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상대성 엘프식 시간 이론 (1)
“최근에 말이야. 그러니까 약 반년쯤 전에, 아피로스 둥지가 있던 숲에 불을 지르지 않았어?”
“……예?”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엘프 여인의 눈길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맞잖아. 방화범 무리의 리더. 리한 군의관.”
“…….”
맞긴 맞다. 발뺌할 생각도 딱히 없다. 그런데 그게 최근의 일은 아니다. 그래서였다.
“이거 좀 억울한데요.”
“억울?”
눈썹을 일그러뜨리는 엘프 여인.
그녀를 향해 진심으로 투덜거렸다.
“숲에 불을 질렀던 건 맞습니다. 그런데 그쪽은 교묘한 화법으로 절 치사한 사람으로 만드는군요.”
“치사한 사람으로? 내가? 그쪽을?”
“예.”
“어째서?”
“처음부터 제 목에 칼을 들이대고서 이렇게 물었지 않습니까. ‘최근’에 숲에 불을 지른 적이 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랬지.”
“해서 저는 생각했지요. 방화? 최근에 내가 그런 짓을 저질렀나? 하지만 떠오르는 게 있어야 말이지요. 적어도 ‘최근’에는 말입니다.”
라키엘은 태연하게 따졌다.
이 엘프 여인, 대체 무슨 수로 2황자궁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여기까지 들키지도 않고 들어온 걸까. 엄청난 은신술의 장인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겁을 먹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엘프 여인의 눈빛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원만한 대화가 가능하리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진짜로 날 어떻게 하려는 자였으면 다짜고짜 찌르거나 그었겠지.’
새삼스레 떠올리는 사실이지만, 자신은 제국의 황태자다. 그런 자신에게 시해를 입히려는 자라면 처음부터 말을 걸지도 않았을 거다. 깔끔하게 목적만 달성하고 도주했겠지.
‘게다가 소설 마검황에서 엘프들은…… 인간의 정치에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고도 했으니까.’
한데 굳이 자신을 찾아와 해를 입힐 이유도 없다. 즉, 엘프 여인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 덕분이었다.
엘프 여인과 대화로 풀어갈 자신이 생겼다. 대담하게 여인에게 따졌다. 그 효과는 꽤나 짭짤했다.
“지금 무슨.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최근에 방화를 저질렀잖아. 반년 전에.”
“예. 반년 전의 사건을 ‘최근’의 일이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지 말입니다?”
“……어째서 그게 최근이 아니야?”
“어째서 그게 최근입니까?”
“최근이니까 최근이라는 거지.”
“그럼, 그걸 반년 만에, 이제야 뒷북치듯이 따지러 온 것도?”
“어떻게 따질지 잠깐 고민하고 온 건데?”
“…….”
“…….”
허공에서 눈길이 부딪쳤다. 라키엘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엘프, 어쩐지 시간에 대한 관념이 인간과 꽤나 다른 것 같다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일단 남의 목덜미에 들이댄 흉기부터 좀 치우고 이야기를 하죠.”
“어째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온 아닙니까?”
“…….”
“칼부터 들이미는 건 요구를 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요. 강도질이라면 모를까.”
“강도질을 할지도 모르지.”
“원하는 요구부터 해 보시죠.”
“보상을 원해.”
“숲에 불을 지른 것에 대한?”
“당연하지.”
당시의 일을 새삼 떠올린 걸까. 잠시 누그러지나 싶었던 엘프 여인의 눈길이 다시금 험악해졌다.
“아름다운 숲이었어. 수많은 식물이 자라고, 저들만의 노래를 머금고 있었어. 그런데 어린 인간, 네가 그걸 불태운 거야. 그 어떤 이의 허락이나 양해도 구하지 않고서, 죄 없는 식물들을 무참히 태워 죽였어.”
“예, 죄송합니다. 그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라키엘은 순순히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 사실 그건 할 말이 없긴 했다. 거대 말벌인 베스파로스의 위협을 떨쳐내고자 저지른 일이었지만, 어쨌건 방화는 방화니까.
게다가 그는 소설 마검황을 통해 읽었던, 이곳 세계 엘프 종족의 특성을 떠올리고 있기도 했다.
‘……광적일 정도의 식물 애호가들.’
그것이 바로 이곳 세계 엘프의 가장 첫 번째로 꼽히는 특성이었다. 식물을 사랑했다. 그냥 아끼고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미저리 싸다구를 서른 번은 후려칠 정도로 집착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식물을 아예 먹지 않을 만큼이라고 했지.’
이곳 세계의 엘프들은 아예 채식을 하지 않았다. 과일도 먹지 않았다. 오직 육식, 고기만을 먹었다. 식물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옷은 전부 가죽과 동물의 힘줄로만, 활과 화살도 동물의 뼈와 힘줄, 흑요석을 가공해서 만들 정도였다.
‘심지어 여인들만 마을 밖으로 나와서 사냥 등의 활동을 한다고 했지. 왜냐. 남자에 비해 몸이 가벼워서 숲을 돌아다닐 때 바닥의 풀을 덜 상하게 하니까.’
그야말로 초 극단적 식물애호가.
궁극의 융합퓨전 육식 머신.
그것이 엘프의 실체였다.
한데 그렇듯 광적인 식물 덕후 엘프가 숲에 불을 지른 책임을 물으러 왔다. 제대로 찍혔다는 소리다. 그러니 책임 자체를 부정해선 안 된다. 더 큰 분노만 키우게 될 거니까.
“그러니까, 충분히 만족할 만한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말씀만 하시죠.”
라키엘은 쿨거래의 마인드로 말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충분히 보상하면 된다. 어떤 보상이든 척척 해줄 자신도 있었다. 황태자니까. 무지막지한 권한이 있으니까. 미노타우황청심원으로 돈도 넉넉하게 벌어 뒀으니까.
한데 이내 돌아온 엘프 여인의 요구는 기가 막히는 것이었다.
“직접 숲에 가서 그곳을 복구시켜.”
“예?”
“못 들었나? 네가 불을 지른 그 숲에 가서, 새 나무와 풀을 심으라고.”
“……혹시 식목일 홍보대사세요?”
“식목일이 뭐지?”
“아니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나무와 풀을 심으란 말입니까? 제가 직접 거기까지 가서?”
“그래.”
“몇 그루쯤 심으면 됩니까?”
“불타기 전과 똑같이.”
“그럼, 그것만 다 심으면 됩니까?”
“아니.”
엘프 여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심은 나무와 풀이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자랄 때까지 그들을 정성껏 가꾸어야지. 그게 진정한 복구가 아니겠어?”
“……잠깐.”
듣고 있자니 어쩐지 뒷골이 멍해진다. 라키엘은 서슴없이 콕콕 올라오려는 두통을 억누르며 물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말입니다. 숲이 완전히 복구될 때까지, 풀과 나무를 심고, 그걸 열심히 가꾸는 숲지기 생활을 하라는 거지요?”
“바로 그거지.”
“그거, 산불이 난 숲이 완전히 복구되려면 최소 10년, 아니, 20년쯤 시간이 걸린다는 건 알고서 하는 이야기지요?”
“물론.”
“…….”
“20년이라 봤자 얼마 안 되는 시간이잖아?”
“…….”
퍽이나!
라키엘은 속으로 빼액 외치고 말았다. 듣고 있자니 기도 차지 않았다. 말이 20년이지, 그 시간이면 어지간한 사람 인생의 30%는 날아가는 기간이 아닌가.
‘아니, 무슨 내가 20년형 선고받을 흉악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그 엄청난 시간을 ‘얼마 안 된다’고 말하는 엘프의 태도에 뒷목을 잡고 싶어졌다. 그는 멸망의 트월킹을 추려는 멘탈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물었다.
“후우, 그러니까 말입니다. 솔직하게 묻겠습니다. 지금 장난해요?”
“장난? 내가? 왜?”
“말이 그렇지 않습니까. 천 년을 능히 사는 당신들 종족에게는 20년이 얼마 안 되는 시간이겠지만, 저한테 20년은 인생 한 귀퉁이가 훅 날아가는 시간이란 말입니다.”
라키엘은 억울함과 황당함의 진심을 담아서 따졌다. 솔직한 얘기로 진짜였다. 특히 자신에게는? 20년의 숲지기 생활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일일 것이다.
‘당연하지. 난 누군가를 치료해 줘야 보너스 수명을 받아서 생명을 이어 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사람 하나 없는 숲에서 혼자 살면? 그냥 죽으라는 소리잖아.’
그런 개죽음은 당연히 사양이다. 라키엘은 뜨겁게 용솟음치는 항거의 정신으로 재무장하며 말했다.
“그러니 20년짜리 숲지기행은 너무 과하며 가혹한 요구입니다.”
“그 뜻은, 저지른 만행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겠다는 건가?”
“물론 그건 아니고요.”
“하면?”
“다른 방법으로 보상하면 안 되겠습니까?”
“예를 들어봐.”
“숲의 복구에 들어가는 비용을 전액 지불하겠습니다.”
“돈으로?”
“예.”
“웃기지 마. 번쩍이는 금화 몇 닢 따위, 우리 엘프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
“몇 닢이 아닐 텐데요.”
“뭐?”
“몇 상자는 될 텐데.”
“…….”
“원하면 더 드릴 수도 있고.”
“…….”
흔들렸다.
방금, 아주 조금, 엘프 여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통한다!’
확신이 들었다.
숲의 고고한 엘프고 뭐고, 금화 앞에서는 평등할 수밖에 없으니까. 돈이 가치가 없다는 거, 전부 뻥카라는 걸 아니까.
‘당연하지. 세상 살면서 돈이 안 필요한 사람이 어딨겠어.’
당장 눈앞의 엘프 여인만 봐도 그렇다. 엘프 마을을 떠나 여기까지 오면서 매일 노숙만 했겠는가. 뒷골목에서 쥐나 참새만 잡아먹으며 배를 채웠겠는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니까. 만약 노숙과 사냥만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면, 저 트리트먼트 CF 뺨치는 머릿결과 깔끔한 옷차림은 설명이 안 되는 거니까.
설득의 희망을 엿본 라키엘의 혓바닥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니까, 얼마면 돼요?”
“…….”
“숲 복구에 필요한 노동력도 팍팍 제공해 드릴 수 있는데.”
“…….”
“차라리 그게 서로 편하지 않을까요?”
“…….”
엘프 여인의 눈동자가 번민에 잠겼다. 어느샌가 목에 겨누어져 있던 단검도 스르륵 내려가 있었다. 아마도 이쪽의 말이 제법 합리적이라고 느낀 탓이겠지.
분위기를 감지한 라키엘은 쐐기를 박았다.
“차분히 생각해 보시죠. 저는 이미 충분히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소중한 숲을 망가뜨린 제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렇기에,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보상을 하고 싶은 겁니다. 한데 저 혼자 낑낑대며 20년 동안 숲을 가꾸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
“기왕 복구하는 김에 돈 좀 때려붓고, 상주 인원들 팍팍 고용해서 관리하고. 그러면 20년보다 훨씬 일찍 숲이 자라나고, 건강해지고, 모두가 행복해지고, 맑은 공기 속에서 지저귀는 새가 날아다니고, 산소가 슝슝 뿜어져 나오고, 지구온난화도 예방하고, 다 함께 녹색혁명 그린피스 외치고, 뭐 그렇게 다들 만족하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지구온난화? 그린피스?”
“아, 어쨌건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숲을 더 일찍 복구하는 게 서로가 두루두루 행복해지는 길이 아니겠느냐, 그런 취지의 말씀이지요.”
“…….”
“어떻습니까?”
넘어온다. 거의 다 넘어왔다. 기색을 감지한 라키엘의 물음이 은근해졌다.
엘프 여인의 눈빛이 더욱 흔들렸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 인간, 뭐지?’
당황스러웠다.
이런 반응은 솔직히 예상 못 했다. 그저 지은 죄를 엄히 따지면, 이쪽의 요구에 응하리라고 여겼다. 그게 아니라면 책임을 거부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거라고만 여겼다.
한데 아니었다. 엄청나게 많은 돈으로 보상을 하겠다니. 그게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길이 될 거라니.
‘…….’
쓰레기 같은데, 반박을 못하겠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심정을 애써 수습하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고민이 된다는 거지요?”
“……어, 맞아.”
“그럼 ‘잠깐만’ 고민 좀 하고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잠깐만 고민을?”
“예.”
라키엘이 낼름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조율하는 과정 아니겠습니까. 그걸 덜컥 정해 버리는 것도 조금 이상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 아주 잠깐이라도 심사숙고를 하고, 따질 것도 좀 따져 보고, 그다음에 다시 이야기를 나눠 보면 어떻겠습니까?”
“…….”
일리가 있다.
라키엘의 페이스에 말려든 엘프 여인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잠깐만 고민 좀 해보고 오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래. 잠시 후에 돌아올 테니 기다리도록.”
“예에, 예. 살펴 가십쇼.”
라키엘이 태연하게 인사했다.
엘프 여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파앗……!
바람결 사이로 사라진 걸까. 혹은 그림자에 스며들어 떠난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작전 성공.’
라키엘의 입꼬리에 싱글벙글 강태공의 미소가 맺혔다. 그는 떠난 엘프를 1초도 기다려 주지 않고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엘프가 말하는 ‘잠깐’은 최소 반나절 이상일 테니까.
‘그럼 나도 이제 준비를 좀 해 볼까.’
난데없이 나타나 부담스러운 보상을 요구하는 엘프 여인. 처음엔 좀 뜨악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대응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잠깐 각 좀 재어 봐야지.’
이번 일을 오히려 이득으로 바꿀 방법. 떠올릴 자신이 있다. 각을 재며 생각할 시간도 충분하다. 하룻밤이면 넉넉하니까.
그의 대뇌피질이 열심히 풀가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