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50화 (150/468)

150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2)

빛나는 샹들리에.

그 아래에서 더욱 빛나는 미소.

2황자궁에서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메인홀에 초청된 수많은 이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륙 곳곳의 왕국, 공국, 소국의 왕녀들이 모두 모였다. 개중에는 대귀족가의 내놓으라 하는 레이디도 있었다.

다들 혹독한 레이스를 거친 영애들이었다. 짧게는 수백 킬로미터에서, 길게는 천 킬로미터 이상의 여정을 소화했다. 그토록 치열했던 50인 컷의 선착순에 성공한 여인들의 눈빛 가득, 자부심이 배어났다.

동시에 그녀들은 기대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는 어떤 분이실까?’

궁금했다.

소문이야 일찌감치 듣기는 하였다.

태어나던 때부터 몸이 병약했다는 황태자. 언제나 갖가지 지병을 달면서 자랐고,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소문마저 파다했던 황태자.

하여 아무도 지금껏 황태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더랬다. 이곳에 모여든 영애들도 마찬가지였다. 곧 죽을 사람, 없는 사람 취급을 하였다. 얼마 전, 충격적인 소문이 퍼지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하였다.

‘전쟁터에 등장해서 소드마스터를 제압하셨다니. 그럼 그동안 퍼졌던 병약하단 소문은 모두 위장이었던 거야. 그럼 황태자는…… 사실은 일부러 능력을 숨기고서 지내어 온 겸손한 분이 아닐까?’

‘최근에 듣기로는 별궁에 병원을 열어서 병든 이들을 차별 없이 무료로 돌본다던 것 같던데…… 아마도 자상한 분이실 거 같아.’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왜 별궁이 아닌 2황자궁에서 연회를 하는 건지 조금 이상했는데…… 와서 보니까 알겠어. 황태자께서는 별궁에 머무르는 환자들이 편히 쉬길 바라신 거야. 어쩜, 그렇게 배려심마저 갖추셨을까.’

……등등, 등등. 각자의 뇌리 속에서 망상의 나래가 8K 영상으로 좌르륵 펼쳐졌다.

황태자의 입장을 기다리는 사이, 메인홀에 모인 레이들의 뇌리 속에서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는 지상 최고의 핫가이, 용맹함과 자상함과 배려심까지 모두 갖춘 완벽남의 아이콘으로 쇽쇽 조립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악단의 잔잔하던 연주가 멈추었다.

“이곳에 모여 주신 이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제국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전하께서 입장하심을 알려드립니다.”

2황자궁 시종장의 정중한 안내가 모두의 달팽이관을 폭 찔렀다. 뒤이어 악단의 연주가 재개되었다. 힘 있고, 웅장하며, 장대한 선율이 메인홀을 당당하게 뒤덮었다. 여인들의 2심방 2심실을 쿵더덕쿵덕 찰진 가락으로 흔들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여인들의 눈빛이 초신성 서치라이트 상향등처럼 번쩍 빛났다. 모든 시선이 열린 문으로 일점사 되었다. 마침내, 오늘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팡이를 짚고서, 창백한 면상과 후들거리는 다리로…….

“끄흐응↗”

“…….”

라키엘의 입에서 노인네 같은 신음성이 흘러나오는 순간. 지팡이를 짚은 그가 레드카펫 위로 후들거리는 첫걸음을 내디딘 순간.

모두가 침묵에 잠겼다.

그러나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아이고, 끄으흥.”

탁, 탁.

빈약한 몸뚱이를 달달 떨며 힘겹게 걸었다. 보폭은 불과 10센티 남짓이었다. 그만큼을 걷는 데에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마치 90살 먹은 노인네라도 되는 듯, 지팡이가 없다면 당장이라도 나동그라질 것처럼 위태로운 걸음이었다.

반면, 메인홀 가득 깔리는 음악은 여전히 웅장했다. 지배자의 장엄함과, 젊은 권력가의 매혹적인 대담함을 모조리 담아낸 명곡이 가슴을 찌르르 울리려……다가 죄다 고막 밖으로 튕겨 나갔다.

라키엘의 모습 때문이었다.

‘저게…… 뭐야?’

각국의 왕녀, 대귀족가의 영애들, 레이디 일동은 한마음 한뜻으로 생각했다. 이거,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아무래도 주최 측의 농간이 있는 것 같다고.

그러니까…… 황태자 라키엘의 몰골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지팡이?’

‘저게 없으면 못 걷는 거야?’

‘걸음이 왜 저래? 아니, 몰골이 어째서 저런 거지?’

‘황태자…… 맞아?’

‘정말?’

모두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백만 개씩 쑴펑쑴펑 솟구쳤다. 기대감으로 한껏 콩닥거리던 여인들의 가슴이 본격적인 심정지 상태로 돌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끄흐, 흐응? 아이고, 다리야…… 헉헉.”

레드카펫 위를 불과 3미터 이동한 라키엘이 걸음을 멈추었다. 허리를 쭈욱 펴며 힘겹게 숨을 골랐다. 영락없이 동네 뒷산 약수터에 산책을 나온 할아버지 같은 몸짓이었다.

그의 모습은 더욱 가관이었다.

은발 머리칼은 윤기조차 없이 푸석푸석했다. 양쪽 볼은 퀭하니 움푹 들어가 있었다. 눈가는 더했다. 아예 해골처럼 시커먼 다크써클이 점령했다. 안색은 당장 관짝에 누워 있으면 어울릴 정도로 창백했다. 아니, 아예 한 줌의 생기도 엿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화려하게 걸친 옷 사이로 얼핏 드러난 손목은 어떠한가. 그냥 아예 뼈와 가죽밖에 없었다. 심지어 등은 벌써부터 굽어 있고, 무릎은 만년설산에 내던져진 치와와 앞발처럼 달달달 떨리고 있었다!

‘뭐야. 저거 진짜 뭐야?’

‘이거…… 꿈 아니지?’

‘내가 저런 사람 눈에 들겠다고 그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온 거라고?’

‘……장난해?’

레이디 50인의 눈에 씌워졌던 콩깍지가 한 큐에 싹 벗겨졌다. 모두는 찬물 세례라도 덮어쓴 듯 저도 모르게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안 그러기엔 황태자의 모습이 너무 심했다. 이건 거의 사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덕분에 라키엘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 작전 성공!’

일부러 한껏 후덜덜 다리를 떨어대는 라키엘의 입꼬리에 아무도 못 알아볼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자신을 향해 실시간으로 투파팍 꽂히는 극혐의 시선. 그걸 보니, 오늘의 변장이 매우 성공적(?)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당연하지. 이거, 궁정마법사 자네티스 경의 작품이니까!’

아까 연회가 시작되기 전이었던가.

자네티스 경을 불렀다. 미리 부탁해둔 하루짜리 변장 마법을 받았다. 덕분에 원래 모습보다 훨씬 빈약한 몰골을 갖출 수 있었다. 2황자궁 시녀들에게선 초췌한 메이크업을 받았다. 거기에 나름 혼신의 정성을 기울인 연기까지 첨가되니?

가히 완벽한 병자 코스프레가 가능해졌다.

‘후후후. 실망해라. 그렇게 더, 날 보면서 실망해라!’

라키엘은 레이디들을 응원(?)하며 힘겨운 척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일부러 지팡이질을 삐끗했다.

“끄응…… 이흣?”

기우뚱!

지팡이 잘못 짚어서 넘어지기!

동시에 옆으로 슥샥 재빠른 눈짓을 보냈다. 그 눈짓을 간파한 데미안이 적절한 타이밍으로 손을 뻗었다. 넘어지던 이쪽을 붙잡아 주었다.

“허흐흐, 고, 고맙군.”

그다음부턴 데미안에게 거의 업히다시피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여전히 당당하고 웅장한 음악을 배경으로 삼아. 그렇기에 더더욱 빈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몰골로.

덕분에 쏟아지는 레이디들의 시선이 더욱 냉랭해졌다. 그녀들의 번민에 잠긴 눈초리를 보자니, 씁쓸함과 만족감이 반반 짬짜면처럼 뒤섞여서 올라왔다.

‘뭐, 소개팅을 나가서 저런 실망감 깃든 시선은 제법 받아봤으니까.’

익숙하다.

딱히 상처받지 않는다.

그러니까…….

‘크흡.’

라키엘은 활동을 시작하려는 눈물샘을 꽉 틀어막았다. 그리고 거대한 경악의 침묵에 휩싸인 메인홀 전체를 둘러보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흠, 크흠!”

모두를 충격적으로 실망시킨 단계가 성공적이니까, 이제는? 저들에게 반전의 희망을 주어야겠지.

계획을 떠올리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오늘 연회의 주최자인…… 쿨룩, 콜록! 커흐흐어음,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입니다.”

“…….”

“쿨룩! 콜록, 커흠! 우선, 오늘의 연회에 참석하여 이 자리를 빛내 주신 여러분께…… 콜록! 켁!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곳에서 연회가 열릴 수 있도록 흔쾌히 장소를 제공하여 준 고마운 이를 여러분께 소개할까 합니다.”

이게 진짜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라키엘은 혓바닥에 촵촵 침을 발랐다.

“저의 자랑스러운 혈육이며, 마젠타노 황가의 2황자인, 데오도르 팔레르모 마젠타노를 소개합니다.”

연회장 입구를 가리켰다.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심드렁해진 모두의 시선이 입구를 향했다. 이윽고, 2황자 녀석이 레드카펫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연회장 곳곳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180센티를 넘기는 당당한 키.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

빛나는 눈동자와 수려한 얼굴.

헌앙한 외모와 분위기의 테오도르가 당당한 걸음으로 레드카펫을 걸어 나왔다. 장내의 모두를 향해 차분한 눈길을 자연스럽게 던졌다. 그 와중에 이쪽과도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녀석의 눈동자에 미안하고 고마운 기색이 일순간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

그래, 힘내라 짜식.

라키엘은 내심 미소를 지으며 연회장을 슥 둘러보았다.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레드카펫 위의 2황자, 녀석을 바라보는 모든 레이디의 시선이 하트로 변해 있다는 사실을.

‘허허. 허허허.’

작전 성공.

이제 이쪽을 보는 레이디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샌가 열렬해진 모두의 시선이 2황자에게로 꽂혀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쪽과 나란히 서 있을수록 녀석이 더욱 돋보일 테니까. 다들 머릿속 계산기가 팍팍 돌아가고 있을 테니까.

‘오늘 보인 내 모습 때문에, 나한테는 미래가 없을 거라고 계산을 마쳤겠지.’

이렇듯 허약하게 비실대는 모습을 보며 누가 건강하다고 생각할까. 아마 다들 앙부아즈에서 이쪽이 보였던 활약이 과장된 소문이거나, 거짓된 정보라고 간주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얼마 살지 못하리라고 판단했을 거고.’

그러면 자연히?

2황자에게 관심이 쏠리게 된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이쪽이 쓰러지면 다음 황위는 2황자가 차지할 것이라 계산할 테니까.

‘좋네. 딱 좋아.’

일부러 저런 반응이 나오도록 판을 짰다. 2황자 녀석이 이쪽과 비교되어 더욱 빛나 보이도록 상황을 세팅했다. 계략 적중. 보람이 듬뿍 느껴졌다.

‘그럼 난 적절하게 빠져볼까.’

어설프게 여기서 어물쩍대면 안 된다. 소개팅을 주선해준 사람이 절묘한 타이밍에 빠져줘야 하듯, 자신이 자리를 피해 줘야 2황자에게 몰리는 레이디들이 좀 더 눈치를 보지 않고 대담해질 수 있다.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

‘난 잠깐 좀.’

라키엘은 데미안에게 눈길을 보냈다. 데미안 녀석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용변. 따라오게?’

‘예.’

‘아서라. 내가 마실 음료나 하나 시켜놓고 있어.’

‘……알겠습니다. 다녀오시죠.’

녀석을 남겨두고 슬며시 자리를 떴다. 멀리 가진 않았다. 연회장 한쪽의 테라스로 나갔다.

“후우.”

왁자지껄한 안쪽에 있다가 테라스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법 쌀쌀해진 밤공기가 모처럼 상쾌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혼자 여유를 부려본 적이 언제였던가.

‘최근 3개월 동안은 정신이 없었지.’

앙부아즈에서 돌아오며 방치되어 있던 별궁 한의원을 정상 가동시키랴, 그 와중에 2황자 녀석의 다이어트를 감독하고 연회를 준비하랴, 진심 바쁜 3개월이었다. 덕분에 이렇듯 한가롭게 밤하늘을 올려다본 지가 언제였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누군가가 내 목덜미에 단검을 갖다 대는 경험도…… 가져 본 적이 있었던가?

“쉿. 조용히.”

“…….”

별안간 목에 닿는 서늘한 감촉. 그보다 더욱 서늘한 목소리.

라키엘은 동작을 딱 멈추었다.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려 옆쪽을 확인했다. 그곳에 처음 보는 귀 뾰족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가 이쪽의 목덜미에 단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이건 또 뭐냐.’

설마, 엘프?

그런데 왜 엘프가 나한테 단검을 겨누는 걸까. 어처구니가 없었다.

연회 도중에 바람 쐬러 테라스로 잠깐 나왔더니 사건이 벌어진다는 이런 상황, 철통 같은 경비를 자랑하는 2황자궁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적으로 너무 작위적인 클리셰가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이쪽의 불만과 무관하게, 엘프 여인이 여차하면 단검을 그어 버리겠다는 듯이, 무감정한 눈초리로 추궁을 던져 왔다.

“어린 인간, 솔직하게 대답해. 최근에 불을 지른 적이 있지?”

“예? 최근이요?”

“반문은 허용하지 않아. 대답이나 해.”

“…….”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아무래도 장난이 아닌 거 같다. 그래서 고민이 되었다. 최근에? 내가? 불을 지른 적이 있었던가. 잠깐의 심사숙고 끝에 답이 나왔다.

“최근엔 없는데요?”

“거짓말.”

그녀의 눈동자가 한층 살벌해졌다.

“최근에 말이야. 그러니까 약 반년쯤 전에, 아피로스 둥지가 있던 숲에 불을 지르지 않았어?”

“……예?”

그게, 최근이라고?

아니 그게 대체 언젯적 얘기야?

라키엘은 황당해서 되묻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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