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전문가의 손길 (2)
‘……어, 어머니!’
쟈빌론 플랑베르 앙부아즈.
왕가의 방계 혈족으로 태어난 야심가. 평생을 악성 두통에 시달려온 광신적 애국자. 그가 두 눈을 부릅떴다.
엄마 뱃속을 벗어난 지 어언 37년의 인생, 그동안 처음으로 맛보는 해방감을 온몸으로 느꼈다.
머릿속부터 척추를 거쳐 꼬리뼈 끝자락까지 모든 신경이 활처럼 휘었다.
전신의 세포가 7옥타브 세레나데를 메들리로 불러제꼈다. 혈관 속에서는 적혈구와 백혈구가 손에 손잡고 탭댄스를 추었다.
한마디로…… 상쾌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무슨. 이게 무슨.’
쟈빌론은 부릅뜬 눈을 치켜들었다. 이쪽으로 손을 뻗고 있는 적발의 통통한 사내가 보였다.
성자 군의관이었다. 그가 괴상한 노래를 찰지게 부르며 이쪽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딱히 성스럽거나 성의 가득한 손길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어설픈 손길이었다.
그냥 동네에서 마주친 똥개 머리를 쓰다듬는 듯한, 딱 그 정도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은근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프지 않았다. 두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신에서 천상의 상큼한 해방감이 대천사의 날갯짓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대체 이건…… 어떻게…… 한 거요?”
믿어지지가 않았다.
기쁨 속에서도 의구심이 쑴펑쑴펑 솟구쳤다. 도저히 물어보지 않고는 배겨날 도리가 없었다.
한데 이쪽의 떠듬떠듬거리는 물음을 받은 성자 군의관이 알 수 없을 미소를 지었다.
“쉿.”
여유롭게 손가락을 세우는 몸짓. 그리고 다시 불러 젖히는 괴상한 노래. 이쪽의 머리를 쉴 새 없이 쓰다듬는 손길까지.
‘아…….’
이게 바로 전문가의 손길이구나. 쟈빌론은 온몸으로 실감했다. 그러한 실감은 치료(?)가 끝난 후에도 여전했다.
“어떠십니까?”
“…….”
“혹시 두통, 느껴지십니까?”
“…….”
멍하니 성자 군의관을 마주 보았다. 자신이 고개를 내저은 걸까.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성자 군의관이 보람찬 미소를 짓는 것을 보면 말이다.
“효과가 있었군요.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다행입니다.”
“다행…….”
“예. 어떻습니까, 언제나 느끼던 두통이 없어지신 기분은?”
“……모르겠소.”
“예?”
“그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이상하오.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하고, 또…….”
“또?”
“……왜 눈물이 나지?”
주르륵.
쟈빌론의 눈가에서 흘러넘친 눈물이 볼을 가로질렀다. 입가를 지나 턱에 방울 맺혔다.
하지만 쟈빌론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처음엔 멍하다가, 이내 웃었다. 울면서 웃었다. 엉덩이에 뿔이 나건 말건 그런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좋소. 이런 기분은 처음이오. 무슨 이런…… 하하, 하하하.”
“잘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아니, 축하는 됐소. 고맙소. 설마, 설마 그대가 정말로 내 두통을 없애는 데에 성공할 줄이야.”
쟈빌론이 손을 뻗었다. 라키엘의 손을 뜨겁게 잡았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솔직히 아직은 얼떨떨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기쁘고 행복했다.
라키엘이 대답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아직은 마음을 놓기엔 이릅니다. 아마 제가 해 드린 치료는 효력이 하루밖에 가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뭐요?”
그게 무슨 말이야.
하루?
그게 지나면 효력이 없어진다고? 그러니까, 내가 다시 아파질 거라고?
“두통이 살아나게 될 거란 말이오? 내일이 되면?”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
“하지만 실망하실 것까진 없습니다.”
“어째서요?”
쟈빌론이 철렁 내려앉으려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재촉하듯 물었다. 반대로 라키엘의 입가엔 여유로운 미소가 맺혔다.
“내일 다시 치료를 받으면 되니까 말입니다.”
“……아.”
“그러니까 앞으론 이렇게 해보도록 하죠. 매일 아침마다 제 두통 치료로 하루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럼, 다음 날 아침이 오기 전까진 두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거요?”
“물론이지요. 늦잠을 주무셔서 아침 치료를 빼먹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건 자신 있소. 나는 평생 늦잠을 자 본 적이 없는 사람이오.”
“예. 성실한 분이심은 알고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허허. 후후후! 그렇지. 다행. 다행이야. 그렇고말고. 하하하. 하하핫!”
쟈빌론의 입에서 시원한 웃음이 터졌다. 잠깐 철렁했던 가슴이 원위치(?)로 돌아왔다.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렇다. 성자 군의관의 말대로다. 하루에 한 번, 아침마다 치료를 받으면 된다. 그러면 아플 일이 없다.
“그럼, 내일도 잘 부탁하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라키엘의 얼굴에도 흡족한 미소가 잔뜩 맺혔다. 단순히 치료에 성공을 해서? 물론 아니었다. 그가 기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래, 그렇게 날 신뢰해라. 내 치료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려라!’
처음부터 이걸 노린 치료였다. 자신을 더욱 신뢰하게 만드는 것. 더 나아가 자신에게 매달리게 하는 것. 그렇게만 만들면?
‘빤쓰런, 충분히 가능해질 거야.’
하루빨리 별궁 한의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소설 마검황의 중반까지를 담당했던 최강 최악의 빌런인 쟈빌론과 졸지에 24시간 합숙 신세라니,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러자면 안전하게 도망쳐야 한다. 이곳에서 탈출해야 한다. 오직 그것만을 목표로 라키엘은 매일 아침 분투(?)했다.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소온!”
“……후우.”
“어떻습니까?”
“고맙소. 두통이 싹 가셨소.”
약속대로 아침마다 내손 약손 스킬을 사용했다. 쟈빌론의 머리를 쓰다듬어 두통을 말끔하게 싹 날려 주었다.
그때마다 쟈빌론이 티나게 기뻐하며 순수하게 웃었다. 광적인 애국자, 그래서 수많은 인명을 학살한 자답지 않은, 찐텐 가득한 행복 미소였다.
사실 쟈빌론은 안도하고 있었다.
‘과연. 성자 군의관의 말이 맞았구나.’
처음엔 조금 불안했다.
성자 군의관의 두통 치료가 두 번이나 먹힐까. 처음에만 좋았던 게 아닐까.
계속 치료를 받다 보면 몸이 적응하며, 약효가 떨어지듯 효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며 그러한 걱정마저 상큼하게 싹 날아갔다.
‘……여전히 아프지 않아. 처음과 똑같다.’
아침 치료를 시작한 지 열흘째.
쟈빌론은 비로소 안도했다. 매일 치료를 받았음에도 치료의 효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과 똑같았다. 감탄이 나올 정도의 효력이었다!
동시에 쟈빌론은 서서히 실감했다.
‘나는 이제 성자 군의관의 치료가 없으면 제대로 살 수도 없겠구나.’
계속 아프게 지낼 때는 몰랐다.
태어나던 때부터 줄곧 아팠으니까. 아픈 것이 당연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저 참고, 인내하고, 잇몸이 뭉개지도록 이를 꽉 깨물며 참는 것이 다인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사는 것도 썩 나쁘지 않다고까지 생각했더랬다.
한데 지금은?
달라졌다.
‘이젠 예전으로 못 돌아가겠어.’
벌써 열흘째 지옥 같은 두통을 느끼지 못하며 살았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사람들의 표정도 달라 보였다. 한낱 길가에 떨어지는 낙엽의 색깔마저 다르게 느껴졌다.
이게 살아 있는 느낌이구나 싶었다. 전엔 어떻게 살았나 싶기도 했다. 한편으론 두려워졌다.
만약 성자 군의관이 사라진다면? 자신의 곁에서 떠나간다면? 그래서 다시는 그의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버틸 수 있을까.
“…….”
불가능하다.
쟈빌론은 예전으로 돌아가기 싫어졌다. 그럴수록 라키엘을 보는 그의 눈빛에서 꿀이 떨어졌다. 라키엘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부드럽고 친절해졌다.
물론 라키엘도 그러한 쟈빌론의 변화를 감지했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준비 완료.’
이제 모든 세팅(?)이 갖추어졌다. 그걸 확신한 라키엘은 탈출 작전의 다음 단계를 실행했다.
아침 치료가 끝난 직후, 입가에 침을 촵촵 발랐다. 그리고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술술 꺼냈다.
“저기, 오늘은 제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긴히? 어떤 이야기이기에?”
“오늘 밤에 말입니다. 제가 중요한 기도를 올려야 할 듯합니다.”
“중요한 기도라니?”
쟈빌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당하다는 기색이라기보다는, 순수하게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좋아. 됐어. 통한다.’
라키엘은 자신감을 얻었다. 기만질의 혓바닥에 힘찬 풀악셀을 넣었다.
“사실은 제가 매일 아침에 해드리는 치료 때문입니다. 그걸 계속 이어가려면, 오늘 밤에 반드시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그게 무슨…… 자세히 말해 보시오.”
“예. 말씀을 드리자면, 사실 제가 해드리는 치료는 공짜가 아닙니다. 제 능력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하늘이 내려준 축복 덕분입니다.”
“축복?”
“그렇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맑고 차가운 물, 정한수를 떠다 놓고 달을 향해 정성껏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달이 뜨는 때부터 시작하여 완전히 저물 때까지 말입니다. 만약 그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않으면?”
“저는 치료의 능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
“그 기간이 최소 한 달은 되겠지요. 다음 보름달이 떠서 기도를 올릴 수 있게 되기까지 말입니다.”
“사실이오?”
“예. 제 명예를 걸고 사실입니다.”
라키엘은 신뢰감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또한, 제가 기도를 올리는 동안에는 그 누구의 시선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건, 제가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 즉시 기도의 효력이 없어질 것입니다. 물론 결과는 마찬가지로…….”
“한 달 동안 치료의 능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겠구려. 맞소?”
“맞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제가 안심하고 어떤 이의 시선도 받지 않으며 밤새도록 기도를 올릴, 달과 가까운 높은 장소가 필요합니다. 마침 그걸 위해 제가 점찍어둔 장소가 있으니, 그곳에 기도를 위한 준비를 갖추어 주셨으면 합니다.”
시종일관 진지하게. 절대로 웃지 말고. 라키엘은 명심하며 진중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쟈빌론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
저런 기도가 필요한 축복의 능력이라니. 솔직히 처음 들어보았다.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었다. 저 말을 어디부터 믿어 줘야 할지 고민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잠깐이었다.
‘만약, 성자의 저 말이 진실이라면?’
그런데 자신이 그 말을 믿지 않아 장소를 준비해 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성자 군의관이 기도를 제대로 못 올리게 되고, 치료의 능력을 잃게 된다면?
“…….”
그건 싫다. 끔찍한 두통의 나날로 돌아가야 할 텐데. 그건 죽는 것보다 싫다.
‘어쩔 수 없군.’
쟈빌론은 일말의 찜찜함과 의구심을 접어 두었다. 성자 군의관의 말을 믿어 보는 것이 이득이리란 계산이 섰다.
“좋소. 장소를 알려 주시오. 그럼 준비를 갖춰 두리다.”
“정말이십니까?”
“그대가 원하니 내가 도울 수밖에 없지 않겠소?”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오히려 내가 그대에게 고맙지.”
그렇게 쟈빌론의 허락(?)이 떨어졌다.
라키엘은 미리 점찍어 두었던 장소를 알려주었다. 숲으로 둘러싸인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그곳에 기도를 위한 단출한 준비가 갖추어졌다.
물론 쟈빌론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기도를 하는 동안 감시가 소홀해진 틈에 성자 군의관이 내 곁을 훌쩍 떠나가 버린다면…… 그건 안 될 일이야.’
쟈빌론은 군사를 움직였다.
언덕을 무려 다섯 겹으로 둘러쌌다. 철통 같은 포위망이었다. 다만 언덕과의 거리는 200미터 정도로 유지했다.
병사들이 언덕 방향을 절대 돌아보지 못하도록, 등을 지고 서게 하였다.
만약 돌아보는 자가 있다면, 엄격한 군법에 의거하여 본보기로 목을 베겠노라는 엄포도 남겼다.
마침내 밤이 왔다.
“그럼, 기도를 마치면 아침에 다시 뵙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겠소.”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언덕의 기도 장소로 떠나가기 직전, 라키엘이 걸음을 멈추었다. 쟈빌론을 돌아보았다.
“혹여나 제가 떠나갈 것이라 염려하신다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
작게나마 품었던 의심을 들킨 걸까. 쟈빌론의 어깨가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라키엘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저도, 각하의 두통을 치료해 주며 보람을 느끼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고맙소.”
비로소 쟈빌론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배어났다. 저렇게까지 말해 주니 고마웠다.
조금은 감동받은 눈길로, 언덕 위로 멀어지는 라키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보름달이 떠올랐다.
그때부터였다.
쟈빌론은 흐뭇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지금쯤 자신의 성자 군의관이 열심히 기도를 올리고 있겠지.
앞으로도 나를 더욱 정성껏 치료해 주기 위하여. 밤이슬을 맞아가며 보름달을 향해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을 테지.
생각할수록 고마워졌다.
떠올릴수록 따뜻해졌다.
앞으로 더욱 잘해줘야지. 성자 군의관에게 더욱 극진한 대접을 해 주어야지. 그럴 자격이 있는 자니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자니까.
쟈빌론은 기다리고, 기다렸다. 보름달이 중천에 떠오르고, 서쪽으로 기울었다. 마침내 저물었다. 그
때까지도 쟈빌론은 기다렸다. 성자 군의관이 언덕에서 내려올 때가 되었노라 생각하며. 이제 슬슬 모습이 보여야 할 텐데, 라고 걱정하며.
진심을 담아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라키엘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내 아침 햇살이 환하게 떠올랐다. 어느새 싹을 틔운 불안감이 걷잡을 수 없이 덩치를 불려갔다. 결국, 그는 병사들을 언덕 위로 올려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보고드립니다! 성자 군의관이 사라졌습니다!”
가슴 철렁해지는 보고를 듣는 순간, 직접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외침을 귓가에 담아 버린 순간, 그는 깨닫고야 말았다.
자신이 배신당했음을. 자신의 보물이 손아귀를 박차고 떠났음을.
“…….”
까드득!
훈훈했던 마음의 온기만큼 이글이글 타오르는 극대노의 감정이 이런 걸까. 혹은 서운한 상실감이 이런 것일까.
“……찾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버럭 외치는 쟈빌론의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집착이 광기처럼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