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31화 (131/468)

131화. 습관이라는 이름의 약점 (1)

세상에는 굳이 일어나지 않아야 좋을 일이 있다. 때로는 모든 성장이 그저 이롭기만 한 일이 아니게 되기도 한다.

창조를 위한 파괴, 탄생을 위한 소멸 또한 마찬가지다. 흔히들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앞으로 일어날 창조와 탄생을 위한 소중한 밑거름이라 일컫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파괴되고 소멸될 당사자들도 그렇게 생각해 줄까?

‘아니.’

라키엘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소설 마검황 속 스토리를 떠올렸다.

그것은 파괴와 창조에 대한 이야기였다. 세계의 소멸과 탄생을 노래하는 서사시였다.

그 중심에 데미안이 있었다.

제국이 무너지고.

모든 질서가 파괴되고.

잿더미의 폐허 속에서 그가 성장했다. 성장하며 다시 한 번 세계를 부수었다. 모든 것의 재탄생을 이끌었다.

그것이 그가 탄생하면서부터 짊어진 숙명이었고, 그는 숙명을 따랐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야 그 길을 거부하고, 숱한 고난 끝에 극복했다.

그래서였다.

‘데미안. 널 여기에 버리고 간다면, 그래서 끝끝내 벗어날 수 없는 위기에 몰리게 된다면…….’

그 위기 속에서 너는 결국 네 본질을 깨닫게 되겠지. 최소한 그 길의 첫걸음을 떼어 놓게 되겠지.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 세상의…….

“모두가 위험해질 거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왕녀 아델린의 목소리가 상념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라키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아델린이 있었다. 그녀의 뒤편에선 수많은 군마가 세차게 내달리고 있었다.

왕국군의 근위대였다.

반란군의 친위대였다.

양측 최고 정예의 두 기병대가 서로를 짓뭉개기 위해 돌진했다. 충돌했다. 얽혔다. 어지럽게. 난폭하게. 창과 창이 엇갈리고, 방패가 쪼개졌다. 선혈이 튀고, 누군가의 기합과 비명이 어우러졌다.

“일단 타요!”

아델린의 손길이 뻗어왔다. 그녀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이끌리듯 말에 올라탔다. 안장 앞쪽에 앉은 그녀가 외쳤다.

“내 팔이 성하지 못하니까! 알아서 잘 잡으시고! 이랴! 하!”

그녀의 목소리에 군마가 크게 투레질을 했다. 설마 아델린은 이대로 날 데리고서 전장을 이탈하려는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이대로 가면 안 됩니다. 정말로요. 데미안을 여기에 버려두고 떠나면…… 모두가 끝장이 날 겁니다.”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아델린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이었다. 안다. 이해한다. 무슨 소리인지 짐작도 안 가겠지.

하지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선 안 되니까. 입 밖으로 진실을 꺼내는 자체만으로도 천기누설이 되니까. 자칫 그랬다간, 데미안을 이 세상에 남긴 ‘그 존재’가 직접 움직이는 사태가 닥칠 테니까.

‘그래서…… 지하 검투장에서부터 온갖 이상한 핑계를 다 대면서 데려오고 계속 옆에 잡아 두었던 건데.’

아무에게도 말해 줄 수 없었다.

데미안에게도 그랬다.

하여 그저 곁에 두었다.

데미안에게 닥쳐올, 소설 마검황에서와 같은 고난과 역경을 예방해 주려고. 녀석으로 하여금 힘겨운 위기를 겪지 않게 해 주려고. 그저 평범하기에 평온한 일상만 누리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면 충분하리라 여겼다.

위기가 없으면 극복도 없으니까. 극복할 일이 없으면 성장도 없을 테니까. 의도적으로 녀석의 시간을 평온한 일상에 두었다. 고정시켰다. 가두었다.

온실의 화초처럼.

새장의 새처럼.

황태자의 곁에서라면, 평화로운 황궁에서라면 가능하리라 여겼다.

가끔씩은 별별 사건을 겪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내 곁에 있으면 소설 원작과 같은 절망적인 고통과 역경을 겪지는 않으리라 여겼다.

그렇게, 평온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었다. 성장하지 못하도록 막아 두고 싶었다.

창조를 위한 파괴, 탄생을 위한 소멸 따위 없이, 세상의 모두가 평안하게 그저 흘러가도록 두고 싶었다.

그래야 나도 사니까.

내 삶도 안정적일 테니까.

‘그래서…… 크레모에서도 날 구한 녀석이 우루스와 단둘이 남았을 때, 결국엔 위기에 처했을 때, 굳이 주위의 만류를 무시하고 돌아가서 녀석을 구해 줬던 거였는데.’

한데 오늘, 녀석이 이렇게 위기를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감당할 수 없을 강자와 일대일로 맞서는 사태가 벌어지게 될 줄도 몰랐다.

으드득!

라키엘은 이를 갈았다.

각오가 섰다. 그때처럼, 크레모에서처럼 또 미친 짓을 벌여야 할 것 같다. 물론 두렵다. 무섭다.

하지만 데미안이 이대로 자신의 본질을 깨달아 버리면서 생겨날 일에 비하자면, 지금 잠깐 두려움을 참고서 미친 짓을 벌이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왕녀님, 이제부터 내 말 똑바로 들어요.”

주위에서 살벌하게 벌어지는 근위대와 친위대의 전투. 그 악다구니 속에서 아델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 마디, 한 음절, 힘을 주어 말했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살리려면 당신이 중요해.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줘야 모두가 살 수 있어.”

“무슨…….”

“해 줄 수 있겠어요?”

“…….”

이글거리는 라키엘의 눈동자. 아델린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그에게서 저런 눈빛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녀가 무의식중에 고개를 살짝 끄덕인 것은. 그 직후에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를 깨달은 것은.

‘나, 미친 건가.’

그냥 황태자를 데리고 이대로 전장을 이탈하면 되는 건데. 모두가 전투에 휘말린 지금이야말로 그럴 수 있는 가장 절호의 기회일 텐데.

그런데 어쩌자고 나는 황태자의 저 말도 안 되는 괴상한 의견을 따르고 있는 건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결정을 번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황태자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좋아. 고마워요. 그럼 잘 들어요. 당신이 이제부터 해 줘야 할 일은…….”

라키엘이 빠르게 설명했다.

설명을 귀에 담으며. 말고삐를 움켜잡으며. 황태자의 의도를 뒤늦게 이해하며. 아델린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경악해야 했다.

경악스럽다. 또한 경이롭다.

쐐애액-!

검날이 번득였다. 검신이 독사처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날카롭고도 서늘한 기세를 싣고서 공간을 갈랐다. 지독하도록 집요하게 약점을 노리는 검격이었다.

스칵!

또 다른 검날이 움직였다. 검신이 맹수처럼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흉포하고도 격렬한 기세를 담고서 공간을 점령했다. 노골적으로 법칙을 무시하며 모든 것을 찢어 버리는 검격이었다.

터컹-!

두 기세가 충돌했다.

독사 같은 검격이 맹수의 검을 밀어냈다. 약점을 물어뜯고, 상처를 헤집었다.

그 순간, 쟈빌론의 입가에도 독사 같은 미소가 맺혔다. 그는 생각했다. 경악스럽고, 또한 경이롭다고.

‘이런 자가 있었을 줄이야.’

그의 눈동자가 흥미를 담고서 상대를 주시했다. 그곳에 데미안이 있었다.

온통 일그러진 얼굴로 맹수 같은 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이쪽의 기세에 밀려 쓰러지기 직전인 채로 버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흥미진진했다.

‘수준으로 따지면 고작…… 소드 익스퍼트 중급으로 보이는데.’

사실이었다.

눈앞의 흑색 장발 사내는 기이했다. 그저 자잘한 실전 경험이 많아 보일 뿐, 잘 쳐줘도 상급은 아닌 실력이었다.

움직임도, 검을 다루는 기예도, 마나의 운용 능력을 살펴보아도 그러했다.

처음 자신의 검을 막아 냈을 때는 우연이라 여겼다.

그저 성자 군의관의 다리만 살짝 잘라내기 위해 휘둘렀던 검이었으니까. 그리 큰 힘을 싣진 않았으니까.

덕분에 이자가 자신의 검을 어렵사리 막아 낸 것이리라 여겼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기적이란 언제 어느 때고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니까. 그저, 그렇게만 여겼더랬다.

한데 계속 검을 섞어 보니 아니었다.

……스핏!

쟈빌론의 검이 섬전처럼 뻗어 갔다. 다섯 줄기의 잔상이 뒤섞였다. 데미안의 이마와 목, 어깨와 명치, 하복부를 동시에 노리며 번득였다.

보통의 소드 익스퍼트 중급 수준 실력자라면 절대 피하지도, 막지도 못할 공격이었다.

애초에 수준이 다르니까. 호랑이와 어린아이만큼이나 차이가 있으니까.

그런데 결과는 또 뜻밖이었다.

타앗!

데미안은 검을 막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뛰쳐나왔다. 잔상을 모조리 몸으로 맞았다.

마치 처음부터 잔상을 간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잔상 속에 섞인 진짜 검격은 어깨로 흘려내기까지 했다.

“……크읏!”

검격에 스친 어깨. 핏방울이 튀었다. 그러나 데미안은 멈추지 않았다.

이를 악물며 오히려 전진했다. 두 눈을 번득였다. 쟈빌론의 허리를 향해 검을 쓸어냈다.

쉬카악-!

“하!”

쟈빌론의 입가에 환호성 같은 미소가 맺혔다. 설마하니 이런 대응을 선보일 줄이야. 몰랐다. 뜻밖이었다. 더욱 흥미가 돋아났다.

‘당할 듯하면서도 매번 아슬아슬하게, 간발의 차이로 내 공격을 흘려 낸다? 이게 가능한 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식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소드 익스퍼트 같은 나부랭이가 소드마스터인 자신의 공격을 몇 번이나 번번이 무마시키고, 끝끝내 반격까지 가하는 이 상황이 농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자극적이었다.

‘타고난 위기 대응 능력이 남다른 놈이로구만.’

아주 가끔, 이런 놈이 있긴 했다. 말 그대로 타고난 천재. 난놈. 될성부른 떡잎. 그리고 가만히 놔둔다면…… 끝없이 성장하게 되는, 그런 놈들.

‘하면 밟아야겠지.’

흥미로운 싹은 위험하다. 크도록 내버려 두면 위협이 된다. 아직 덜 자랐을 때, 기회가 있을 때 짓밟아야 한다.

쟈빌론의 눈동자에 흥미만큼의 파괴적 욕구가 서렸다. 어차피 오늘의 목표는 성자 군의관이다.

감히 자신을 속이고 도망까지 친 그자를 사로잡아야 한다. 평생 곁에 묶어 두어야 한다.

‘그러니, 네놈은 여기서 그만 죽어라.’

흥미롭게 가지고 노는 것도 여기까지다.

끄드득!

쟈빌론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검을 쥔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츠즈즈!

그의 검이 섬뜩하도록 찬란한 빛을 머금었다.

소드마스터의 전유물. 마나의 무한한 순환을 이루어낸 자만 피워낼 수 있다는 궁극의 파괴적 기예. 최후의 섬광.

오러였다.

스극.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예비동작조차도 없었다.

그저 쟈빌론의 검이 아주 살짝 흔들렸을 뿐이었다. 동시에 그의 전면으로 오러의 광휘가 파괴적인 선율을 그려냈다. 공간을 가르고, 물질을 잘랐다.

그 속에는 뻗어 가던 데미안의 검도 포함되어 있었다.

“……!”

검이 통째로 잘리는 순간, 데미안의 두 눈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위험신호가 심장을 두드렸다. 동시에 그가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스칵-!

오러의 끝자락이 오른쪽 볼과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잘린 머리칼 다섯 가닥이 허공에 흩날렸다.

소름이 돋아났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그다음이었다.

“놀아 주는 것도 이제 끝이구나.”

“……!”

무감정한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울렸다. 순간 데미안은 보았다.

오러가 서린 검을 치켜들고 있는 쟈빌론의 모습을. 그의 검 끝이 자신의 가슴을 겨누고 있음을.

반면에 자신은?

아직 균형을 되찾지도 못했다. 피할 방법도, 막을 방법도 없었다. 아득한 절망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이렇게 끝인 걸까. 정말로 그런 걸까. 차오르는 암담함이 시간을 느릿하게 만들었다. 아니, 그런 듯한 착각을 불러왔다.

‘이런 곳에서 끝장이 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럴 줄은 몰랐다.

자신의 인생은 좀 더 의미가 있을 줄로만 알았다. 앞으로 해 보고 싶은 일도 많았다. 이런 곳에서 죽을 거라 생각하니, 그저 허무했다.

쐐애액-!

검이 찔러 들어왔다. 이제 찰나가 지나면 심장이 꿰뚫리겠지. 그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두근!

반항하듯.

저항하듯.

심장이 크게 뛰었다.

피할 수 없을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발악하듯 뛴 것일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그것은 강렬한 확신에 가까웠다.

‘……뭐지.’

인생의 주마등처럼 느리게 인식되는 시간의 흐름. 그 속에서 데미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으로 이상했다.

당장 피할 수도 없을 검격이 심장을 노리고서 찔러 들어오고 있는데. 남은 거리가 지척에 불과한데. 호흡 한 번을 할 시간도 남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두렵지가 않았다. 불안하지도 않았다.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심장이 돌연 크게 뛰고부터였다.

무언가 알 수 없을 미지의 존재가 가슴속에서 눈을 뜨는 기분이 들었다. 착각? 아니었다.

두쿵! 쿠웅!

심장이 한층 크게 뛰었다. 도사리고 있던 미증유의 자아가 꿈틀거렸다. 웃었다. 자신을 향해. 세상 모두를 향해. 뻗어 오는 검을 향해. 가소롭다는 듯이.

‘나는…….’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두 눈의 흰자위가 모조리 검게 변해 있었다.

반대로 눈동자가 하얗게 탈색되었다. 의도치 않았던 자각이 그의 의지를 잠식했다. 아니, 잠식하려 했다.

만약, 그 순간, 뜻밖의 외침이 날아오지 않았더라면, 난데없는 커다란 그림자가 쟈빌론을 덮쳐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갓 눈을 뜬 미증유의 존재에게 모든 의지를 내맡겨야 하였을 것이었다.

“쟈빌로온-!”

“……!”

고막을 푹 찌르듯 날아온 외침.

그 소리에 데미안이 흠칫. 그의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쟈빌론도 움찔. 곁눈을 들어 외침이 들려온 위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내 쟈빌론은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죽은 군마 한 필이 날아오고 있었다.

아니, 네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날려오고 있었다.

마치 괴력을 지닌 누군가가 던진 돌멩이처럼, 혹은 투석기로 쏘아낸 포탄처럼, 이쪽을 깔아뭉갤 듯이 날아오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쟈빌론은 어처구니를 잃어버렸다. 성가셨다. 그냥 무시할까? 일순간 고민했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저딴 것에 깔리긴 싫고.’

날아오는 말에 깔려도 크게 다치지는 않을 터다. 자신은 소드마스터니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충격은 받아야 할 거다.

그럼 원래부터 욱씬거리던 두통이 잠깐이나마 더 심해지겠지. 그건 싫다.

‘이놈은 저 말을 처리한 다음에 곧바로.’

꽈득!

쟈빌론은 데미안을 향해 찔러가던 검을 멈추었다. 거두었다. 거두는 기세 그대로 위쪽을 향해 휘둘렀다.

오러가 실린 섬광이 날려오던 말 허리를 훑고 지나갔다.

촤악-!

날려오던 군마 시체의 허리가 단숨에 잘리며 두 동강이 났다. 하지만 쟈빌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검풍으로 흩날리는 핏물을 흩어 버리며 검의 방향을 틀었다. 그대로 아래로 내리그었다. 데미안을 향해서였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쟈빌론의 주의력이 아주 잠깐 교란된 사이. 쪼개진 말의 커다란 몸통 뒤쪽에서, 뜻밖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훕!”

이 순간만을 노리고 미친 짓을 벌인 남자, 라키엘이었다.

그가 말과 함께 날려온 기세 그대로 쟈빌론을 덮쳤다.

손을 뻗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전력을 실어서. 아주 찰나의 틈을 보인 쟈빌론의 뒤통수를 향해서. 맹렬하게.

휘둘렀다.

찰싹!

라키엘의 호빵 같은 손바닥이 쟈빌론의 뒤통수를 찰싹 때렸다. 쟈빌론이 움찔했다. 라키엘이 외쳤다.

“내 손으은! 약손! 에헤이이야↗!”

그 순간.

딩동!

[<내 손은 약손 (Lv.3)> 스킬이 발동됩니다.]

[환자 : 쟈빌론의 두통이 가라앉습니다.]

상큼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동시에 쟈빌론의 표정이 변했다.

“엇?”

뜻밖에 내주어 버린 빈틈. 아주 조금의 살기조차 없는 하찮은 시도였기에 오히려 감지하지 못했던 기습. 그렇게 얻어맞은 뒤통수.

한데 아프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언제나 신경을 헤집는 듯하던 두통이 싸악 날아갔다.

시원했다. 상쾌했다. 후련했다. 그리웠던 감각. 성자 군의관의 손길이었다.

……그래, 이 맛이야.

쟈빌론이 무의식중에 미소 짓는 순간.

후욱……?

돌연, 그의 검에서도 오러가 싸악 걷혀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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