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전문가의 손길 (1)
딩동!
귓가에 울리는 알림음.
동시에 떠오르는 종합검진표.
‘어……?’
그것은 문득 든 호기심에 진맥을 해본 쟈빌론의 종합검진표였다.
동시에, 소설 마검황에선 언급된 적이 없었던 쟈빌론의 사소하고도 비밀스러운 약점을 보여주는 결과물이기도 했다.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쟈빌론 플랑베르 앙부아즈]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37세]
[신장 : 193.4 Cm]
[체중 : 91.9 Kg]
[혈액형 : Rh+ AB]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쟈빌론의 건장하기 짝이 없는 신체 스펙이었다. 심폐기능, 소화기 등등의 오장육부 점수도 만점에 가까웠다.
저런 피지컬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검술과 마나 심법까지 갖췄을 테니, 가히 괴물이라 부를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겉으로 드러난 쟈빌론의 화려한 스펙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더 아래쪽에 떠오른 ‘종합 소견’에 꽂히듯 머물러 있었다.
그곳에 쟈빌론이 지닌 의외의 약점이 적혀 있는 까닭이었다.
[종합 소견 : 신체의 모든 부분이 지극히 조화롭고 건강합니다. 대사조절 기능, 면역력 등의 모든 항목에서 최적의 상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심각한 수준의 만성 신경성 편두통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정서적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적절한 휴식과 안정이 필요합니다. 만약 그럼에도 계속하여 나쁜 예후가 이어질 시에는 과감한 퇴사를 권장합니다.]
“…….”
그래.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에는 퇴사가 직빵이긴 하지.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심각한 수준의 만성 신경성 편두통?’
소설 마검황에서는 한 번도 언급이 없던 부분이었다. 천하의 군국주의자, 광신적 애국주의자 쟈빌론이 만성 편두통 환자였다니.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쟈빌론의 안색 또한 그랬다. 평온했다. 아니, 무표정하기만 했다.
‘하지만 진맥 스킬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스킬을 믿었다. 진맥 스킬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게다가 오장육부마저도 똑같은 진단을 내려주고 있었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쟈빌론의 오장육부를 부러워……하려다가 말았습니다.]
[심장 : 어이 주인? 지금 검진 대상 누구야? 심폐기능 쩌는데?]
[허파 : 허어…… 파학…….]
[대장 : 허파 형님이 저쪽 허파 폐활량 보다가 현타 왔지 말입니다.]
[간장 : 저쪽 간수치도 장난 아님ㅋ 와 나 보자마자 반할 뻔.]
[위장 : 그래도 저쪽 위장은 좀 불행하네ㅎ 맨날 시달리면서 사는구만.]
[간장 : 위? 튼튼해 보이는데?]
[위장 : 겉보기는 그렇지. 사실은 지금도 갈굼당하고 있거든. 대뇌한테. 신경성 편두통 때문이라나 뭐라나. 내가 저렇게 살았으면 하루 만에 탈주각 세웠을 듯ㅋㅋ]
“…….”
라키엘은 오장육부의 진단 소견을 경청(?)했다. 위장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짚이는 곳이 있었다.
‘그래. 편두통이 신경성 소화불량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지. 특히 위장에 부담이 가해지는 경우가 많아.’
한국에서도 그런 케이스를 숱하게 보았다. 한의원에 찾아오던 환자들 중에도 무수히 많았다.
특히, 습관적 소화불량으로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맥해보면 신경성 편두통이 원인인 경우가 제법 되었다.
쟈빌론도 그런 케이스인 듯했다.
문득 확인을 해보고 싶어졌다.
“저기, 혹시 말입니다. 머리가 아프진 않으십니까?”
“…….”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쟈빌론. 눈매가 살짝 커져 있었다. 놀란 걸까, 혹은 빡친 걸까. 헷갈렸다.
그 꿰뚫을 듯한 눈빛을 마주하자니 잠깐 후회가 들었다. 괜히 물어봤나. 그냥 모른 척할 것을 그랬나.
하지만 그런 걱정도 잠시. 쟈빌론의 한쪽 입매가 말려 올라갔다.
“아프긴 아프지. 항상 아프오. 발루아 요새를 어떻게 깨뜨릴지 고민을 하며 지내느라.”
“…….”
그런 종류의 두통이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말 돌리려고 애쓰는 거 같은데.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데 그런 기분이 이쪽의 눈빛에도 실렸던 걸까.
이쪽을 보는 쟈빌론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커흠! 흠!”
“얼굴이 좀, 빨개지셨습니다?”
“흠흠! 그럴 리가.”
“진짭니다.”
“잠깐 기침이 나와서 그렇소. 목이 칼칼해져서.”
“역시 환절기란 거겠지요?”
“물론이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셨는데.”
“그대의 말처럼 역시 환절기라서. 올해는 환절기가 참 이상하오, 참.”
“그렇지요. 환절기가 잘못했군요. 역시나 그런 거겠지요.”
“…….”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죠.”
“……설마, 눈치를 챈 거요?”
“보시다시피 말입니다.”
물론이다. 진맥 스킬은 장난이 아니니까. 나름 발뺌을 해 보려던 쟈빌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허, 참. 그대가 성자라 불리는 이유가 내내 궁금하였는데. 그 궁금증을 이런 방식으로 풀게 될 줄은 몰랐소. 그대가 내 아픈 곳을 단번에 짚어 낼 줄은 더더욱 몰랐고.”
“만성 두통에 시달리시는 게 맞군요.”
“그렇소.”
쟈빌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머리가 아프오. 항상 아프지. 편두통이라고 해야 할까. 이걸 어떻게 맞춘 거요? 아무에게도 밝힌 적 없는 사실인데.”
“그냥, 느껴졌습니다.”
“그냥?”
“예.”
“허허. 후우. 이건 추궁도 못 하겠군.”
쟈빌론은 웃고 말았다. 신기했다.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온종일, 24시간 자신의 머리를 쥐어짜는 편두통이었다.
이제는 숨 쉬듯이 자연스러워진 고통이었다. 물론 누구에게도 이걸 밝힌 적이 없었다. 자칫 적에게 약점으로 악용될 수 있을 테니까.
한데 그런 자신만의 비밀을 단 한 번의 진찰로 맞히다니.
‘정말로 그냥 느꼈다는 건가.’
솔직히 처음엔 믿기지가 않았다. 넘겨짚은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성자 군의관의 눈을 빤히 마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이자가 정말로 자신의 증상을 확인하고서 진단을 내린 것이구나, 라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한 군의관, 그대의 진단이 맞소. 머리가 아프오. 그냥 아픈 정도가 아니오. 깨질 듯이 아프지. 숨만 쉬어도 송곳으로 머릿속을 쑤시고 휘젓는 것만 같소. 지금도 그러오. 이렇게, 머리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반대쪽 머리까지 소름이 돋도록 아프지.”
톡톡, 그가 자신의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라키엘이 물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아팠던 겁니까?”
“나도 모르오.”
쟈빌론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자조적으로 변했다.
“정말이오. 나도 모르오. 처음부터 계속 아팠으니까.”
“설마, 아주 어릴 때부터 말입니까?”
“그렇소. 내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나는 아팠소. 덕분에 언제나 신경질을 부려야 했지. 그러다가 우연히 미술을 접하게 되었고.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잠시나마 마음이 편안해지더군. 그래서였소. 화가가 되고 싶었던 것은.”
“하지만 그 꿈이 좌절되었다고…….”
“맞소. 아버지에 의해서. 그 어떤 예술학교도 나를 받아주지 않게 되었지. 그렇게 강제로 붓을 꺾고 검을 잡아야 했소.”
“그래도 두통은 계속 있었습니까.”
“물론.”
쟈빌론이 재차 피식 웃었다.
“어떤 짓을 해도 결국엔 이 통증을 떨쳐낼 수는 없었소. 그래서였지. 검에 미친 듯이 몰두한 것은. 한 가지를 깨달은 덕분이었달까.”
“깨달았다니요?”
“검이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굉장히 유용한 도구라는 걸 깨달았지.”
“……설마.”
“맞소. 문득 억울해지더군. 왜 나만 이렇게 아파야 하는지. 끝없는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는지. 그래서였소. 내 고통을 없앨 수 없다면, 남도 똑같이 아프게 만들어주면 어떨까 하고 말이오. 그러면 마음속의 억울함이 조금은 덜어질 것 같아서.”
“위안이 되었습니까?”
“별로.”
쟈빌론이 쓰리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린 치기에 그런 생각을 품긴 했었는데, 막상 강해지고 보니 딱히 그렇진 않더이다. 뭐, 어쨌건 그런 비틀린 치기와 독기로나마 남들보다 검에 미친 듯이 몰두할 수 있었고, 남들보다 빠르게 지금의 경지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점은 나쁘지 않았노라 말해 볼 수 있겠소.”
“…….”
중2병(?)을 악과 깡의 원동력으로 삼아 소드마스터가 된 남자라. 라키엘은 뭔가 엄청나다는 기분을 느꼈다.
동시에 더욱 궁금해졌다. 쟈빌론이 앓는 두통에 대한 이야기, 이런 자세한 개인사는 소설 마검황에 나온 적이 없었으니까.
조금은 신기했다.
하여 물었다.
“그럼, 그림과 검술 같은 것들 말고 말입니다. 근본적인 두통 치료를 해 본 적은 없으신 겁니까?”
“왜 없었겠소.”
쟈빌론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두통에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먹어 보았소. 약초부터 시작하여 독극물까지 마셔 보았소. 그 외에도 온갖 수면요법, 명상, 동방 대륙의 기이한 체조까지. 세상에 알려진 수단은 모조리 다 동원해 보았소. 그러나 결과는 보시다시피.”
“모두 실패하셨군요.”
“그렇소. 덤으로 허접한 약의 복용을 권유한 의사들의 목숨도 여럿 사라졌고.”
“…….”
꿀꺽, 저도 모르게 목울대가 출렁거렸다. 쟈빌론이 자신의 실언(?)을 깨달았는지 얼른 이쪽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날려 보냈다.
“아, 하지만 너무 두려워하지는 마시오. 그대의 목은 몸통 위에 붙어 있을 때가 내게 훨씬 소중하니까.”
“가, 감사합니다?”
“천만의 말씀을.”
“…….”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건 비단 나만의 착각일까. 라키엘은 무의식중에 목을 움츠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머릿속에서 뭔가 새로운 생각이 살랑살랑 싹을 틔우는 것을 느꼈다.
‘이거, 뭔가…….’
각이 보였다.
소설 마검황에서는 나오지도 않았던 쟈빌론의 심각한 만성 두통. 그 속에 얽힌 사연과 그만의 고충. 그걸 다 들은 덕분이었다.
쟈빌론의 두통을 이용해서 이곳을 탈출할 각이 보였다! 잘만 하면 황도의 별궁으로 안전하게 빤쓰런(?)을 감행할 수 있을 듯했다!
‘……가능해. 된다. 성공 확률이 충분히 있어.’
라키엘의 대뇌피질이 쌩쌩 돌아갔다. 수많은 시나리오와 가능성을 검토했다. 간을 보고, 각을 가늠했다. 그런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이건 된다고.
확실하다고.
해볼 만하다고.
“그럼 말입니다.”
라키엘이 입을 열었다. 움츠러들었던 그의 목은 어느새 시원하게 펴져 있었다.
어깨도 당당하게 펼쳐졌다. 눈매는 확신의 도전적인 번득거림을 품었다.
“그 두통, 제가 없애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뭐요?”
이런 물음을 예상하진 못했던 걸까. 쟈빌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안 된다는 투였다.
“그대가? 내 두통을?”
“예.”
“하지만 내가 말하였을 터인데. 어떤 약이나 요법으로도 내 두통을 지울 순 없었노라고.”
“예. 분명히 들었습니다.”
“한데 무슨 수로?”
“다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자신 있게 했던 의사들은 다 죽었는데.”
“그럼 전 자신 없게 말하겠습니다. 일단 시도는 해 보고, 실패해도 절 죽이지는 말아 주시죠.”
“시도 자체가 아름답다는 따위의 변명은 아니겠지?”
“죽기는 싫으니까요.”
“……좋소.”
쟈빌론이 피식 웃었다.
물론 성자 군의관을 죽일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그냥, 저렇게까지 말하니 허락이라도 해 주자 싶었다. 해서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그러려니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조금도 기대되지 않으니까. 성공할 거란 생각은 들지도 않으니까.
‘실패하면 무안하지 않도록 위로나 해 줘야겠군.’
쟈빌론은 내심 쓴웃음을 삼켰다. 앙부아즈 전역에 명성이 자자한 성자 군의관. 그만큼 자신의 의술에 자부심이 대단할 터다.
그러니 모든 의사가 고배를 마신 자신의 두통을 다스리겠노라 호언장담을 하는 것이겠지.
그만큼 치료에 실패하면 자부심에 상처를 입을 터다. 실패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여 당황할지도 모른다.
그땐 위로를 해주자.
쟈빌론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라키엘이 시키는 대로 힘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라키엘이 하는 치료를 지켜보았다.
“그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약을 쓰지 않는 거요?”
“예.”
“그럼 도구는?”
“이거면 충분합니다.”
라키엘이 대답하며 들어 올린 것은…… 그냥 맨손이었다.
“…….”
그걸 보자 더더욱 기대감이 수직으로 하락했다. 하지만 쟈빌론은 잠자코 있었다. 괜히 실망한 티를 내어서 상처를 줄까 봐서였다.
그사이, 라키엘의 손이 다가왔다. 정수리를 짚어왔다. 그때까진 뭘 하는 건가 싶었다. 설마 정수리를 마사지라도 하려는 건가 싶기도 했다.
한데 다음 순간.
쓰담쓰담?
그 손이 자신의 정수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무, 슨?’
쟈빌론은 당황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어째서 성자 군의관이 다짜고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건지. 왜 그 손길이 마치 강아지 머리 만지는 듯한 느낌인지. 이 상황 자체가 조금도 이해가 안 됐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요?”
“쉿.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
대체 뭘까.
이따위로 두통을 치료한다고? 평생 나를 고통의 수레바퀴에 짓이겨 넣은 끔찍한 두통을 없애주겠다고? 겨우, 이따위 장난 같은 짓거리로?
“지금 나를 뭘로 보고…….”
쟈빌론은 저도 모르게 살의를 느꼈다. 고개를 들었다.
무감정해진 눈으로 성자 군의관을 쳐다보았다. 벨까. 아니면 목을 부러뜨릴까. 어떻게 죽이지?
그의 머릿속을 살기가 가득 채우기 직전.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야아악소온↗ 에헤이야~”
라키엘이 괴상한(?) 노랫가락을 불러 젖히기 시작했다. 내 손은 약손 스킬이 발동되었다.
그 순간, 쟈빌론을 괴롭히던 극악의 두통이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추며 싹 날아갔다.
“……!”
엄마 뱃속을 벗어난 지 어언 37년.
처음으로 겪어보는 상콤함이 쟈빌론의 두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