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52화 (152/468)

152화. 상대성 엘프식 시간 이론 (2)

아침이 밝았다. 해가 쭉쭉 떠올랐다. 전날 밤의 성대했던 연회, 밤새도록 2황자를 향한 무한의 경쟁심을 불태웠던 레이디들이 숙취를 동반한 늦잠에 빠져들었다. 2황자도 지친 몸을 이끌고 잠이 들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라키엘이었다.

“느으어어…… 데미안?”

“예, 전하.”

“조금만 더 아래.”

“여기 말입니까?”

“왼쪽, 왼쪽, 아니아니, 너무 갔잖아. 살짝만 오른쪽. 아 거기, 거기.”

“여기요?”

“어 그렇지. 거기. 좀 더 쎄게.”

“이렇게 말입니까?”

“……꾸익!”

라키엘이 돼지 멱 따는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목덜미를 주물러 주던 데미안이 지나치게 힘을 꽉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마터면 승모근이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을 외치며 몸뚱이와 영원한 안녕을 고할 뻔했다.

“어그윽, 너무 쎄잖아.”

“……죄송합니다.”

“좀 잘하자. 응?”

“…….”

데미안은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나는 어째서 이런 아침부터 황태자의 목이나 주물러 주고 있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왜…….

“전하께서 이토록 쉬질 않으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음?”

“염려도 되어서 말입니다. 지난밤에 연회에 참석하시느라 거의 밤을 지새우셨는데, 굳이 이렇게 무리를 하며 계속 깨어 계셔야 할 이유가 있으신지…….”

솔직히 궁금했다. 의아하고 이해가 안 되었다.

데미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별궁 정원 한가운데였다. 어느새 늦겨울의 아침엔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황태자는 정원에 떡하니 내어놓은 안락의자에 다리를 뻗고 늘어진 채였다.

“…….”

도대체 뭘 하자는 걸까.

어째서 아침부터, 정원 한가운데에서,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생각할수록 풀리지 않는 의문만 깊은 산 속 옹달샘처럼 새록새록 솟구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황태자의 대답은 의문에 아리송함만 더 얹어 줄 뿐이었다.

“이유? 있지. 손님이 올 거라서.”

“손님…… 말입니까?”

“어. 불청객.”

“…….”

“잠깐만 생각 좀 해 보고 돌아오겠다는 불청객이 있거든. 근데 내 감을 따르자면, 오전 중에는 돌아올 것 같아서. 그래서 이렇게 기다리는 중이야. 잠들어 있다가 헐레벌떡 깨어나며 맞이하는 건 싫어서.”

“……그게 누굽니까? 혹시 저 팻말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데미안은 더욱 덩치를 불려 가는 의혹을 느끼며 눈길을 돌렸다. 그의 눈길이 향한 곳. 그곳에 급조해서 만든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팻말에 황태자가 직접 휘갈겨 쓴 ‘협상 환영’이라는 글귀가 유독 눈에 띄었다.

‘협상?’

황태자는 대체 누구와 협상을 하겠다는 걸까.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 인간, 분명 뭔가를 노리고 있다. 그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곁에서 지켜보고 겪어 본 황태자는 언제나 속내를 잔뜩 깔아 두고서 일을 벌이는 인간이었으니까.

“…….”

참 알다가도 모르겠는 사람. 황태자를 보는 데미안의 눈길이 복잡해졌다. 반면, 라키엘의 눈꼬리는 가늘어졌다.

“어허. 또. 또. 딴생각 한다? 은근슬쩍 손에서 힘 살살 빠진다?”

“…….”

“좀 확실하게 주무르자. 응?”

“하지만 전하. 다른 특근대원도 있지 않습니까?”

“응?”

“왜 저만 이러고 있어야 합니까?”

“다른 대원들이 있으면 난리를 피울 거라서?”

“……예?”

“그런 게 있어.”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흘려내듯 농담처럼 말했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제 곧 돌아올지도 모르는 엘프, 그녀가 올 때 최대한 주위를 비워 둠이 좋을 듯했다. 근위대와 특근대 모두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그들이 다 있어도 그 엘프를 못 막을 테니까.’

불현듯 지난밤의 일이 떠올랐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 엘프 여인은 2황자궁의 삼엄한 경비를 아무렇지도 않게 뚫고서 테라스까지 들어왔다. 단순히 뛰어난 은신술?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심지어 연회장 안쪽에는 데미안이 있었거든. 그런데…….’

데미안조차도 엘프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건 엄청난 일이었다. 데미안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다다라 있으니까. 전신의 감각이 지극히 예민해지는 소드마스터 증후군을 앓고 있으니까.

‘그건 즉, 그 엘프 여자의 실력이 현재의 데미안보다 뛰어나다는 뜻이겠지. 추측하자면 아마도…… 소드 익스퍼트 상급과 소드마스터 사이쯤?’

어쩌면 거의 소드마스터에 필적하는 단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설픈 대립은 소란만 불러올 뿐이다. 차라리 데미안만 곁에 두고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서로에게 좋으리라.

그렇게 라키엘이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후욱.

어디선가 미약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늦겨울 목련 꽃잎 한 장이 바람결에 실려 날아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잠깐 시야를 가렸다. 얼결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떠 보니…….

“잠깐 고민을 마치고 왔다.”

어느샌가 엘프 여인이 돌아와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세 발짝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향해 무감정한 눈길을 던져왔다.

덕분에(?) 데미안의 안마가 중단되었다.

“……!”

흑발 호위의 손이 섬전처럼 움직였다. 조금의 군더더기조차 없는 동작으로 검 손잡이를 잡았다. 뽑았다. 아니, 뽑으려는 순간이었다.

“데미안, 그만.”

라키엘의 차분한 목소리가 데미안을 가로막았다. 덜컥, 데미안의 발검 동작이 중단되었다. 그는 말없이 서 있는 엘프 여인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물었다.

“혹시, 저 엘프가 전하께서 말씀하신 손님입니까?”

“어. 그러니까 검 뽑을 필요 없어.”

“…….”

꿀꺽.

데미안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출렁였다. 그는 보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저 엘프, 강하다. 어쩌면, 아니, 아마도 자신보다 더.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가늠이 안 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서 있는 자세를 보아도 아무런 느낌이 오지가 않았다. 그 뜻은 간단했다. 자신이 파악할 수 없는 경지의 실력자라는 뜻이다.

“…….”

황태자는 저런 엘프를 언제 만났던 걸까. 언제 인연을 맺었던 걸까. 알 수가 없었다. 짐작이 되는 구석도 없었다.

그사이, 엘프 여인이 입을 열었다.

“실비아. 내 이름이다.”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녀의 눈길이 ‘협상 환영’이라 쓰인 팻말을 힐끔 살폈다.

“정식으로 협상에 임하려면 통성명 정도는 해 둬야겠지.”

“잘 오셨습니다. 그래도 일찍 오셨군요. 내일 오시면 어쩌나 했는데.”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

“아주 잠깐 고민해 본 결과, 더 길게 고민해 봐도 답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일찍 왔지.”

“그렇습니까?”

“으음.”

“금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뭐?”

엘프 여인, 실비아의 눈썹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그만큼 라키엘의 미소가 은근해졌다.

“제가 어젯밤에 드렸던 제안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서로에게 이득이 될 것 같아서 정말 좋은데, 마음에 들고 구미가 당기는데, 차마 그걸 받아들이려니 뭔가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거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

실비아의 입이 다물렸다.

그 모습을 보며 라키엘은 확신했다. 자신의 짐작이 맞았노라고. 밤을 지새우며 짰던 계획이 통할 것 같다고.

자신감을 담아서 말했다.

“그럼, 어제 드렸던 제안을 좀 보강해 보도록 할까요.”

“보강?”

“예. 그쪽의 목숨을 살려드리죠.”

“…….”

실비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이겠다, 뭐 그런 따위의 협박이 아닙니다. 어차피 그쪽, 제가 손을 쓰지 않아도 오래 살진 못할 것 같으니까.”

“……무슨 뜻이지?”

“당신 말입니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병을 지니고 있는 거, 아십니까?”

“…….”

정말로 무슨 뜻일까. 인간 특유의 간사한 말장난일까. 실비아는 더욱 경계하는 눈초리로 라키엘을 쳐다보았다.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어젯밤에 처음 접근해 오셨을 때 느꼈지요. 당신의 호흡에 아주 미세하게 섞여 있는 이질적인 소리. 그리고 숨을 내쉴 때마다 희미하게 나는 염증 냄새. 혹시 아침마다 진녹색에 가까운 가래가 나오지 않습니까?”

“…….”

“맞으실 텐데.”

“그게 어쨌다는 거지?”

“금전으로 보상을 대신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이면 치료를 해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일종의 패키지 보상처럼.”

“하.”

실비아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린 인간 주제에 가소롭군. 그래. 방금 네가 말한 증상은 맞아. 아침마다 독한 가래가 끼지. 요즘 호흡이 조금 불편해진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그게 어때서? 이 정도는 공기 맑은 곳에 틀어박혀서 몇 년만 쉬어 주면 나을 가벼운 증상이야. 그런데, 고작 그런 걸 치료해 주겠다며 생색을 내려는 건가?”

“가벼운 증상이 아닐 텐데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제가 직접 봤으니까 말입니다.”

“뭐?”

실비아는 어처구니가 없어짐을 느꼈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녀의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런 반응쯤은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내 다시 꺼낸 그의 손에는…….

“오랜만이다, 뽀복아?”

“뽀복! 뽀보복!”

불사조 개복치 환상종, 뽀복이가 반갑게 외쳤다. 라키엘이 뽀복이를 향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어제 새벽에 말이야. 내가 저분 진맥해서 전달해 준 영상, 지금 보여줄 수 있어?”

“뽀!”

뽀복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의 손바닥을 떠나 도동실 떠올랐다. 가슴지느러미를 활짝 펼쳤다. 이내 16:9 비율의 지느러미 디스플레이가 환하게 밝혀졌다. 그리고 그 속에…….

파츠즈즈즈……!

지난밤, 엘프 실비아가 단검에 목을 들이대던 그때, 잠시 몸이 맞닿던 순간에 라키엘이 발동했던 진맥 스킬 옵션, ‘CT 출력’의 결과물이 불꽃 지느러미 디스플레이에 띄워졌다.

……파즈즛!

처음에 떠오른 영상은 온통 불그스름한 배경이었다. 포도송이처럼 둥근 조직이 공기의 흐름에 따라 희미하게 요동쳤다.

“보이십니까? 당신의 허파 속 광경입니다.”

“이게 무슨…….”

실비아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지금 황태자, 이 어린 인간이 뭘 하려는 건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그때, 라키엘이 불꽃 지느러미에 떠오른 영상 한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여기, 이놈이 바로 당신의 허파 속에 똬리를 튼 기생충이지요.”

“기생충……?”

“예. 어젯밤에 당신이 접근해 오던 때부터 말입니다. 호흡 소리, 숨에서 나는 냄새, 그런 것들을 통해서 병증의 징후를 예감했고, 진단을 했거든요.”

“…….”

“어쨌건 당신, 이걸 계속 품고 있다간 상태가 점점 심각해질 겁니다.”

“…….”

실비아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사실 그녀는 라키엘은 전혀 믿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떠오른 괴상한 개복치는 믿을 수 있었다. 보자마자 깨달았다. 환상종이라고.

‘환상종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문득, 일족의 대장로께서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대장로께서도 젊은 시절, ‘로이드 프론테라’라고 불린 어느 교활한 인간과 협력한 적이 있었노라 하셨다. 꽤나 시달렸다고도 하셨다. 하지만 그 인간에게 환상종이 있었기에, 믿을 수 있었다고도 하셨던가.

‘대장로께서 말씀하셨지. 환상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그러니 저 개복치 환상종이 펼쳐낸 지느러미 속 영상도 조작이나 거짓이 아닐 것이다. 언뜻 보면 강낭콩을 닮은, 저 꿈틀거리는 벌레가 자신의 허파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말도 사실일 것이다.

“그럼 대체 저게, 뭐길래?”

결국, 실비아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순간 라키엘이 방긋 웃었다. 마치 그 질문만 기다렸다는 듯. 혹은, 엄청난 수명을 지닌 엘프를 환자로 맞이하게 되어서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듯, 말했다.

“폐흡충, 폐 디스토마(Paragonimus westermani)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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