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내전 종결자 (1)
……까드득!
어금니 사이로 물리는 해바라기씨. 단단한 껍질을 깨는 감촉. 그 속에서 라키엘은 피식 쓴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내가 이걸 또 먹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빨간 해바라기 씨앗.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환상종 전용의 음식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걸 먹어야 했던 크레모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엔 우루스에게 맞아 죽지 않으려고 이걸 삼켰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이걸 안 먹으면, 이걸 안 하면, 데미안에게 죽겠지.’
확실하다.
지금 내가 가만히 있으면, 그래서 데미안이 쟈빌론의 최후 비기에 붙잡히게 된다면, 그 이후로 벌어질 일들이 너무나 확연하게 예상이 되었다.
‘쟈빌론의 최후 비기는…… 자신의 체격을 활용한 소모전, 엘리전이니까.’
문득, 소설 마검황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 속에서 쟈빌론이 일으켰던 숙청과 대전쟁도 떠올랐다.
당시 쟈빌론이 1대 1 대결에서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바로, 기존 앙부아즈 왕실에 충성했던 근위대장 이드리스 경과의 결투에서였다.
소드마스터끼리의 대결.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승부였다. 장장 이틀 내내 격전을 치러야 했다. 그 끝에 쟈빌론이 위기에 몰렸다. 상대의 노련함에 작은 틈을 찔렸다. 그 순간, 쟈빌론이 역으로 최후의 비기를 시전했다.
‘이드리스 경을 붙잡았지. 맨손으로. 물론 이드리스 경은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 검을 놓친 쟈빌론이 발버둥을 치려는 거라 여기고는 끝장을 내려 했지.’
그게 이드리스 경의 실수였다.
쟈빌론의 최후 비기는 붙잡은 상대방과 자신의 체내에 있는 순수 마나를 격돌시키는, 지극히 무식하고도 원초적인 기법이었다. 일종의 마나를 활용한 엘리전인 셈이었다.
한데 그게 쟈빌론에게 엄청나게 유리했다.
‘사람이 지닌 체내의 순수 마나는, 체격과 정비례하니까.’
쟈빌론의 키는 190센티가 넘었다. 현대 지구에 비해 영양 상태가 좋지 못한 이곳의 사정을 감안하면 엄청난 거구인 셈이었다. 당연히 그보다 커다란 체격의 상대는 찾기가 어려웠다.
이드리스 경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의 작은 방심 때문에 쟈빌론에게 붙잡혔고, 마나 엘리전에 걸려들었으며, 쟈빌론보다 먼저 마나가 소모되었다. 결국엔 전신의 혈맥이 파괴되어 죽었다.
그러면 지금 쟈빌론의 행동을 보자면?
‘딱 그때, 이드리스 경에게 최후 비기를 걸던 때와 똑같은 상황이야.’
갑자기 엄청나게 강해진 데미안.
그런 데미안에게 처절하게 당하던 쟈빌론. 놈이 자포자기한 듯이 발악하며 내밀던 맨손. 모든 상황과 정황이 딱 들어맞았다.
‘이대론 데미안에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럴 거야. 지금 데미안의 상태는…… 리베르사 심법을 얻은 듯하니까.’
아니, 그냥 확실하다.
저 위력, 오러조차 없이 소드마스터인 쟈빌론을 압도하는 검격. 거기에 사뭇 파괴적인 분위기까지. 저건 발뒤꿈치로 봐도 리베르사 심법이 확실했다.
그래서였다.
조마조마했다.
데미안이 이대로 완전히 각성의 길로 접어들까 봐. 자신의 본질을 온전히 깨닫게 될까 봐. 아니, 그 전에 쟈빌론이 갑작스럽게 최후의 비기를 발동할까 봐. 정말이지,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아무리 데미안이라도, 설령 리베르사 심법을 발동하고 있더라도, 쟈빌론의 최후 비기는 그 모든 조건을 무시할 거니까. 심법에 의해 뻥튀기가 된 마나가 아닌, 체내의 순수한 마나만을 충돌시킬 거니까.’
그게 무서운 점이었다.
그러면 데미안이라도 꼼짝 못 한다. 어쩔 수 없이 엘리전에 휘말릴 거고, 결국엔 체격의 차이에 짓눌려서 죽음의 위기에 내몰릴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
쟈빌론이 죽는다.
나도, 여기 있는 모두가 죽는다.
‘왜냐하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위기에 몰리는 순간, 데미안이 완전히 각성해 버릴 거니까!’
그런 사태를 불러올 수는 없다. 그러니까 쟈빌론의 최후 비기를 막아야 한다. 라키엘은 결심하며 해바라기씨를 야물딱지게 씹었다. 목구멍으로 꿀떡 넘겼다. 눈앞의 쟈빌론을 마주 보며 사납게 웃었다.
“무슨……?”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쟈빌론. 이쪽의 팔뚝을 움켜쥔 놈의 손아귀에 힘이 확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눈앞에 시뻘건 경고창이 떠올랐다.
딩동!
[WARNING!]
[당신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환상종의 해바라기 씨앗을 무단으로 복용하였습니다!]
[적절한 안내 없이 본 식품을 복용하였을 시에 급격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복용 후 이상 증상 발생 시, 즉각 의사, 약사, 한의사에게 상담을 받으십시오.]
‘……쓰읍, 내가 한의사라니까?’
전에도 똑같은 경고창을 봤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오장육부의 난리법석 메시지도 와르르 떠올랐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무분별한 식품섭취 성향에 커다란 우려를 드러냅니다.]
[심장 : 야아아! 이 인간 거대화 소리 안 나게 해라아-!]
[허파 : 허! ……프프픍ㅍ픞프핤!]
[대장 : 근데 우리 거대화하면, 제가 담은 끙까도 같이 커지는 건지 말입니다?]
[간장 : 그냥 괄약근도 커져서 못 붙잡았다 그러고 열어 버려!]
[위장 : 이거 거대화 먹방 컨셉 지르면 너튭 조회수 개꿀잼각인데 아ㅋㅋㅋ]
[오장육부가 순식간에 진행되는 거대화를 준비하며 멘탈을 부여잡습니다.]
[당신이 복용한 빨간 해바라기씨가 불안정한 거대화 효과를 일으킵니다.]
[당신은 환상종이 아닌 인간입니다.]
[따라서 거대화 효과가 3분으로 제한됩니다.]
[거대화 종료 후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당신은 거대화가 끝나는 시점으로부터 120시간(5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 순간이었다.
……!
소리도 없었다.
충격도 없었다.
모든 것이 거칠게 흔들린다고 느껴지는 순간, 세상이 작아졌다. 아니, 이쪽이 거대해졌다.
뚜와앙-!
“쿠워오!”
절로 터져 나오는 포효성!
기겁해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쟈빌론. 놈이 팔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버둥거리고 있었다. 졸지에 허공으로 훌쩍 들어 올려진 채로.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쪽의 변화에 아연실색한 얼굴로.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헛숨을 삼켰다.
“……허억?”
쟈빌론은 믿을 수가 없었다. 굉장히 끔찍하고도 고약한 유형의 악몽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거…… 이거 뭐야?’
자신의 최후 비기에 대신 붙잡혔던 황태자. 고작 호위 따위를 대신해서 희생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던 황태자. 그랬던 황태자가 거대해졌다. 5미터? 6미터? 그 이상은 충분히 되어 보였다!
‘어떻게?’
짐작도 가지 않았다. 상상해본 적조차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대응법 또한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니, 사실상 대응할 방법 자체가 없었다. 자신이 이미 최후의 비기를 발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놓을…… 수가 없어!’
쟈빌론은 이를 갈았다. 황태자의 거대해진 팔뚝을 여전히 붙들고 있는 자신의 손아귀. 놓고 싶었다. 떨어지고 싶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발동하고 있는 최후의 비기가 흡입력을 발휘하는 탓이었다. 마치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이익! 이이익!”
버둥거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슴이 쿵, 쿵, 뛰었다. 식은땀이 콸, 콸, 솟아났다. 절망적인 예감이 3번 경추를 마구잡이로 후려쳤다. 끝이다. 이대로는. 망한다!
‘아, 안 돼!’
그는 자신의 최후의 비기를 떠올렸다. 체내의 순수 마나를 겨루는 기법. 체격에 정비례하는 승부의 방향. 그런데 지금 황태자는 오우거보다 거대해진 채로 자신을 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저 의미심장한 웃음의 뜻은 명확했다.
‘망했…….’
암울한 깨달음이 그의 후두부를 탁 치는 순간, 최후의 비기가 브레이크 박살 난 기관차처럼 바닥을 탁 치며 본격적으로 급발진을 시전했다.
콰아아아아-!
체내의 순수 마나가 모조리 활성화되었다. 동원되었다. 상대, 황태자의 몸을 향해 돌격했다. 그러자 황태자의 체내에 있는 순수 마나도 반응하며 마주 달려왔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이쪽보다 몇 배는 거대한 기세로.
콰앙-!
“……!”
바위에 부딪히는 계란이 이런 기분일까. 문틀에 전력으로 충돌 당하는 새끼발가락이 이런 느낌을 받으며 살았던 거구나. 그는 형벌을 감내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반성했다. 셀프 묵념을 헌사했다. 그리고 직감했다. 자신은 끝이라고.
그 순간 다시 한 번.
콰아앙-!
“……그억!”
왈칵!
벌어진 입에서 핏물 덩이가 뿜어져 나왔다. 확실하다. 고작 두 번의 충돌만으로 혈맥이 망가지고 있다. 체내의 순수 마나가 모조리 압살당하고 있다. 이젠 진짜로 한계다. 끝이다.
‘나는…….’
이루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이 나라, 민족을 더욱 영광스러운 자리로 올려놓고 싶었는데. 그 아름다운 선구자의 이름으로 역사에 새겨지고 싶었는데. 이런 곳에서 이런 꼴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줄은 몰랐는데. 정말로, 그랬는데.
‘후후, 후흐흐.’
웃음이 나왔다. 허망했다. 후련함? 그런 것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생에 대한 집착이 더욱 타올랐다. 이글거리는 눈길을 들었다. 자신을 대롱대롱 들고 있는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원념 어린 눈길로 쏘아보았다.
라키엘도 그의 눈빛을 느꼈다. 덕분에 잠깐 고민했다.
‘쓰읍. 이대로 죽여?’
문득, 마검황 속 스토리가 떠올랐다. 쟈빌론의 최후. 데미안과의 대결에서도 사용했던 최후의 비기. 그러나 데미안이 기지를 발휘하였던가. 덕분에 쟈빌론은 데미안 대신 전투마를 붙잡아 버리고는 최후의 비기를 발동하게 되었던가.
‘덕분에 졸지에 이름도 모를 말 한 마리와 순수 마나를 겨루게 됐지. 결과는 물론, 말보다 체급이 작아서 패배했고.’
그렇게 전신의 혈맥이 모조리 파괴되었다. 자신의 완수하지 못한 운명을 저주하며 죽음을 맞이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대로 쟈빌론을 계속 붙잡아 둔다면? 놈은 반드시 죽게 될 거다. 소설 마검황에서보다 더욱 확실하게.
‘하지만…… 쓰읍. 그럴 수가 없겠네.’
마음만큼은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끝장을 내 주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느새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 : 56초]
“…….”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 버렸다.
그런데 쟈빌론은 아직도 죽지 않고서 버티고 있었다. 한데 만약 확실하게 끝장을 내겠노라며 놈을 더 붙들고 욕심을 부리다간? 자칫 역공을 당할 각이 보였다.
‘만약 놈이 죽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놈을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 거대화가 풀리면, 내가 당하겠지. 그땐 내가 놈보다 체급이 한참 작아질 거니까.’
심지어 혼절해서 의식마저 잃어버릴 거다.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는 무력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그건 곤란하다. 욕심을 부리다가 어리석게 당하는 건 사양이다.
‘뭐, 어차피 벌써 반쯤 폐인이 됐으니까. 이쯤에서 놔줘도 나머지는 데미안이나 왕국군이 알아서 처리할 거고.’
라키엘은 결심했다.
쟈빌론을 떼어놓기 위해 다른 손으로 놈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되지가 않았다?
“……어?”
떼어지지가 않았다. 놈이 발동하고 있는 최후 비기의 흡착력(?)이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다. 마치 순간접착제로 붙여놓은 듯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어오, 씨. 큰일 났다.’
[현재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 : 51초]
시간은 재깍재깍 흘러가고.
놈은 끈질기게 안 죽고.
살짝 다급해졌다.
그래서였다.
‘떨어져라. 좀 떨어지라고!’
라키엘이 팔을 세차게 들어 올렸다. 더욱 강력하게 내리 휘둘렀다. 팔에 달라붙은 쟈빌론이 휙 딸려 올라갔다. 아래쪽 바닥으로 확 패대기쳐졌다.
콰앙-!
“……커억!”
그러나 놈은 강력하게 패대기만 쳐졌을 뿐, 도통 떨어질 줄을 몰랐다.
[현재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 : 47초]
‘어오, 좀! 떨어지라고!’
더욱 다급해진 라키엘의 움직임이 격해졌다. 옆으로 흔들고, 위로 흔들고, 아래로 훅훅 패대기를 치고.
그때마다 쟈빌론의 190센티 가녀린(?) 육신도 옆으로 트위스트를 추었다. 위로 홰까닥 흩날렸다. 땅바닥에 패대기쳐지며 온몸으로 멸망의 탭댄스를 추었다.
“떨어져라, 떨어져라, 떨어져라.”
“……컥! 긕! 억!”
쾅! 콰앙! 콰쾅!
“아 좀 떨어지라고.”
“그허억……!”
콰콰앙-!
어느새 주위가 조용해져 있었다. 아니, 평원 전체가 조용해졌다.
왕국군 근위대와 반란군 친위대도, 데미안도, 왕녀 아델린마저도, 멍하니 전투를 멈추어 버렸다. 발루아 요새의 왕국군도, 평원 반대편의 반란군도, 모두가 아연실색 망연자실한 눈으로 뜻밖의 참상(?)을 구경했다.
7.9미터 크기로 거대해진 라키엘. 그래서 우뚝 선 광고탑처럼 얼굴이며 표정이며 모든 것이 너무나 또렷하게 보이게 된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반란군의 수장이자 극강의 소드마스터인 쟈빌론을 한겨울 북어 먼지 털듯이 나풀나풀 패대기치는 광경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은, 지극히 압도적이고, 또한 초월적인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