……푸읍!”
마시던 물을 뿜고 말았다. 쟈빌론의 상의까지 물이 튀어 버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쟈빌론의 안색은 태연했다. 그가 말했다.
“놀랄 것 없소.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소. 주제도 모르고서 왕국군에 몰래 물자를 대던 농장이오. 응징의 차원에서 모든 가축을 도살하고 곡식을 징발했지. 농가와 창고는 모두 불태웠고.”
“그, 그럼 사람은…….”
“궁금하시오?”
“…….”
내가 마른침을 삼키지 않았기를. 목울대가 출렁이지 않았기를 빈다.
쟈빌론의 입가에 냉소가 걸렸다.
“농장주 말이오? 산 채로 태웠소. 위대해질 왕국과 민족의 미래를 거역하고 낡은 구태의 찌꺼기에 들러붙은 자에게 어울리는 초라한 비명과 함께였지.”
“…….”
“왜 그러오? 입맛이 달아나셨소?”
물론이다.
조금 전까지 열심히 먹고 있던 빵과 달걀에 어제 산 채로 타죽은 농장주의 정성과 노력이 들어 있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속의 것을 게워내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쟈빌론은 이쪽에게 역겨워할 틈도 주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여졌다. 탁자를 넘어 이쪽을 지그시, 빤히 쳐다보았다.
눈을 피할 수가 없다.
그가 말했다.
“리한 군의관?”
“예.”
“식사를 이어갈 생각이 없다면, 내 질문에 대답을 해 주실 수 있겠소?”
“어떤 질문입니까.”
“간단한 질문이오.”
“…….”
어, 이거.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인데.
이쪽을 향해 한쪽 입꼬리만 슬며시 말아 올리는 쟈빌론. 그 모습을 보며 라키엘은 문득 생각했다. 이거 익숙한 장면이라고. 낯설지가 않다고. 어째서? 어디에서 봤지?
답은 곧 떠올랐다.
‘소설 마검황.’
그걸 떠올리는 순간.
쟈빌론의 입이 열렸다.
“내 하나 물으리다. 만약 리한 군의관이 말이오. 조국과 민족을 더욱 위대하게 부흥시키기 위해 한 가지 선택을 해야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
이 질문, 소설에서 본 적이 있는데.
“한 가지 선택은 군의관 본인이 어떤 형태로든 희생하는 길이오. 하지만 그건 단순한 희생이 아닐 거요. 거룩한 희생 또한 아닐 것이오. 가장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요. 본인뿐만이 아닌, 가족마저도 비참한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거요. 심지어 대대손손 후세의 모욕과 손가락질을 받게 될 거요. 영원히.”
“…….”
“다른 선택은 남을 희생시키는 길이오. 대략 수만 명 이상을 생매장하듯 학살하는 길이오. 하지만 그 일에 대한 추궁이나 죗값은 지지 않아도 될 것이오. 아니, 오히려 과감한 결단을 내린 영웅으로 대대손손 존경을 받게 될 거요. 이 또한 영원히.”
“…….”
“둘 모두, 실행하기만 하면 조국과 민족을 번영의 길로 이끌게 될 것이오.”
“…….”
“하면 리한 군의관? 그대는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소?”
어느새 쟈빌론의 얼굴엔 조금의 웃음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노골적인 눈빛으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를 마주 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어 있었다. 쟈빌론의 물음에 대한 답을 궁리하느라고? 물론 아니었다.
‘나는 이미…… 저 질문의 정답을 알고 있으니까.’
문득, 소설 속의 내용이 떠올랐다. 소설에서 몇 번인가, 쟈빌론이 저 질문을 입에 담는 장면이 있었다. 그러니까 저 질문은, 일종의 사람을 평가하는 쟈빌론만의 은밀한 잣대였다.
‘쟈빌론. 그는 의심이 많았어. 측근이라도 쉽게 믿지 않았어.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 두어야 할 사람을 발견했을 때, 반드시 저 질문을 던졌지. 어떤 대답을 하는지에 따라 판단을 하려고.’
하지만 그에게 정답을 말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심지어 쟈빌론 본인조차도 정답이 무엇인지 몰랐다. 스스로도 평생 정답을 찾아 고민하고 방황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스스로 답을 떠올렸다. 자기 자신을 향한 허탈한 냉소를 머금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나는 저 질문의 대답을 안다.
“왜 대답이 없으시오? 아직도 고민 중이시오?”
“…….”
귓가에 들려오는 쟈빌론의 목소리.
어느샌가 이쪽을 보는 그의 시선이 가느다랗게 변해 있었다. 위험한 징후다. 저 눈빛의 뜻 또한 나는 안다.
‘그는 자신이 한 질문의 정답을 몰랐지만, 적어도 최악의 오답은 알고 있었지.’
그건 바로 아무 선택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두 가지 길 사이에서 우물쭈물 망설이는 것이었다. 측근으로 두리라 마음먹었던 상대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 그는 지극히 냉혹하게 돌변했다.
즉, 현장에서 목을 베어 버렸다.
그 모습들을 떠올리자 마음이 정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도 찾지 못한 채 갈구하던 정답을 들었을 때 쟈빌론이 보일 반응이 기대되기도 했다.
물론, 정답을 말했을 때 이쪽이 해를 입을 확률이 제로라는 확신 또한 들었다.
“설마,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오?”
한결, 더욱 가늘어지는 쟈빌론의 눈매. 가느다랗게 뜨인 눈꺼풀 사이로 엇비치는 눈동자가 파충류의 그것처럼 번득이려 하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라키엘은 망설임을 던졌다.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자신을 희생하고 오욕을 덮어쓰거나, 수많은 타인을 학살하여 명예를 챙기거나, 둘 중의 하나가 있어야만 거룩해지는 나라 말입니까?”
“그렇소.”
쟈빌론이 입술만으로 웃었다. 그의 눈가에 기대감이 서렸다. 그 눈을 마주 보며, 라키엘은 소설 속에 나왔던 저 질문의 정답을 입에 담았다.
토씨 하나 거르지 않고서.
날것 그대로.
“x랄. 그게 나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