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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143화 (143/468)

143화. 나를 반기는 사람들 (3)

와락!

라키엘은 만년설을 꽉 움켜쥐었다. 마나를 주입했다. 파츠츠, 피어나는 1.5미터 지름의 냉기 실드 뒤에 웅크리고서 가만히 생각했다.

‘아, 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됐지.’

그는 망연자실한 눈길을 들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 정면. 반듯하게 깔린 연무장 고운 모래 건너편 5미터 거리. 그곳에 묵직한 보검을 비스듬히 들고 있는 장년의 남자가 있었다.

황제였다.

“준비는 되었느냐?”

……아니오.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어색한 미소를 어거지로 입술에 밀어 올렸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했다. 나는 진짜로,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라고.

그러자 문득, 30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와락!

갑자기 어깨를 감싸던 감촉.

커다란 품이 격정을 담고서 이쪽을 덥석 안았다. 덜컥, 빈약한 멸치파(?) 몸매 때문에 잠깐 뒤로 넘어질 뻔 휘청했다. 빈곤한 척추기립근으로 분발하며 간신히 버텨냈다. 그러고 나서야 사태(?)를 깨달았다.

‘황제가?’

……날 반갑게 끌어안았다고?

처음엔 믿기지가 않았다. 이 양반이 미쳤나 싶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황제는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냅다 이쪽을 끌어안았고, 덕분에 이쪽은 졸지에 팔자에도 없던, 레슬링파 UFC 선수의 테이크다운을 디펜스하는 기분을 만끽해야 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숨이 막혔다!

끌어안는 힘이 너무 강력했다!

‘컥, 커걱, 긔긕!’

부자간의 감동적인 포옹? 평소에 다투던 사이의 감격적인 해후? 그 뒤를 따라오는 어색한 침묵?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건 기분만 어색하지, 적어도 팔다리와 갈빗대가 가지런하게 세트메뉴로 뽀개질 것 같은 위기감은 느끼지 않아도 될 테니까.

‘자, 잠깐! 스톱! 타임!’

속으로 외치며 나름 열심히 버둥거렸다. 그제야 황제도 이쪽의 파리해진 안색을 깨달은 듯했다. 황제의 눈빛이 잠깐 흠칫. 이내 격정적이던 살인성 바디초크, 아니, 포옹이 풀렸다.

“……거헉! 쿨룩! 콜록!”

“그래, 무사히 다녀왔더냐?”

예, 무사히 다녀왔지요. 그리고 방금은 갈빗대 완전 골절의 위기에서 간신히 탈출했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대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예를 표했다.

“후, 후욱, 제국의 합당한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후우하, 뵈옵나이다.”

“그렇구나.”

“…….”

설마 인사는 이게 끝?

라키엘은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황제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얼른 피했다.

“…….”

“…….”

아까, 차라리 어색한 침묵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건 취소. 막상 겪어 보니 이런 침묵이 주는 정신적 피로감이 훨씬 큰 거 같다. 농담이 아니다.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서 있기만 했다.

그때였다.

고맙게도(?) 황제의 갈굼이 시작되었다.

“혹여나 방금 짐이 반가움을 표현한 행동에 의하여 아팠던 것이더냐? 고작 그 정도로?”

“…….”

“쯧쯧쯧. 나약한지고. 그 정도를 버티지 못하여 창백해지는 모습을 쉽게 보여서야 어찌 황좌의 무게를 짊어질 수 있을까.”

“…….”

“참으로 한심하고 또한 한심하도다. 한편으로는 의구심 또한 아니 느낄 수가 없구나.”

“의구심이라시면……?”

“그런 것까지 짐이 종알종알 일일이 알려 주어야 하겠느냐?”

“…….”

괜히 슬쩍 되물었다가 매만 벌었다.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의구심을 느끼기는 개뿔. 사실은 그냥 나오는 대로 꺼낸 말인 거,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다른 것도 느껴졌다.

황제의 본심이었다.

‘기뻐하고 있구나.’

이쪽이 무사히 돌아와서. 건강한 모습이라서. 이렇듯 마주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게 느껴졌다. 반갑고, 기쁘고, 흐뭇해하는 마음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아까, 처음 이쪽을 와락 끌어안을 때부터 그랬다. 처음 겪는 모습이 아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아버지.’

문득, 한국의 아버지 당신 생각이 났다. 중3 때였던가. 학교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었다. 한동안 통깁스를 하고서 지내야 했다. 버스를 타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승용차로 등하교를 도와주신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내내 저런 모습이셨다. 입으로는 매일 투덜거리셨다. 공놀이 하다가 다리나 다친 못난 녀석 운운하시고, 라떼는 다리 좀 다쳐도 엄살은 꿈도 안 꿨노라 타박하시고.

하지만 행동으로 보여 주시는 마음은 다르셨다. 가방도 못 들게 하셨다. 아예 교실까지 업고 가주실 기세셨다. 행여나 아픈 다리가 더 아프게 될까 봐, 낫지 않을까 봐 내내 걱정하셨다.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디선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오신 건지, 깁스를 풀 때까지 집안 냉장고엔 아버지가 손수 사 오신 우유와 멸치가 한가득이었으니까. 밥상엔 멸치 반찬 종류만 최소 5가지는 되었으니까.

‘내가 그때 평생 먹을 멸치는 다 먹었지.’

피식, 생각만으로도 미소가 흘러나왔다. 한데 그런 이쪽의 미소를 오해한 걸까. 황제의 눈썹이 꿈틀 찡그려졌다.

“무엇이더냐, 그 웃음은?”

“……예?

“지금 짐의 훈계를 들으며 웃음이 나오느냐?”

“예에?”

“아니 되겠구나. 너에겐 더욱 따끔한 훈계가 필요하겠구나. 마침 앙부아즈에서 네가 벌인 일을 논할 참이었으니, 대련 준비를 갖추어 연무장으로 오거라.”

“……예에에?”

연무장으로요? 대련을요? 제가요? 왜요?

머릿속으로 백만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황제는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휙 돌려 멀어졌다.

……덕분에 지금, 이 꼴이다.

연무장에서 황제와 마주하고서 만년설 냉기 실드 뒤에 거북이 모드로 온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은.

‘어오, 아깐 내가 왜 안면 근육을 씰룩거려가지고.’

황제의 본심에 훈훈함을 느끼는 게 아니었다. 잠깐 마음이 풀려서 옛 추억이나 더듬는 게 아니었다. 안면 근육 컨트롤을 흐트러뜨려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 라키엘은 각오를 다지며 만년설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황제가 자세를 잡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가겠노라.”

“…….”

꿀꺽.

이쪽 말고 저쪽으로 가주시면 참 좋겠지 말입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그 순간, 황제가 땅을 박찼다. 그의 모습이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 아니, 쇄도해 왔다!

쐐애액!

“……흡!”

반사적으로 만년설을 치켜들었다. 이미 경혈 스캐닝 옵션으로 황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터였다. 공격 방향을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강렬한 충격이 만년설을 때려왔다.

쩌컹-!

“긋!”

팔뚝과 어깨, 허리까지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강렬한 충격! 하지만 버틸 만했다. 기절을 막아 주는 격침불가 옵션을 발동할 필요도 없었다.

‘생각보다 쎄진 않은데?’

소드마스터인 쟈빌론의 맹공을 온몸으로 버텨 본 경험 덕분일까. 혹은 황제와 같은 더블 써클의 등급으로 올라선 까닭일까. 아니면, 둘 모두 때문일지. 황제의 공격이 생각보다 부담스럽지 않았다.

이어지는 맹공도 그러했다.

쩌컹! 쾅! 쯔컥! 콰콰콰콱!

상단, 중단, 측면, 하단, 상단,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아주 그냥 공격이 소나기처럼 일방적으로 쏟아졌다. 그때마다 절묘하게 반응하며 막아 냈다.

그러나 황제의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실은 쏟아지는 검격보다도 훨씬 위력적인 공격이 따로 있었다.

“후읍! 너는 어찌하여.”

콰앙!

“앙부아즈로 떠나기 직전, 짐과 맺었던 약속을 쉽게 저버렸단 말이더냐?”

쿠쾅!

“네가 그 입으로 직접 말하길, 안전한 후방에서 타국의 전쟁 수행 과정을 보고 익히며 경험을 쌓겠노라 하지 않았느냐?”

쩌컹!

“한데, 어찌하여 너는, 그토록 경거망동하여 스스로를 위험에 몰아넣었단 말이더냐.”

콰즈컹!

“대답 안 하겠느냐?”

투쾅!

“……긔익!”

절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물론 대답하고 싶었다. 말대꾸도 백 마디는 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워낙 황제의 맹공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와중이라, 반응하는 것만도 숨이 찼기 때문이었다.

“훅! 후, 후우욱……!”

역시나 저질 체력이 문제였다. 그동안 황제의 정신 공격(?)이 물리적 공격과 함께 쏟아졌다.

“또한, 너는 참으로 어리석고, 또 어리석도다.”

“……그읍!”

콰앙-!

“하나 묻자꾸나. 너는 자신이 지닌 지위에 대한 자각과 책임감이 없는 것이더냐? 정녕 그러한 것이냐?”

“크읏!”

투쾅-!

“만약 네가 잘못되었을 시에 황가가 겪을 공백과 혼란, 그것으로 생겨날 막심한 손해를 정녕코 생각하지 못하였단 말이더냐?”

“으읍! 그, 그게 아니오라!”

쩌컥-!

“아니면, 무슨 생각으로 소드마스터와 겨루는 만용을 저질렀단 말이더냐?”

“그, 그건…… 저도 원치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

투콰앙-!

“……겍!”

이번엔 진짜다. 제대로 감정이 실린 일격이다. 막아 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황제의 표정도 살벌하게 바뀌었다. 화가 치민 걸까. 이쪽을 노려보는 눈빛이 장난이 아니었다.

“너는 이 아비의 기대를, 황가가 네 어깨에 걸어 둔 미래를 장난으로 여기는 것이더냐? 정녕코?”

“…….”

라키엘은 말문이 막혔다. 더욱 견고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황제의 눈빛이 한결 서늘해졌다. 한층 공격적인 기세로 움직였다. 그러나 사실, 황제는 내심 흐뭇함과 경악감을 동시에 느끼는 중이었다.

‘이 아이가 벌써…… 더블 써클의 경지에까지 올라왔다고?’

아까, 치미는 반가움을 못 이겨 실수로 녀석을 끌어안아 버린 때였던가. 그때 아스라한 심법을 통해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큰아들의 기세가 달라져 있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일부러 꽉 끌어안으며 녀석의 반응 또한 살폈다. 그때부터 설마 싶었다. 더욱 확실한 확인 또한 해 보고 싶었다.

하여 연무장으로 불러들였다. 거세게 몰아붙였다.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제나 나약했던 큰아들이, 벌써 더블 써클의 경지에 올라서 있었다.

‘이게…… 가능한 속도란 말인가.’

경이로운 발전 속도였다. 아니, 경악스럽도록 비현실적인 성장 속도였다.

‘녀석이 처음 마나써클을 일깨웠던 것이 올해 초. 아직 한 해도 지나지 않은 터인데…….’

벌써 더블 써클이라니. 생각할수록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싱글 써클에서 더블로 올라서기까지 25년의 시간을 들였던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하였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거듭 큰아들의 냉기 방패를 후려칠수록 그 사실이 더욱 또렷한 현실로 다가왔다. 놀랍고, 경악스러웠다. 그만큼 흐뭇하고, 대견했다.

물론, 그럴수록 정작 황제가 꺼내는 말은 한결 서늘해졌다.

“참으로 한심하고 또 한심하도다. 황가의 미래를 책임질 황태자의 재목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가짐이로다. 대답하여 보거라. 너는 그토록 하찮은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앞으로 무슨 일을 이루겠다는 것이더냐.”

“……그으읏, 저는!”

콰앙-!

다시금 떨어진 일격. 라키엘의 다리가 살짝 후들거렸다. 그걸 본 순간, 검을 쥔 황제의 손아귀가 조금 느슨해졌다. 티가 나지 않도록, 아들이 자세를 수습하도록, 아주 잠깐 기다려 주었다.

라키엘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일단 저 공세부터 좀 끊자.’

계속 샌드백 신세가 되어 있으려니 억울했다. 언제까지고 계속 거북이 모드로 일방적인 수세에만 몰려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데 마침 황제의 주춤하는 모습이 보였다. 기회였다.

‘방패 치기!’

재빨리 반 발짝, 황제의 품을 향해 움직였다. 발디딤을 견고히 했다. 다리와 허리를 거쳐, 만년설을 쥔 상체로 힘을 전달했다. 마나써클에서 증폭되는 힘도 함께 실었다. 이대로 방패로 퉁, 하고 황제를 밀어쳐서 거리를 떨어뜨릴 작정이었다.

‘지금!’

후왁-!

만년설의 널따란 냉기 실드가 강철의 벽처럼 황제를 향해 쇄도했다. 라키엘의 눈빛에 반격 성공의 예감이 깃들었다.

‘됐다!’

황제가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 기습적인 반격 성공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황제가 이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싱긋, 눈웃음을 보내어 왔다. 마치 이쪽의 대응을 예상했다는 듯, 너무나 태연하게 한 발짝 스윽 물러났다.

“으엇?”

후욱……?

밀어친 방패가 허공만 때렸다. 덕분에 라키엘은 자세가 흔들리고 말았다.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만약, 황제가 손을 뻗어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제법 볼썽사나운 자세로 나동그라졌을 것이었다.

터텁!

“…….”

이쪽을 붙잡아 준 황제의 손길. 순간 얼굴이 시뻘겋게 뜨거워졌다. 기껏 반격을 하려다가 실패해서 이런 꼴이라니. 살짝 굴욕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굴욕을 만끽(?)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어느샌가 황제가 정체불명의 두툼한 종이뭉치를 품에서 꺼내어 면전에 불쑥, 내밀어 왔기 때문이었다.

“받거라.”

“……이건, 무엇이옵니까?”

자세를 바로잡으며 얼결에 뭉치를 받아 들었다. 황제가 묘하게 흐뭇해 보이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귀에 담자마자 내 귀가 잘못되었나 면봉을 찾게 만드는 말을 꺼냈다.

그것은 폭탄선언이었다.

“각국의 왕실과 유수의 대귀족가에서 앞다투어 보낸, 너에 대한 구혼장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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