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39화 (139/468)

139화. 내전 종결자 (2)

“떨어져라. 떨어져. 좀 떨어지라고.”

“……큽! 걱! 옯!”

쾅! 콰쾅! 쾅!

패대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마치 귀찮은 듯, 손끝에 묻은 코딱지를 털어 내듯, 그런데 생각만큼 잘 털어지지가 않아서 더 세차게 흔들어 보듯, 그렇게 라키엘의 거대한 팔이 휘적휘적 세차게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팔에 찰싹 달라붙은 쟈빌론이 나풀나풀 흩날렸다. 땅바닥으로 팍팍 내리꽂혔다. 그럼에도 좀처럼 떨어지지가 않았다. 물론 쟈빌론의 자의는 아니긴 했지만.

‘나…… 나는…… 커억……!’

억울하다.

그저 최후의 비기를 발동했을 뿐인데. 그걸로 흑발 호위를 끝장내려고 했을 뿐인데. 그러다가 난데없이 끼어든 황태자를 잘못 붙잡은 건데. 그래서 떨어질 수 없는 건데. 단지 그뿐인데.

‘왜 내가…… 이런 꼴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눈물은 눈꼬리에 맺히기도 전에 강력한 원심력과 중력가속도의 가호(?)를 받았다. 방울방울 공중으로 흩날렸다. 그리고 몸뚱이와 함께 바닥으로.

콰아앙-!

“……커허억!”

숨이 콱 막혔다. 뼈가 부러진 걸까. 알 수가 없었다. 전신이 다 아파서 어디가 부러진 건지 도저히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정신적 여유 또한 조금도 주어지지 않았다. 황태자의 거대한 팔이 인정사정없이 홱 치켜들렸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당장 죽여……!’

콰앙!

“……줘그헉!”

비참했다. 이런 꼴이 되려고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나 싶었다. 수많은 이들과 경쟁하고, 암투를 벌이고, 그들 대부분을 제거하고,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나 싶었다. 반란을 일으키고, 더욱 많은 목숨을 전쟁터로 몰아넣었나 싶었다.

허망했다.

여기서 자신이 죽으면, 지금까지 자신의 손에 죽어간 이들은 뭐였을까. 자신의 꿈에 제물로 바쳐진 이들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알 수가 없다. 다만 실없는 웃음만 흘러나올 뿐.

‘흐흐…… 흐흐흐……!’

문득, 황태자가 성자 군의관으로 위장하고 있던 때에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당시에 자신은 성자 군의관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했고, 성자 군의관은 뜻밖의 대답을 꺼내 놓았더랬다.

‘오직 누군가의 유혈과 희생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게…… 그게…… 나라냐고.’

당시엔 말문이 막혀 대답을 못 했다. 너무나 뜻밖이어서. 허를 찔린 듯해서. 내심 당황스러운 심정을 숨겨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대답할 수 있겠다.

이 꼴이 되어 보니까.

막상 이렇게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으려니까.

이제는, 알겠다.

‘원래…… 나라라는 게 그런 거야.’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희생하고 있는 거다. 이곳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역사에 반역자로 새겨짐으로써,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불명예의 상징이 되는 것으로써.

그렇게 이 목숨을 핏값으로 바치고 있는 거다. 이 나라와 민족에 하나의 이야기를 남겨 주는 거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해석되건 간에 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쟈빌론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빛이 향하는 곳. 그곳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자신의 경쟁자가 있었다.

앙부아즈 왕실의 제1 왕위계승자.

왕녀 아델린이었다.

그녀는 경악에 찬 시선으로 라키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믿기지가 않았다. 황태자가 갑자기 저렇듯 거대해진 상황도. 소드마스터인 쟈빌론을 장난감 다루듯이 바닥에 연거푸 패대기치고 있는 저 모습도. 마치, 가장 엉뚱하고도 기이한 취향의 꿈을 꾸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였다.

“……이봐.”

툭툭.

그녀가 다치지 않은 쪽 팔을 들었다. 옆에 있던 사람을 툭툭 쳤다. 그녀의 손길에 반란군 친위대 기사가 움찔, 놀라며 멍한 상태에서 깨어났다.

왕녀가 반란군 친위대 기사에게 물었다.

“내가 보고 있는 저거, 진짜가 맞아?”

“그런 것 같은데 말입니다…….”

반란군 기사가 얼결에 대답했다. 왕녀가 반란군 기사를 쳐다보았다. 반란군 기사도 왕녀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과 강철 건틀렛을 부딪치며 죽일 듯이 싸우던 사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싸움이 전부 의미 없게 느껴졌다.

“내가 보고 있는 저 모습이 정녕코 사실이라면, 이제 다 끝난 듯한데.”

“……동감입니다.”

반란군 기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철그렁! 요란하고도 나직한 소리와 함께 기사의 장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스스로 검을 놓은 것이었다.

그 소리가 평원의 나머지 반란군 친위대 기사들을 일깨웠다.

“…….”

철그렁, 철겅.

쟈빌론이 당하는 참상(?)을 멍하니 보던 반란군 기사들이 하나둘, 스스로 검을 놓기 시작했다. 거친 숨을 내뿜던 말을 진정시키며 말에서 내렸다. 투구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뜻은 명확했다.

더는 싸울 의지가 없다는 몸짓, 항복의 의사였다.

왕녀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다시금 라키엘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라키엘의 한쪽 손이 거대한 딱밤을 장전(?)했다. 아무리 흔들고 패대기를 쳐도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쟈빌론을 겨냥했다.

‘그래. 운전하면서 신호 받을 때, 정차 중에 생각 없이 코 파다가 코딱지가 손가락에 붙어 버릴 때가 있잖아? 그땐 손을 아무리 흔들어도 코딱지가 떨어지지가 않았지. 그럴 땐 이게 최고였거든.’

창문 슬쩍 내리고, 반대편 손 딱밤으로 때려서 코딱지 날리기!

라키엘은 한국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팔을 들어 올렸다. 대롱대롱 매달린 쟈빌론이 축 늘어진 채로 함께 딸려 올라왔다. 그런 쟈빌론을 인정사정없이 겨누었다. 딱밤을 장전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끝까지, 힘을 응축시키고, 모으고, 영혼까지 압축했다. 그동안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이 재깍재깍 줄어갔다.

[현재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 : 31초]

‘떨어져라, 좀!’

주문을 외우듯 외쳤다.

한계까지 응축한 딱밤의 힘을 개방했다. 아니, 발사했다.

투콰앙-!

“……궵!”

그걸로 끝이었다.

옆구리에 딱밤을 맞은 쟈빌론이 팔에서 똑 떨어졌다. 웅장한 트위스트를 추며 허공을 나풀나풀 날아갔다. 약 30미터 비거리의 아름다운 비행 끝에 1,580도 앞구르기를 선보이며 널브러졌다. 흙먼지가 피어났다가 가라앉았다.

그러나 쟈빌론은 일어나지 못했다. 그저 망가진 레고처럼, 혹은 현대미술품 같은 자세로 혼절해 버렸을 뿐이었다.

강대한 소드마스터의 비참한 몰락이었다.

그 모습에 발루아 요새의 왕국군이 술렁거렸다. 특히, 요새 관문 감시탑에서 평원의 사태를 지켜보던 국왕 메로뱅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보고 있는 저것이…… 정녕 현실이란 말인가……?”

그는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혹은 오늘 아침에 먹은 음식이 뭔가 잘못되었나 싶기까지도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정말로 사실이었다.

주름진 손등으로 거칠게 눈가를 비비고 보아도 그러했다.

‘어찌 저런…….’

흙먼지 속에 널브러진 남자. 아까 추격전이 시작될 때까지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멀리서도 그가 밝혀내던 오러의 빛은 너무나 찬란했으니까. 그런 오러를 발산할 수 있는 존재는 반란군 전체를 통틀어서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

‘쟈빌론.’

감히 자신에게 검을 겨눈 반역자. 그러나 쉽게 꺾을 수는 없었던 소드마스터. 그랬던 쟈빌론이 너무나 무력한 꼴이 되어 쓰러졌다. 심지어, 너무나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인간에 의해서.

국왕의 곁을 지키던 소드마스터, 이드리스 경이 수염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믿기진 않사오나, 적어도 환영 마법이나 눈속임은 아닌 듯하옵니다, 전하.”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더욱 현실 같지가 않아.”

국왕의 목소리도 떨렸다.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인간이 반란군의 소드마스터인 쟈빌론을 쥐 잡듯이 패대기쳐서 잡아 버린 이 상황을, 누가 현실적이라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만약, 한 시간 전쯤에 누군가가 와서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면?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라며 감옥에 집어넣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건 현실이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진짜였다.

게다가 저 거대한 인간이…… 마젠타노의 황태자처럼 보였다! 그게 제일 문제였다!

‘대체 왜?’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걸까. 언제 온 걸까. 무얼 목적으로 저러는 걸까.

머릿속 가득 의문이 백만 가지쯤 떠올랐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하나도 없었다. 생각할수록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래서였다.

국왕 메로뱅거는 지금 확실한 사실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전군, 출진을 준비하라!”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거대해졌건 어떻건 상관없다. 황태자가 왜 저런 모습으로 여기에 나타난 건지도 상관없다. 그런 것들은 나중에 밝혀도 된다.

반면, 내전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만 끝낼 수 있다. 반란군의 수장이 무너진 지금이 찬스다. 이걸 놓치면 바보다.

“관문을 열라!”

굳게 닫혀 있던 발루아 요새 관문이 열렸다. 진군의 북소리가 울렸다. 그때마다 라키엘의 가슴도 쿵, 쿵, 뛰었다.

“하, 하하…….”

해냈다.

곳곳에서 항복의 뜻을 드러내는 반란군 친위대 기사들. 진군을 준비하는 왕국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직감할 수 있었다.

‘반란군…… 이제 무너지겠구나.’

널브러진 쟈빌론의 모습이 보였다. 강력했던 소드마스터가 허망하게 무너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문득, 소설 마검황 속 설정이 떠올랐다.

‘이 세계에서 소드마스터는 절대적인 비대칭 전력이었지, 아마.’

그랬다.

현대의 지구로 따지자면 핵무기와 같은 위상을 지닌 존재가 소드마스터였다. 소드마스터는 오직 소드마스터로만 대적할 수 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만약 두 국가가 전쟁을 치르는데 한쪽에 소드마스터가 없다면? 그걸로 그 전쟁은 끝이다. 한쪽의 소드마스터가 상대국의 지휘부에 난입해서 칼춤만 추면 그날부로 지휘부가 몰살될 거니까.

그렇기에 전쟁을 억제하려면 소드마스터를 보유해야 한다.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다. 한데 반란군은 방금,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던 소드마스터를 잃었다. 반면 왕국군에는 아직 한 명의 소드마스터가 남아 있다.

그러니까 이제, 승부의 추가 확연히 기울었다. 그걸 알기에 반란군 친위대 기사들도 항복을 하는 거겠지. 평원 반대편의 반란군도 크게 술렁이는 것일 테지.

“……하아.”

한숨이 나왔다. 쌓였던 피로감이 한꺼번에 훅 몰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시야 한쪽의 경고창에서는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이 차곡차곡 줄어들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요란한 메시지가 주르륵 올라오고 있기도 했다.

딩동!

[당신은 소드마스터와 체내의 순수 마나를 겨루는 진귀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또한, 당신은 그 진귀한 소모전의 끝에 기적 같은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당신의 마나써클에 특별한 히스토리로 새겨져, 폭발적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아스라한 심법의 등급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명 : 아스라한 심법]

[단계 : 더블 써클 Lv.1]

[마나 증폭률 : 400%]

……키이이이잉-!

메시지가 떠오르는 순간, 심장을 둘러싸고 있던 한 줄기의 마나써클이 세차게 회전했다. 포효했다. 두 줄기로 분열했다. X자를 그리듯 교차하며 심장을 둘러쌌다. 전에는 느껴 본 적 없는 미증유의 강대한 힘이 심장 둘레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 힘을 더는 만끽할 수가 없었다. 추가로 떠오르는 축하 메시지도, 보상 알림도, 오장육부의 환호성도, 더는 들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떠오른 검붉은 경고 메시지가 다른 알림을 뒤덮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딩동!

[현재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 : 0분 0초]

머릿속에 울리는 경고음.

시야를 온통 점령하는 경고성 메시지.

[거대화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당신이 복용한 빨간 해바라기씨는 인간이 아닌, 환상종 전용의 보조 식품입니다.]

[거대화가 종료되며 당신의 신체에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현재 시점으로부터 향후 120시간(5일) 동안, 당신은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굿나잇?]

덜컥!

“……!”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감각.

동시에 전신에서 힘이 풀리는 느낌.

급속도로 세상이 흐리게 보였다. 진군을 준비하는 왕국군의 군단도. 선두에 얼핏 보이는 국왕 메로뱅거의 모습도. 황급히 이쪽을 부축하는 데미안과 왕녀의 손길도. 거기까지 눈에 담았다. 고개가 떨어졌다. 버틸 수가 없었다. 무릎이 꺾였다. 의식이 바닥으로 푹 꺼졌다.

‘하지만…… 괜찮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저 보너스 수명만 벌어 보려 참여했던 내전에서, 이런 식의 활약을 해 버릴 줄은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닷새나 기절해 있어야 할 신세가 될 줄도 몰랐다. 생각할수록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다.

내전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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