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30화 (130/468)

130화. 미친놈들의 추격전 (3)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

왕녀의 혼잣말이 흘렀다. 아니, 그건 이미 혼잣말이 아니었다. 거의 외침에 가까웠다.

외침이 제법 먼 거리를 돌파(?)하며 날아갔다. 마침내 라키엘의 고막을 야물딱지게 콕, 찔렀다.

라키엘이 움찔했다.

“……어?”

데미안에게 거의 업히다시피 해서 뛰던 그의 고개가 삐그덕.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왕녀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

3초간 이어진 침묵.

이내 라키엘이 외쳤다.

“왕녀님! 이렇게 드디어 만나는군요!”

감격으로 떨리는 목소리. 어느새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방울을 아련하게 흩뿌리며 달려왔다. 왕녀에게 흡사 뛰어들어 안길 기세였다.

덕분에 아델린은 흠칫하고 말았다.

“무, 무슨!”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왕녀 아델린이 당황하는 사이, 라키엘이 다짜고짜 그녀의 말안장 뒤편에 올라탔다. 그녀가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뭐죠? 황태자 당신, 왜 이런 곳에서 이러고 있는 거죠?”

“그게 다 사정이 있습니다.”

“사정이요? 당신, 황도로 돌아가겠노라 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서신만 보내 놓고 아무런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났던 게 열흘도 더 된 일인데.”

“그게 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 사정이 뭔데 본국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당신이 여기서 이런 모습으로 반란군에게 쫓기고 있는 거냐고요.”

“사람 세상살이 살다 보면 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대답하지 않으시겠다?”

“대답하기엔 너무 복잡하고 깁니다.”

“그래도 듣고 싶은데요.”

제멋대로 뒷자리에 합승(?)한 라키엘, 그를 쳐다보는 왕녀의 눈길이 째릿 날카로워졌다.

아닌 게 아니라, 서운했다. 황당했다. 단순히 라키엘이 서신 내용과 다르게 황도로 돌아가지 않아서? 자신을 속인 듯해서?

아니었다.

“어째서 당신이, 반란군의 외투를 걸치고 있는 거죠?”

라키엘이 입고 있는 방한복 외투가 문제였다. 반란군의 제식 복장이었다.

어깨에는 반란군 지휘부 소속의 부대 표식까지 새겨져 있었다.

“심지어 그 외투, 지급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것이로군요. 곳곳에 이끼며 진흙이 묻어서 더러워졌지만 티가 나요. 당신, 힐링캠프를 떠나고 열흘 동안 어디에서 뭘 했던 거죠?”

어느새 라키엘을 쳐다보는 왕녀의 눈길에는 의심이 서려 있었다.

반란군 지휘부 표식이 새겨진 제식 외투. 심지어 지급 받은 지 며칠 되지 않은 듯한 외투. 머릿속에 찜찜한 퍼즐이 그려졌다.

그녀가 반쯤 확신을 담아 물었다.

“설마 당신, 그동안 반란군에 몸을 담았던 것인가요? 제게 거짓말을 하고서?”

“예!”

라키엘이 대뜸 대답했다.

너무나 뻔뻔하도록 당당한 대답이었다. 덕분에 왕녀 아델린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 사이, 라키엘의 더욱 기묘하도록 태연한 대꾸가 이어졌다.

“맞습니다. 반란군 지휘부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제법 알찬 나날이었죠.”

“…….”

“하지만 그렇듯 반란군에 몸을 담은 건 전부 깊은 뜻이 있어서 행한 제 나름의 희생이었습니다.”

“……희생이요?”

“그렇습니다. 위험을 무릅쓴 잠입! 적의 심장부를 노리는 칼날 같은 눈빛으로! 왕국군에 티끌 같은 도움이나마 되고자, 이 불행하고 서글픈 내전을 하루라도 일찍 종식시키고자, 살 떨리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무릅쓰고서, 저는 기꺼이 이번 일을 실행했던 것입니다.”

“어째 변명 같은데요? 그것도 굉장히 구차한.”

“들켰습니까?”

“네.”

“하지만 우리,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닙니다. 혼은 나중에 날 테니, 말을 더 빨리 달리게 하시죠.”

“왜죠? 저쪽에서 달려오는 반란군 때문에?”

“네.”

“하지만 겨우 저까짓 놈들, 우리보다 숫자가 적은 것 같은데요. 기왕 이렇게 조우한 김에 정면으로 부딪쳐서 격멸하고 돌아가는 게 좋을 듯하고요.”

왕녀 아델린의 입가에 살벌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만만했다.

자신이 이끌고 나온 500기의 기병은 왕국군 최고의 정예였다. 비슷한 숫자라면 반란군의 어떤 부대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이쪽이 거의 2배 가까이 병력이 많아 보였다. 그러니 정면으로 격돌하면? 큰 피해 없이 적을 섬멸할 수 있을 터다.

‘그리고 이건 좋은 본보기가 되겠지.’

고작 백성(?) 셋을 사냥하듯 학살하려 했던 반란군 기병대. 놈들을 저지하고 백성을 구해낸 왕국의 왕녀와 근위대.

그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반란군 기병대마저 격멸한다면? 그 모습을 요새의 왕국군과, 평원 건너편의 반란군 모두가 지켜본다면?

왕국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게 될 것이다. 반면, 반란군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지게 되리라.

‘이건 기회야. 여기서 싸우고, 놈들을 격멸하는 것이 이득이야.’

왕녀는 계산을 마쳤다.

하지만 그 순간, 라키엘이 빼액 외쳤다.

“부딪치면 다 죽습니다!”

“왜죠?”

“쟈빌론이 저놈들 선두에 있으니까요!”

“……네?”

왕녀의 표정에서 색채가 빠져나갔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라키엘을 돌아보았다.

“쟈빌론이? 직접이요?”

“네!”

“그럴 리가. 그는 반란군의 수장인데? 어째서?”

“날 잡으려고요!”

“당신을요? 왜요?”

“내가 그놈한테 제일 중요한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까!”

“…….”

당신, 지난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왕녀는 어쩐지 엄청난(?) 상상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로이 망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말로 쟈빌론이 반란군 기병대를 이끌고 있다면? 절대로 부딪치면 안 된다. 그는 소드마스터니까. 이쪽이 격멸될 거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따르는 근위대를 돌아보았다. 재빠르게 명령했다.

“전군! 이탈!”

명령과 실행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왕녀가 우측으로 기수를 돌리는 것과 함께, 500기의 근위병 대열 전체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유연한 기동과 함께 안장의 석궁을 꺼냈다. 장전된 볼트를 왼쪽으로 겨누었다.

“발사!”

투투투투!

이글거리는 화재의 현장. 그 속으로 500발의 볼트가 세차게 날아갔다.

하지만 왕녀와 근위대는 사격의 결과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대로 기수를 돌려 요새 방향으로 박차를 가했다.

왕녀는 그제야 다소 마음을 놓았다.

‘됐어. 쟈빌론이 설령 가까이 돌진해 오고 있었다 하더라도 일제 사격에 주춤했을 테고, 그 사이에 우리가 가속하며 거리를 벌릴 시간을 만들었어.’

그러니 더는 추격해 오지 못할 것이다.

안전하게 이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투확-!

“……!”

후방에서 기이한 폭음이 들려왔다. 마력탄이 터지는 소리? 혹은 공간이 쪼개지면 저런 소리가 날 법했다.

왕녀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탄해야 했다. 얄궂게도 불길한 예감이라는 놈들은 언제나 들어맞는 것 같다고.

‘쟈빌론!’

쟈빌론이 불길 사이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아니, 그가 내찌른 검에 화염이 통째로 걷혔다. 그 사이로 쟈빌론이 달려왔다.

근위대를 태운 준마? 그걸론 어림도 없었다. 왕녀 자신을 태운 국왕의 명마?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니까, 쟈빌론은, 말에 타지도 않은 채로 이쪽 대열을 추격해 오고 있었다.

뒤에서? 아니, 옆에서. 이쪽의 대열과 나란히 달렸다. 보란 듯이. 이쪽을 돌아보며 씨익 웃기까지 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살인미소였다.

“…….”

라키엘은 직감했다.

저놈, 방금 날 보며 웃었다. 확실하다. 눈이 마주쳤으니까. 그런데 입은 웃는데 눈은 전혀 웃질 않았다.

꼬리뼈에서부터 뒤통수까지 솜털이란 솜털이 모조리 다 곤두섰다. 사상 최악의 스토커에게 추격당하면 이런 기분일까.

하지만 그런 기분을 만끽(?)할 틈은 없었다.

타앗-!

10미터 거리에서 이쪽과 나란히 달리던 쟈빌론이 땅을 박찼다. 순간적으로 놈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아니, 너무나 갑작스럽게 커졌다. 가까이 다가와 버렸다!

“그대, 날 속이면서 기뻤나?”

“……!”

순식간에 다가온 쟈빌론. 어느덧 놈과의 남은 거리는 2미터. 그곳에 속삭이듯 으르렁거리는 쟈빌론의 거구가 도사리고 있었다.

성난 짐승과 딱 마주친 기분. 그러나 어찌 대응할 틈도 없었다. 어느새 놈의 검이 휘둘러지고 있었으니까.

“그대는 두 번 다시 도망칠 생각조차 품지 못하게 될 것이야.”

쐐애액-!

위기감이 극에 달하면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원리 때문일까. 혹은 인생의 주마등이 스쳐 가는 까닭일까. 돌연 시간의 흐름이 느릿하게 느껴졌다.

이쪽을 보며 환하게 웃는 쟈빌론. 놈이 가로로 베어오는 검의 움직임이 뚜렷하게 보였다.

물론 보인다고 대응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놈의 검이 무엇을 노리는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내 다리.’

놈의 검은 정확히 이쪽의 무릎이 있는 높이를 가로로 베어 오고 있었다. 말의 몸통과 이쪽의 다리를 통째로 달라 버리려는 거다.

그렇게 앉은뱅이로 만들어 평생 곁에 붙잡아 두려는 거다. 섬뜩했다.

이제라도 이쪽의 정체를 밝혀야 할까. 사실은 내가 마젠타노의 황태자라고 외쳐볼까.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일까. 망했다는 절망적 깨달음이 머릿속을 후려쳐 왔다.

한데 그때였다.

“전하!”

날카로운 외침이 느릿해진 시간의 인식을 깨부수며 들려왔다. 데미안의 목소리였다.

동시에 뒤에서부터 사나운 기세가 폭풍처럼 몰려왔다. 쟈빌론의 검과 충돌했다.

터컹-!

충격파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온몸을 때렸다.

물을 잔뜩 채운 거대한 짐볼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 같은 둔중한 충격. 세상이 뒤흔들리는 감각과 함께 느리게 인식되던 시간의 흐름이 깨어졌다.

“커억!”

온몸이 허공에 떴다. 충격파에 밀려난 결과였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전신을 둥글게 웅크렸다. 그 순간, 누군가가 이쪽을 끌어당겼다.

콰당탕! 콰드드즉!

“……!”

온몸으로 지면과 거친 하이파이브를 감행했다. 하늘과 땅의 위치가 최소한 열 번은 뒤바뀌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형편없이 굴렀다.

전신의 관절이 모조리 제자리에서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강제로라도 차려야 했다.

“눈 떠요!”

철썩!

“……!”

매서운 외침과 함께 뺨이 불을 지른 듯이 뜨거워졌다. 눈을 번쩍 떴다. 이마에 피를 흘리는 왕녀 아델린이 이쪽을 보며 외치고 있었다.

“일어나, 이 멍충아!”

그녀가 추락의 순간에 날 감싼 걸까. 그런 듯했다. 아델린의 온몸이 흙먼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왼쪽 팔은 축 늘어져 있었다. 부러진 듯했다.

하지만 서로 다정하게 안부나 나누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어서! 이 틈에 도망쳐요!”

그녀가 재차 외쳤다. ‘이 틈’이라고 말할 때 힐끔, 한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녀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목격할 수 있었다.

터컹! 터커어엉-!

두 마리 짐승이 거칠게 얽히고 있었다.

데미안과 쟈빌론이 격돌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건 격돌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쟈빌론이 시종일관 데미안을 압도하며 밀어붙이고 있었다.

데미안은 간신히 죽음만을 모면하며 방어와 회피에 급급한 모습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데미안은 소드마스터가 아니니까.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올라가기 직전인, 익스퍼트 중급의 경지에 불과하니까.

그러니까, 원칙대로라면 데미안은 소드마스터인 쟈빌론의 일검도 제대로 받아낼 수 없을 터다. 그게 정상이다.

한데 놀랍게도 데미안은 버티고 있었다. 감히 견주어 보지도 못할 격차를 극복하며, 압도적 수세에 몰렸을지언정 쟈빌론을 상대하며 붙들어두고 있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쟈빌론도 비슷한 놀라움을 느낀 건지, 눈이 휘둥그레진 모습이었다.

그때, 왕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뭐 해요! 어서 움직이자니까!”

“움직이자고요?”

“네! 당신의 호위가 시간을 벌어 주는 틈에 도망쳐야죠!”

데미안을 버리고 도망쳐야 한다고 외치는 아델린.

사실 당연한 소리였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정상적인 의견이었다.

이쪽은 제국의 황태자니까. 데미안은 일개 호위에 불과하니까. 호위는 이런 때에 대신 싸우다 죽고 희생하라고 있는 존재니까. 아델린도 그렇게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내게는 아니다.

“안 됩니다. 버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이를 갈며 일어섰다. 아델린을 돌아보며 거절했다. 그녀의 눈빛 가득, 이해가 안 된다는 답답함이 떠올랐다.

“당장 가자니까요?”

그녀가 손을 뻗어왔다. 숫제 이쪽을 강제로라도 끌고 갈 심산인 듯했다.

하지만 저 의견을 따를 수는 없다. 데미안을 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가 단순히 소설의 주인공이라서? 세계관에서 손꼽힐 강자가 될 녀석이라서? 그런 귀한 녀석을 이곳에서 잃을 것이 아까워서? 손해가 될 듯해서?

‘아니.’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소설 마검황 속 어느 장면을 떠올렸다. 왕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녀석을 버리면, 모두가 위험해질 겁니다.”

“……네?”

무슨 소리냐는 듯 찡그려지는 아델린의 눈매. 하지만 방금 꺼낸 말은 사실이다. 진실이다.

데미안이 이곳에서 버림받는다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면, 그리하여 녀석이 절체절명의 순간 속에서 마침내 자신의 본질을 오롯이 깨달아 버리게 된다면…….

‘그때는 나도, 당신도, 더 나아가 이 세상 전체가, 쟈빌론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위험에 빠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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