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다이어트는 네 운명 (3)
‘……어?’
저도 모르게 흠칫.
라키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거 뭐야?’
그의 눈길이 뽀복이의 리포트, 아니, 일기를 빙자한 성분 분석표를 향했다. 실시간으로 쓰이고 있는 그 내용에서 온종일 품고 있던 해답이 보였다.
그 내용은…….
[오늘의 일기]
[주인이 오랜만에 먹을 걸 줬다. 술인데 엄청 맛있다고 유혹했다. 나한테만 제일 먼저 특별히 주는 거라고도 했다. 기분이가 무척 좋았다. 그런데 속았다. 술 완전 맛없어. 특히 T-카르니틴(Carnitine)이 최악이었다. 너무 고농축이라 짜고 신데 느끼했다. 먹자마자 온몸의 지방을 미토콘드리아로 팍팍 약탈당했다. 막을 수가 없었다.]
‘……T-카르니틴?’
처음 듣는 성분이었다. 흔히 지방 연소를 도와준다는 비타민 B의 복합체 L-카르니틴은 많이 들어봤지만, T-카르니틴은 금시초문이었다. 애초부터 그런 건 아예 존재하지 않으니까.
한데 저건 뭘까. 이쪽 세계에만 있는 특수한 물질인 걸까. 라키엘의 눈동자가 한층 바쁘게 뽀복이의 일기장을 훑었다.
[……특히 T-카르니틴 때문에 활성화된 지방산이 세포질 외막 효소에서 수산화기로 옮겨질 때가 제일 기분 나빠. 난 안 된다고 했는데 지들 멋대로 막 옮겨. 이건 약탈이야. 내 지방 돌려내. 내 통통한 뱃살 가져가지 마. 완전 단호박으로 말했는데도 씨알도 안 먹혔다.]
‘헐.’
진짜다.
라키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뽀복이가 일기장에 쓰고 있는 내용, 저건 자신이 알던 L-카르니틴의 대사 작용과 거의 똑같았다.
그런데 조금 다른 점도 있었다.
[……심지어 얘들은 1절, 2절, 3절도 모자라 뇌절까지 쳤다. 보통 이거랑 비슷한 L-카르니틴은 하루에 2g 이상 먹는 건 제한시킨다고 하는데, 얘들은 그런 것도 없다. 완전 미친 거 같다. 막 떼거리로 2g 훨씬 넘게 들어와서 와글와글 노는데 부작용도 없으면 이건 사기꾼 엄친아도 아니고, 인생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님?]
‘뭐어?’
사기다. 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원래 지방 연소를 팍팍 도와주는 카르니틴은 과도하게 섭취할 경우 각종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 그렇기에 일일 섭취량에 제한을 두는 편인데, 그 제한이 없다니? 심지어 많이 먹어도 부작용이 없다니?
‘진심…… 치트키 수준인데?’
생각할수록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렇잖아도 2황자 녀석의 다이어트를 더 빠르게 성공시킬 방법을 고민하고 있던 참인데. 때마침 이런 행운이 터지다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싶었다.
‘이거 너무 작위적인데? 혹시 신이라든가, 이 세계의 창조자라든가 하는 누군가가 의도한 상황인 거 아냐?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는데?’
살짝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걸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뭐, 어쨌건. 보통 L-카르니틴은 다이어트 보조제 약품에 많이 들어 있지. 그런데 그걸 리미트와 부작용 없이 먹을 수 있다면…… 후우.’
벌써부터 2황자의 날씬해진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미래도 새록새록 엿보였다. T-카르니틴이라는 사기적 물질이 잔뜩 함유된 베스파로스 여왕벌주. 만약 이걸로 정제를 만들어서 판다면?
‘볼 것도 다이어트 약품계를 휩쓸겠지. 그냥 아주 순식간에 서열 정리 수준으로.’
전 대륙의 수많은 비만인들이 지갑을 열어젖히는 미래가 절로 그려졌다. 아니, 아예 돈다발을 마차에 꽉꽉 실어서 달려올 수도 있으리라.
라키엘은 심호흡을 했다.
“좋아. 뽀복아?”
“뽀복?”
“오늘도 성분 분석 고마워.”
“……뽀!”
태연하게 죽었다가 살아난 뽀복이가 한쪽 눈을 찡긋. 라키엘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쑹컹쑹컹 피어났다.
이제는, 2황자의 지방을 활활 태워줄 시간이 왔다.
♣
2개월이 지났다.
다이어트는 혹독했다.
2황자의 체중이 무려 62킬로그램이 빠졌다.
딩동!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테오도르 팔레르모 마젠타노]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20세]
[신장 : 184.3 Cm]
[체중 : 88.1 Kg]
[혈액형 : Rh+ A]
‘……진짜로 됐다. 90킬로그램 언더, 2개월 컷 성공!’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정확히 60일째가 되는 날, 라키엘은 2황자의 진맥 결과를 보며 내심 환호했다.
[종합 소견 : 최근 과도한 비만 상태에서 급격한 감량을 겪으며 신체의 대사 기능이 교란되어 있습니다. 케토시스 지방 대사가 매우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급격한 감량으로 인하여 간과 콩팥에 피로가 누적되어 있습니다. 신체의 균형과 건강을 위해 1개월 정도의 휴식기를 가질 것을 권장합니다.]
[당신의 오장육부가 2황자의 다이어트 성공을 이끌어 낸 당신의 독한 성과에 예의상 박수와 진심 어린 우려를 보냅니다.]
[심장 : 키야. 지방 덩어리 하나 사람으로 만든 것 좀 보소ㅎ 독하다, 독해.]
[허파 : 허어…… 파핳ㅋ]
[대장 : 형님들? 저쪽 오장육부는 완전 혹사당했겠지 말입니다?]
[간장 : 내가 저렇게 살 빼는 입장이었으면 파업 마려웠을 듯ㅋ]
[위장 : 나였음 벌써 가출했음ㅋㅋ 탄수화물 없는 인생 x까ㅋㅋㅋ]
[콩팥 : 만약에 우리 몸뚱이가 저 난리 피우면 난 요로결석 만들어서 굴릴 거임. 누가 먼저 지리나 보자ㅋㅋㅋ 멸망전 on ㅋㅋㅋ]
“…….”
순간 소름이 돋았다.
뭐, 어쨌건, 이 정도면 그냥 성공 수준이 아니다. 이번에 2황자가 살을 뺀 과정을 누군가가 봤다면? 헬스장이나 약품 회사에서 다이어트 성공 사례로 써먹으려고 군침을 줄줄 흘리며 연락을 해왔겠지.
이건 그 정도로 대성공적인 다이어트였다.
“그렇지? 너도 느끼고 있지 않냐.”
라키엘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달라진 모습의 2황자 테오도르가 있었다.
“예, 형님. 덕분에 살이 찐 동안 맞췄던 옷들을 다 버려야 했으니까요.”
150킬로그램에 육박하던 출렁출렁 살덩이는 이제 없었다. 제법 다부진 체격의 훈남이 되돌아와(?) 있었다. 예전, 로이-하비교에서 대결하던 때의 테오도르가 날렵한 모델형 몸매였다면, 이제는 약간의 벌크업이 가미된 듬직한 모습이랄까.
‘베스파로스 여왕벌주의 효과가 컸지.’
처음 보는 미지의 물질, T-카르니틴의 효과는 대단했다. 섭취하는 순간부터 아주 그냥 지방을 핵융합 발전소처럼 태워 댔다. 심지어 신체의 피로 회복에도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그런 덕분이었다.
2황자가 원래 지니고 있던 아스라한 심법과 T-카르니틴의 조합. 그걸로 거의 사기적인 신체 회복을 실현할 수 있었다. 마치, 킹콩에게 남성호르몬을 풀세트로 먹이고 운동을 시키는 기분이었다.
온종일 운동을 시켜도 서너 시간만 재우면 쌩쌩해졌다. 근육에 쌓인 젖산이고 뭐고 투스타 사단장이 시찰하는 내무실처럼 말끔해졌다. 덕분에 철저한 식단과 휴식, 수영 등의 운동을 쉴 틈 없이 돌릴 수 있었다. 거기에 침술과 뜸으로 근육, 근막, 인대, 관절의 부상을 최대한 예방해 주었다.
가히 지방 덩어리 하나를 사람으로 빚어내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 2황자는 이제 예전의 폼(?)을 어느 정도 회복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너, 나한테 고맙진 않냐.”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그렇지?”
“예.”
2황자,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었다. 지난 2개월은 말 그대로 살을 깎아내는 노력의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온전히 자신의 노력 덕분일까? 아니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형님의 조언과 관리, 격려가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겠지.’
아예 별궁으로 거처를 옮겨온 덕분이다. 형님이 먹으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만 운동한 덕분이다. 그 와중에 무수하게 쏟아진 격려와 갈굼 덕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형님이 직접 담가서 숙성시켰다는, 기이한 맛이 나는 술 덕분이기도 하고.
“…….”
기이한 술.
그걸 생각하니 절로 혓바닥에 가시가 백만 개쯤 돋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그 술은 정말로 맛이 없었으니까. 태어나서 지금껏 먹어 본 모든 음식, 아니, 실수로 잘못 삼켰던 물건까지 포함해도 제일 맛이 없었으니까.
‘차라리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개똥이 더 감미로웠을 거야. 진심으로.’
그 정도로 심각한 맛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오우거 귓밥이 그런 맛이 아닐까 싶었다.
입에 머금는 순간 혓바닥을 잘라내고 싶어졌다. 삼킬 때부터 식도가 가출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위가 트위스트를 추고, 창자가 불러재끼는 종말의 세레나데 2중주가 귓가에 환청으로 울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입가심을 위한 사탕 한 쪼가리도 허락되지 않았다! 당분을 섭취하면 지방 대사 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덕분에 끼니마다 그 술을 한 스푼씩 받아먹어야 할 때면 얼마나 끔찍했던지. 형님께 넌지시 괴로움을 토로해보기도 하였다. 대체 뭘로 담근 술이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온 대답이라곤…….
‘에헤이. 이거 몸에 좋은 거라니까? 믿고 한 숟갈만 잡숴 봐. 츄라이, 츄라이.’
……가 전부였다.
그저 믿어야 했다.
그저 인내해야 했다.
자신의 믿음과 인내는 틀리지 않았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형님. 만약 형님이 아니셨다면, 그 격려 가득한 담금질이 아니었다면…… 저는 여전히 피둥피둥한 몸으로 2황자궁에 틀어박힌 채로 지내고 있었겠지요. 여전히 제 패배만을 곱씹으며 신세만 한탄하고 있었을 겁니다.”
“응. 확실히 그랬겠지.”
“예. 그래서 더욱 고맙습니다. 형님은…… 단지 제 살을 빼준 것뿐만이 아닙니다. 제 앞날과 인생을 구해 주셨습니다.”
“응. 확실히 그렇지.”
“하여 정말로 거듭, 감사드립니다.”
“응. 그런데 그게 끝?”
“……예?”
테오도르는 멈칫했다.
형님의 저 물음은 무슨 뜻일까. 은혜를 입었으니까 감사를 표하였다.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거듭 건넸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냐니. 그럼 뭐가 더 필요한 걸까. 그는 아리송함을 느꼈다.
라키엘이 혀를 찼다.
“쯧쯧쯧. 이거 이거. 사회생활의 기본이 안 돼 있네? 응?”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너, 나한테 감사하다며.”
“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런데 감사를 말로만 하고 땡이야?”
“……예?”
“말로만 하는 감사를 세상에 누가 못하겠느냐는 거지. 그런 건 길 가는 코흘리개 붙잡고 시켜도 당장 100번은 할 수 있을걸? 안 그래?”
“그건…….”
“당연히 그렇지. 한데 내가 너한테 말로만 퉁치고 넘어갈 정도로,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은혜를 베푼 거야? 내가? 2개월 내내 널 붙잡고 애쓴 게? 고작 그거밖에 안 돼?”
“아, 그건 제가 미처…….”
“생각을 못 했지?”
“예. 죄송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감사의 마음을 말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표현해야겠지요.”
“그렇지. 바로 그거지.”
비로소 라키엘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났다. 사실 이건 진리였다. 감사를 말로만 땡치고 넘어가는 경우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험난한 세상 살아가다가 은혜를 입었으면, 하다못해 삼겹살에 쏘주라도 쏘는 것이 강호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라키엘이 처음부터 노렸던 바이기도 했다.
“그럼 너,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부탁을 말입니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은 아니고.”
“예, 말씀만 하십시오, 형님.”
테오도르의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진심이었다. 정말로 너무나 커다란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2황자궁에 틀어박혀 있던 자신, 아무도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던 나날들, 그 와중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손을 내밀어 준 이가 형님이었다.
반드시 은혜를 갚고 싶었다.
그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리라. 성심껏 형님을 도와서 은혜를 갚으리라. 내가 하여 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형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성심껏 임하리라.
내심 결의를 다졌다.
그런 덕분이었다.
“좋아. 그럼 너, 나 대신 장가 좀 가 주라.”
라키엘이 태연한 얼굴로 방긋거리며 입을 열었을 때, 2황자는 문득 생각하고야 말았다.
x발 살 다시 찌워 버릴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