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56화 (156/468)

156화. 값비싼 진료비 (1)

“그럼 이제 진료비를 주셔야죠?”

라키엘의 미소가 빵긋 빛났다.

무릇 세상 모든 행위에는 대가가 따라야 한다. 노동에는 정당한 보상이 필요하다. 수많은 아르바이트에는 적법한 시급이 지급되어야 한다. 하다못해 아빠 흰머리를 뽑아줘도 한 올에 백 원은 받아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

그런데 진료비를 공짜로?

그건 말도 안 될 일이었다.

‘특히 이런 엘프한테는 무조건 받아야지!’

라키엘은 내심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사실 별궁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한 번도 진료비를 금품으로 받은 적이 없던 그였다. 이유는 빈부와 신분을 떠나, 누구나 부담 없이 진료를 받으러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그 효과를 쏠쏠히 보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이제부터는 내가 이 엘프한테 제법 많은 돈을 토해줘야 할 거거든. 숲을 태운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 그런데 그거, 그냥 내주기엔 배가 너무 아프단 말이지.’

그러했다.

배가 아팠다.

가만히 있다가 삥 뜯기는 기분이었다. 억울했다. 자다가도 몇 번이고 뒤척이며 깨어나고, 때때로 가위마저 눌릴 정도로 배가 아팠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돈이 어떻게 번 돈인데!’

열심히 미노타우황청심원을 팔면서 쌓은 돈이다. 별궁의 귀중품을 다 팔아치우며 벌어둔 돈이다. 그런 피 같은 돈을 무력하게 내주긴 싫었다.

그래서였다.

“설마, 실비아 님? 진료를 공짜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겠죠? 그렇지요?”

“…….”

꿀꺽.

실비아의 목울대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하마터면 솔직하게 나올 뻔한 대답을 가까스로 붙들어야 했다.

‘공짜……인 줄 알았는데.’

그런 줄 알았다.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제국의 황태자. 앙부아즈에서 숲을 불태운 이 범인의 뒷조사를 나름 해본 그녀였다. 당연히 그가 운영하는 별궁 한의원의 진료비가 공짜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억울했다.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반문했다.

“내가 듣기로는 공짜라고 하던데?”

“누가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

“여기서 진료를 받았던…… 수많은 이들이.”

그랬다. 정말로 그랬다. 그게 확실했다. 한데 지금 황태자는 어째서 진료비를 달라는 따위의 뜻밖의 소리를 꺼내고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진료비를 받으려고 하는 거지? 이거 불공평한 거 아닌가?”

그녀는 진심을 담아 물었다.

라키엘이 뭔 헛소리를 비트박스로 꺼내느냐는 듯 반문했다.

“불공평하다니요? 저는 당연한 요구를 하고 있는 건데?”

“당연? 이게?”

“예.”

“어디가 당연하다는 거지?”

“실비아 님은 진료 접수증, 작성 안 했잖습니까.”

“……어?”

“못 들으셨어요? 진료 접수증이요. 안 썼죠?”

“어, 응…….”

“그러니까 진료비를 내셔야지.”

“…….”

어째서!

실비아는 빼액 외치고 싶었다. 난데없이 진료 접수증이라니. 그걸 작성하지 않은 것과, 자신이 남들은 내지 않는 진료비를 내야 한다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이내 돌아오는 라키엘의 태연한 대답을 들으며, 그녀는 돈까스 망치에 뒤통수가 야들야들해지는 듯한 충격을 느껴야 했다.

“진료 접수증에 이런 내용이 있거든요. 별궁 한의원의 진료비는 무료입니다, 라고.”

팔랑!

라키엘이 대꾸하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별궁 한의원의 진료 접수증이었다. 그가 접수증 아래쪽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 눈 좋으니까 보이죠?”

“…….”

“공짜, 라고 쓰여 있죠?”

“…….”

“그러니까 이 접수증을 작성한 사람은 공짜로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거, 아시겠죠?”

“…….”

“그런데 그쪽은 접수증 안 썼죠?”

“…….”

“공짜 아니겠죠?”

“…….”

엄마.

실비아는 울고 싶어졌다.

이건 폭리 아니냐고. 아니, 농간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방긋 웃는 저 황태자의 면상을 왕복으로 서른 대만 후려쳐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철걱…….

어느샌가 사방이 가로막혀 있었다. 항상 황태자의 곁에 머무르는 데미안이라는 흑발의 사내. 그리고 근위대와 특근대. 거기에 거대한 미노타우로스까지. 모두가 삼엄한 눈길로 이쪽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차라리 강도가 착해 보일 상황이었다!

“……강압적으로라도 돈을 뜯어내겠다는 건가?”

“어허, 쓰읍. 말씀을 왜 그렇게 하시나? 양질의 진료 서비스를 해줬으니, 그에 합당한 진료비를 받으려는 거 아니겠습니까?”

“…….”

“그럼 설마. 진료비 떼먹고 도망가려고 했어요? 와,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아니, 나는…….”

“나한테 숲을 태운 보상금을 받으러 왔다면서요. 그때 제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반항했어요? 반박했어요? 아니죠?”

“그게, 그러니까…….”

“그러니까는 무슨. 저는 그쪽이 하는 추궁에 변명도 안 하고 전부 순순히 협조를 해줬습니다. 협상에도 성실하게 임했고 말입니다. 거기에 실비아 님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폐흡충 감염을 밝혀내고 치료까지 성심껏 해줬지요. 그런데 돌아오는 보답이 이런 겁니까?”

“……아니, 그러니까 나는!”

“진료비, 주실 겁니까?”

“얼만데.”

“10만 마젠.”

“……미친!”

“그런 돈, 없으시죠?”

“당연하지!”

폭리다. 이건 진짜 폭리다.

하지만 라키엘은 태연했다. 새삼 의료보험 제도의 소중함을 실감하며, 준비된 함정(?) 속으로 실비아를 몰아넣었다.

“그럼 얼마 있으십니까?”

“…….”

“에이 설마.”

“…….”

“한 푼도 없는 건 아니죠?”

“…….”

실비아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역시나. 라키엘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사냥꾼의 것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는 능청을 떨며 미소를 숨겼다.

“아, 그러시면 곤란한데. 이거, 우루스한테 먹인 참옻나무 그거, 엄청 비싸게 들여온 거였는데.”

“…….”

“게다가 미노타우로스 똥을 말리고 분쇄하고 굽고 하느라, 거기에 쓴 도구들은 이제 다른 일에는 못 쓰게 됐거든요. 그거 도구랑 설비 값도 제법 만만치가 않은데.”

“그,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요?”

“여긴 황태자의 별궁인데?”

“그런데요?”

“어차피 황실에서 돈은 다 나오는 거 아닌가?”

“아닌데요.”

“……뭐?”

“우리 황제 폐하를 잘 모르셔서 그러시나 본데, 그 양반이 후계자의 자립심 함양에 관심이 과하게 많으셔서 말입니다. 여기 별궁은 황실에서 나오는 운영자금이라곤 한 푼도 못 받고 있습니다.”

“그럼 여긴 어떻게?”

“운영되느냐고요? 제가 약 팔고 장사해서 운영하지요. 그런데 그쪽은 옻나무 값이며 설비 값이며 다 떼어먹고 진료비를 안 내려는 거고.”

“아니, 안 내겠다는 게 아니라.”

“돈 없다면서요.”

“아니, 그게.”

“그게 배 째라는 거랑 뭐가 다릅니까?”

“그런 뜻은 아니고.”

“아니면 뭡니까?”

“돈 말고 대신 진료비를 낼 방법은 없을까?”

“…….”

빙고.

라키엘은 제자리 텀블링을 하며 비트박스를 넣고 싶은 기분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여전히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런 방법이라면, 으음, 있기야 있습니다만.”

“있어?”

“예. 위험하거나 더럽거나 치욕적인 일은 물론 아닙니다.”

“뭔데?”

“흐음, 그게. 뭐랄까. 요즘 2황자궁에서 매일 연회를 열고 있는 건 아시죠?”

“어. 알아.”

“그 연회에 참석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

실비아는 눈을 끔벅거렸다. 인간 황실의 연회에 참석해달라니. 뜻밖의 요구였다.

‘뭐지.’

라키엘을 보는 그녀의 눈초리에 사골육수처럼 짙은 의심의 기색이 서렸다. 뜻밖인데 나쁜 요구가 아니라서 덜컥 의심이 들었다. 아무래도 황태자 이 인간,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했다.

“연회에 참석해서…… 뭘 하면 되는 거지?”

“그냥 참석만 해주시면 됩니다.”

“참석만?”

“예.”

“…….”

“정말로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냥 참석해서 자리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실비아 님 덕분에 제가 많은 이익을 얻을 테니까요.”

“이익……?”

“예.”

“어떤 이익?”

“연회 자리가 더욱 빛나는 이익이랄까요.”

라키엘이 정중하게 말하며 덧붙였다.

“인간의 연회란 그런 것이니까 말입니다.”

“…….”

실비아는 잠시 고민했다. 그냥 참석만 해주면 된다니.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된다니. 다소 뜻밖의 엉뚱한 요구이긴 한데, 그 정도면 손해가 아니겠구나 싶었다. 아니, 생각하기에 따라선 그보다 쉬운 일이 없을 듯했다.

‘많은 인간들 앞에 모습을 보이는 일이 조금 어색하고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쯤은 감수할 수 있어. 감당이 안 되는 금액을 진료비로 지불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계산이 끝났다.

그녀는 결심했다.

“……좋아. 그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연회에 참석하실 때에 입을 드레스는 오후에 보내드리도록 하지요.”

작전, 성공.

라키엘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근위대와 특근대원 모두는 생각했다. 우리 황태자 전하, 말씀은 저렇게 야박하고 얄밉게 하지만 알고 보면 좀 멋있는 분인 것 같다고. 사실은 처음부터 진료비를 안 받으실 거였으면서, 그걸 핑계로 자연스럽게 엘프를 연회에 초청하다니.

‘설마 저렇듯 스무스하게 엘프와 친밀해질 기회를 만드실 줄이야.’

‘엘프가 인간의 연회에, 그것도 황실의 연회에 참석을? 그런 전례가 있었나? 아니, 그런 요청이 받아들여지는 거였어?’

‘대단한 수완이다. 나도 배우고 싶어.’

모두는 감탄했다.

그리고 기대했다.

오늘, 황태자는 연회장에 초청한 엘프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을 것인가. 어쩌면 마젠타노 황가에 전대미문의 엘프 황후가 탄생하는 것은 아닐까.

황태자 본인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는 김칫국을 각자가 벌컥벌컥 원샷하는 사이에, 오해로 점철된 대낮이 차곡차곡 지나갔다.

시간이 훌쩍 지났다.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2황자궁에서는 어김없이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각국에서 초청된 50인의 왕녀와 영애들이 각자의 매력을 뽐내며 우아한 전쟁을 개시했다.

오가는 와인잔과 미소.

달콤한 음악과 디저트.

레이디들의 볼이 향긋한 취기에 살짝 물들어가는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묵묵히 구석에 있던 라키엘이 움직였다. 연회장 단상 위로 올라갔다. 모두의 관심 밖에서, 천천히, 눈짓을 보냈다.

“…….”

그의 눈짓을 받은 2황자궁의 시종들이 움직였다. 웬 기다란 테이블을 들고 와서 연회장 단상에 놓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호화로운 상자를 줄줄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쌓아 올렸다. 그 모든 일들이 일사불란하게 착착 이루어졌다.

덕분에 연회장 모든 이들의 춤과 대화가 멎었다. 어느새 모두의 시선이 테이블과 그 위에 쌓인 화려한 디자인의 상자, 그리고 라키엘에게로 쏠렸다. 그 순간, 라키엘이 모두를 향해 차분하게 말했다.

“흠흠, 다들 오늘도 이렇듯 이 자리를 빛내 주셔서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의 이름으로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쿨룩…… 콜록! 아울러, 저는 오늘 이곳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아름다운 특혜와 기회를 드리고자, 이렇듯 귀한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웅성웅성…….

모두는 숙덕거리며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한편으로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저 비리비리한 황태자는 뭘 하려는 걸까. 특혜와 기회? 그게 뭐길래 테이블 위에 상자를 잔뜩 쌓아둔 걸까.

궁금해졌다.

관심이 갔다.

라키엘의 입가에 이기적이고 보람찬 미소가 빵긋 맺혔다.

“그렇기에 이 자리를 통하여, 근래 제가 개발한 체중 조절의 혁명, 다이어트 특효약, ‘더 슬림’을 여러분께, 사상 최초로 소개합니다.”

빠밤!

라키엘의 눈짓과 함께 악단이 웅장한 트럼펫을 불었다. 그가 서 있는 단상 뒤로 드리워진 커튼이 확 걷혔다. 걷힌 커튼 뒤에서 균형 잡힌 엘프 피지컬을 뽐내는 오늘의 광고 모델, 엘프 실비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모두의 시선!

실비아는 애써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이를 갈았다.

‘황태자…… 연회에 참석해서 가만히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던 말이…… 이런 뜻이었어?’

그렇게, 기적의 다이어트 약품이라 불리게 될 베스파로스 여왕벌주 농축액, 더 슬림의 본격 홈쇼핑 판매가 연회장을 기습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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