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1)
“좋아. 그럼 너, 나 대신 장가 좀 가 주라.”
“…….”
2황자, 테오도르는 침묵했다.
거창한 이유는 달리 없었다.
그냥 멍해졌다. 방금 자신이 뭘 들은 건지. 그냥 당장 시종에게 가장 크고 두툼한 면봉을 가져오라고 말해야 할까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한 번쯤 귓구멍을 뽀득뽀득 닦아낸 후에 형님의 말을 다시 경청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행히(?) 형님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 듯했다.
“왜? 이해가 잘 안 돼? 다시 말해 줄까?”
“…….”
끄덕끄덕.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의 입가에 뻔뻔한 미소가 양심 없이 걸렸다.
“나 대신 결혼을 해 달라고.”
“……어째서 말입니까?”
“어라. 이유를 묻는 거야?”
“그야 당연히…….”
“불과 1분 전에는 너, 내가 하는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던 거 같은데.”
“…….”
“이야. 우리 테오도르. 그랬어? 말만 고맙다는 거였어? 그랬던 거야?”
“아니, 그건…….”
“부탁 들어준다며.”
“하지만 형님…….”
“그래. 세상살이 다 이런 거지, 뭐. 진심으로 고마운 게 어딨어. 나한테 이득이 되니까 고맙고 그런 거지. 안 그래?”
“…….”
“내가 못 할 부탁을 했던 거구나.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으로 네 진심을 깨뜨린 거구나. 그래. 네 진심이 그 정도까지였던 게 뭐가 잘못이겠어. 네 진심이 이 정도까지였던 걸 알아채지도 못하고 눈치 없이 군 내가 나쁜 놈이지. 안 그래?”
“…….”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미안한 표정 지을 거 없다니깐. 나 안 서운해. 그냥 다른 부탁 할게. 사탕 아무거나 하나만 주라.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2개월 내내 너한테 착 달라붙어서 온갖 정성을 기울인 보답으로 사탕 하나쯤은 받아도 되는 거지? 사탕 하나 정도면 네 진심에도 딱 맞는 사이즈일 거 같은데. 안 그러냐?”
“……흐흐흑!”
“어, 왜 울먹이고 그러냐.”
“아니, 그게…….”
테오도르는 진심으로 억울했다. 형님께 정말로 고맙고 감사한 건 맞았다. 그런데 대뜸 꺼내는 부탁이란 게 자기 대신 장가를 가 달라는 거라니. 이건 상상도 못 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감이 오질 않았다.
“너무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워서 말입니다.”
“응. 그랬냐.”
“예. 지금도…….”
“그래. 알아. 헷갈리겠지. 뭘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지?”
“예…….”
“쯧쯧쯧. 그래그래. 원래 다 그런 거야.”
라키엘은 짐짓 2황자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생각했다. 역시 이 녀석, 착하고 성실한데 우유부단해서 고구마스럽다고. 소설 속 모습과 판박이라고.
‘그럼 슬슬 이유를 수긍시켜 줘야겠지.’
일단 크게 한 방 때리며 흔들고, 양심 어택(?)으로 심리적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 속으로 납득시킬 이유를 자연스럽게 들이붓기. 사전에 의도한 작전대로 그는 혓바닥을 촵촵 풀었다. 준비한 대사를 차례차례 발사했다.
“내가 이런 무리하게만 들리는 부탁을 하는 이유가 궁금한 거지?”
테오도르가 말없이 끄덕끄덕. 라키엘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싱긋. 태연하게 거짓말을 날름.
“내가 말했잖아. 나, 앞으로 살아갈 날이 1년도 안 남았다고.”
“……아.”
“이젠 알겠어?”
“예, 조금은.”
테오도르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라키엘은 입꼬리에 걸린 미소를 한결 아련착잡한 색채로 꾸몄다.
“그래. 네가 짐작한 그대로야. 난 시한부 인생이니까. 하지만 그걸 아직은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은 상태니까. 한데 그걸 자연스럽게 알리기도 전에 구혼장이 수십 다발이나 날아왔어.”
“엄청나게 난처하시겠군요.”
“그래. 바로 그거지. 얼마 살지도 못할 주제에 그걸 숨기고서 결혼을 해 버리면, 그것도 엄청난 민폐가 아닐까.”
“하면 형님, 그 사실을 솔직하게 밝히면서 거절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응, 안 돼.”
“어째서…… 말입니까?”
“내 수명에 대한 사실은 최대한 늦게 알려질수록 좋으니까. 특히, 아직 건강이 다 회복되지 않으신 폐하께는 더더욱.”
“……아.”
“너도 알잖아? 폐하께서 얼마나 위독하셨는지. 얼마나 기적적으로 회복을 하신 건지.”
“예, 압니다.”
“그래서야. 폐하께선 겉으로는 예전처럼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 걸로 보이시지만…… 그럼에도 후유증은 남아 있어. 위험성도 남아 있고. 갑자기 큰 슬픔이나 격앙에 빠지면 언제 다시 지난번처럼 병환이 터질지 몰라. 그런데,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내 수명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시면 어떨까.”
“후우. 그런 이유가 있었을 줄은…….”
“몰랐지?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았다.”
“예.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뭔데.”
“제가 형님 대신에 구혼장의 이들 중 하나와 혼인을 한다고 치면…… 어떻게 해야 혼인을 할 수 있을까요?”
테오도르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어디까지나 쏟아져 들어온 구혼장은 모두 자신의 형님, 황태자인 라키엘을 향한 것이었다. 저들의 목표에 자신은 없다는 뜻이다. 한데 이쪽이 바란다고 해서, 저들 중의 하나와 혼인이 성립될 수 있을까.
그 의문에 라키엘이 싱긋 웃었다.
“할 수 있어. 저쪽이 하고 싶게 만들어 줘야지.”
“저쪽이…… 말입니까?”
“어. 저쪽이 먼저 너한테 매달리게 하면 돼. 흔하잖아? 눈 맞는 거.”
“…….”
“2황자궁에서 연회를 열 거야. 구혼자들을 초대하고, 네가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서면 돼. 그 후엔 눈이 맞아서 누구도 말리지 못할 기세로 결혼까지 골인. 그러면 되는 거거든. 그 틈에 나는 들러리로 물러나는 거고.”
“…….”
“어때? 할 수 있겠어?”
“예. 그런데 이제야 좀 깨달을 것 같습니다.”
“뭘?”
“처음부터 이런 부탁을 하려고 절 감량시킨 거였군요.”
“당연하지.”
“…….”
“그래서, 싫냐?”
“아, 그건 아니고…….”
“그럼?”
“좀 속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일찍도 깨달았구나.”
“…….”
“후후후.”
“…….”
너무나 뻔뻔하게 돌아오는 대답. 테오도르는 그만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하지만 불만은 생기지 않았다. 말은 저렇듯 얄밉게 하지만, 황제 폐하와 황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형님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저, 형님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자신이 홀라당 속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채, 테오도르는 나름의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다음 날, 구혼장에 대한 답장을 실은 전서구 수십 마리가 별궁에서 날아올랐다. 그것은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주최하는, 2황자궁에서 열릴 연회의, <선착순 50명 컷>의 단호한 내용을 담은 초대장이었다.
♣
며칠 후.
각국의 왕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귀족 가문이 출렁거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라키엘이 보낸 구혼장의 답신 내용 때문이었다.
“……뭐어? 선착순 50명?”
“50명 안에 들지 못하면, 연회에 입장할 수 없다고?”
“정말로?”
“진심?”
어느 왕가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대귀족 가문의 후원에서는 답신의 진위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곧, 모든 이들은 심플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건 진짜다!’
마젠타노 황가의 공식 마법 인장이 찍힌 답신이었다. 심지어 전서구는 강력한 마법으로 보호를 받으며 날아온 터였다. 애초부터 위조가 불가능한 상황. 그렇다면 답은 뻔했다.
‘진짜야. 절대 거짓일 수가 없어. 연회를 황태자가 기거한다는 별궁이 아닌 2황자궁에서 개최한다는 게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건 이건…… 늦으면 안 돼!’
그렇다.
제국의 황태자에게서 돌아온 답신이 선착순 50명 컷 입장권이었다. 그 뜻은? 저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면 혼인의 가능성이 날아간다는 뜻이었다!
“……당장 마차를 준비하라!”
각국의 왕실이 분주해졌다.
대귀족 가문이 바빠졌다.
가장 빠르고 튼튼한 마차를 부랴부랴 준비했다. 엄선한 명마를 줄줄이 장착(?)했다. 가장 명성이 자자한 마부가 선발되었다. 장거리 여행의 과정에서 마차에 문제가 생겼을 때 즉각 수리할 수 있을 기술자도 고용되었다.
거기에 각국 최강의 기병대가 호위로 붙었다. 신속한 물자 보급을 위한 작전도 수립되었다.
“출발!”
지체할 틈이란 없었다. 낭비하는 시간은 잠재적인 경쟁자들에게 주어지는 꿀이 될 터였다. 그렇게 각국의 고귀한 레이디들이 가문의 혼사와 자신의 미래를 건 맹렬한 레이스(?)의 대장정에 올랐다.
“이랴! 이랴아! 하!”
투두두두두!
수십 대의 마차가 각자의 출발지에서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승차감? 그런 건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오로지 속도만이 생명이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평소 고귀한 대접만을 양동이째로 퍼받던 레이디 본인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대체 왜 그렇게 채찍질이 느린가요? 달려요, 더! 빨리!”
“와, 왕녀님?”
“이렇게 좀!”
쫘악! 쫘악!
어느 소국의 왕녀는 피로에 절어가는 마부를 밀어내고 마부석을 강탈하는 용맹(?)을 발휘하였다. 또 어떤 대귀족가의 장녀는 진창에 빠진 바퀴를 빼내기 위해 드레스 자락을 걷어붙이고서 직접 마차를 밀기까지 하였다.
그 끝에 승자와 패자가 가려졌다. 한 달이 지나는 사이에 레이디들이 속속 황도 마젠타에 도착하였다. 1위부터 50위까지가 일사불란하게 가려졌다.
한데 그 이후에 도착한 지각자들은?
얄짤 없었다. 에누리없이 빠꾸(?)를 당했다. 패자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모국으로 걸음을 돌려야 하였다. 물론 그렇듯 서럽게 손수건을 적시며 돌아가는 레이디들은 자신이 선보였던 뜨거운 경쟁의 레이스가 후세에 어떻게 전해질지, 까맣게 몰랐다.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수많은 레이디가 혼인의 열정을 불태운 대장정이었다. 이러한 업적(?)은 충분히 기념될 만한 일이었다. 유구한 전통으로 승화시키고 싶어질 사건이었다.
하여 후세의 인류가 5년마다 초장거리 여성부 다국적 마차 레이스를 개최하게 되리라는 사실도, 제국의 황도 마젠타를 결승점으로 삼을 이 정기적인 대회가 ‘임페리얼 마차르 랠리’라 불리게 되리란 사실 또한, 당사자들은 꿈에도 몰랐다.
어쨌건, 그렇게 1개월이 지나는 사이에 2황자궁의 연회 준비도 착착 갖추어졌다. 원래는 최소 3개월은 잡아야 하는 황가의 연회 준비 과정이었다. 그러나 뼛속부터 한국인인 라키엘 앞에선? 3개월은 사치에 불과했다.
“빨리빨리!”
“아 좀! 빨리빨리!”
연회를 준비하는 내내 시종과 시녀들의 구호는 ‘빨리빨리’가 되었다. 그런 덕분(?)이었다. 연회 준비가 무려 1개월 만에 깔끔하게 끝났다. 그리고 마침내, 2황자궁의 연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한편.
“……드디어, 찾았다.”
연회에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 하나가 2황자궁의 정원 한쪽, 무성하게 피어난 겨울꽃 사이로 스며들어 라키엘을 주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