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57화 (157/468)

157화. 값비싼 진료비 (2)

하루가 지났다.

홈쇼핑 타임의 결과는 매출 대박, 완판이었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약팔이 수완에 야유와 갈채를 동시에 보냅니다.]

[심장 : 크어어 뻑 예ㅋㅋㅋ]

[허파 : 허허허? 파하하핰ㅋㅋㅋㅋㅋ]

[대장 : 이 인간 약을 파는 게 아니라 아주 빨고 다니지 말입니다ㅋㅋㅋ]

[간장 : 이게 되네ㅋㅋㅋㅋㅋㅋㅋㅋ]

[위장 : 근데 다이어트 약품을 엘프 모델로 광고하는 건 허위광고 사기 아님?]

[콩팥 : 그럼 한국 사람들 얼굴이나 비율이 전부 이징재나 원반이라서 걔들 명품 광고 보고 옷 사입겠냐고 아ㅋ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의 교묘하고도 야비한 수법에 감탄하였습니다.]

[오장육부가 미운 놈한테 떡 주듯이 당신에게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 중인 HP : 2,900]

“…….”

머릿속에서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오장육부. 녀석들의 수다를 들으며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내심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후우. 다이어트 약품 그거, 설마 하룻밤 만에 다 팔릴 줄은 몰랐는데.’

어젯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이었던가. 연회에 참석한 영애들의 볼이 향긋한 칵테일의 취기에 살짝 물들어 오르던 즈음이었을 것이다.

기적의 한타(?) 구도 타이밍이 왔구나 싶었다. 즉시 움직였다. 단상 위에 올라서서 테이블을 마련하고, 일사불란하게 홈쇼핑 판매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소개했다. 커튼을 걷고서,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광고 모델 실비아의 모습을 공개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따로 설명이 필요 없었다.

오랜 실전과 운동으로 다져진 실비아의 황금 비율 피지컬이 그 자체로 설명서였고, 개연성이었다.

덕분에 어젯밤, 심드렁하던 영애들의 눈빛이 그토록 활활 불타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다들 상담 테이블에 줄을 섰다. 예약구매 서류에 서명하기 바빴다. 그렇게 50인의 영애는 물론이고, 그녀들을 수행하던 수행기사들에게마저 베스파로스 여왕벌주 농축 다이어트 보조 약품, 더 슬림을 팔아치웠다.

특별히 퍼스트 로열 패키지 에디션이라는 이름까지 붙이며, 바가지를 팍팍 씌워서!

“……밤새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지. 그거, 엄연한 사기 행각이 아닌가?”

한창 지난밤 아름다운 완판의 기억에 잠겨 있던 무렵이었다. 뾰족한 목소리가 날아와 고막을 푹 쑤시고 들어왔다.

라키엘은 기억의 서랍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니,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완판 모델님?”

“…….”

선선한 바람이 부는 아침 산책 정원.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냉랭한 인상의 엘프, 실비아의 얼굴이 한밤중에 물 마시러 주방에 나왔다가 바퀴벌레와 마주친 사람의 표정이 되었다. 즉, 이쪽을 보는 그녀의 눈빛에 경멸의 이모티콘이 백만 개쯤 떠올랐다.

그녀가 미간을 콱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어제 말이야. 어린 인간. 너는 내게 말했지. 진료비를 낼 수 없다면 대신 다른 일을 해달라고. 연회장에 초청할 테니, 그곳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된다고.”

“예, 그랬지요.”

“그런데 그게…… 그런 사기 행각에 동참하라는 뜻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

“사기 행각이요? 제 약품 판매가?”

“그래. 그쪽이 저지를 짓이 그런 거짓과 기만의 술수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거절하셨을 거다?”

“당연하지.”

그녀가 짓씹듯 말했다.

“그렇기에 의심이 드는군. 숲을 불태운 보상을 넉넉한 금전으로 해주겠다던 그쪽의 제안 말이야. 그거, 정말로 지킬 생각은 있는 거겠지?”

“당연하지요.”

라키엘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 인심 좋은 미소가 한껏 맺혔다.

“어젯밤에 실비아 님이 완판 모델로 나서 주신 덕분에 큰돈을 벌었으니까 말입니다.”

“…….”

“정말입니다. 설마하니 다이어트 약품이 하룻밤에 다 팔릴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그거, 스페셜 패키지라서 더 비싸게 받았거든요. 하지만 뭐, 타겟으로 삼은 구매층이 워낙 지갑 빵빵한 분들이셔서.”

“…….”

“덕분에 보상을 드리고도 돈이 조금 남을 것 같습니다?”

“…….”

그거, 전부 내 진료비인 거잖아, 이 사기꾼아.

실비아가 가자미눈으로 라키엘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 힐난의 눈빛에 라키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다곤 해도 제가 마냥 사기만 친 건 아닙니다.”

“어떻게? 나는 그 다이어트 약품인지 뭔지는 먹어본 적도 없는데.”

“압니다. 덕분에 제가 사기꾼 약장수처럼 느껴지겠지요.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제가 파는 약의 효능만큼은 진짜니까 말입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진짜다. 베스파로스 여왕벌주 엑기스의 효과와 부작용 등등의 모든 데이터를 일찌감치 수집하고 분석했으니까 말이다.

“2황자 녀석에게 열심히 먹였거든요. 덕분에 살을 왕창 뺄 수 있었고. 물론 그 약만 먹는다고 해서 저절로 살이 빠지는 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당연히 식단과 운동이 빡쎄게 병행되어야 한다. 거기에 더 슬림을 먹으면? 식단 조절과 운동의 효과를 한층 증폭시킬 수 있다.

“그렇기에 확언할 수 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약효는 진짜입니다. 물론 약의 복용 방법과 용량, 복용 시의 주의점은 패키지 안에 최대한 상세한 설명서로 첨부될 거고 말이지요.”

“…….”

“아, 그리고 예약 구매 서류에는 사후지원 서비스의 내용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사후지원?”

“예. 약품을 꾸준히 복용하며 식단을 지켰다는 증명이 되는데 살이 안 빠질 경우, 약품 구매 비용을 전액 환불해 주겠다는 조항입니다.”

“식단을 지켰다는 게…… 증명이 되나?”

“뭐, 아쉬운 쪽이 꼼꼼히 준비해야죠?”

“…….”

이놈 이거, 암만 봐도 사기꾼 맞는 거 같은데.

실비아는 마뜩잖은 눈초리를 차마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어젯밤에 벌어들인 수익의 상당 부분을 엘프에게 보상금으로 안겨줄 거니까. 그게 약속이니까.

‘그리고 남은 돈은…… 앞으로의 일에 써야겠지.’

최근 설계하고 있던 계획을 떠올렸다. 남은 돈은 그 계획을 실현시키는 자금으로 쓰일 것이다.

“어쨌건, 그래서 말입니다. 저는 이만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봐야겠습니다.”

“황제를?”

“예. 절 부르셨거든요. 아침 일찍부터.”

“어째서?”

“모르죠. 아마 혼쭐이 나게 될 것 같지만.”

“혼쭐이라. 그런 것치고는 걱정이 없는 듯 보이는데.”

“오늘 혼이 나야 제 다음 계획이 원활하게 진행이 될 거라서요?”

“다음 계획이라니?”

“별궁 한의원을 종합병원으로 더 크게 키워보려고 말입니다.”

“…….”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고, 실비아는 입을 다물었다. 종합병원? 그걸 위해서 오늘 황제한테 혼이 나야 한다고?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인간,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움직이는 걸까. 허세인 걸까.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한데.

‘내가 어쩌면…… 얽히지 말았어야 할 인간과 얽혀 버린 건 아닌지.’

그녀의 입가에서 후회의 입김이 새어나왔다. 다른 집행자에게 일을 떠넘길 것을, 괜히 자신이 이번 일을 맡았구나 싶기도 했다.

그 사이, 라키엘은 태연하게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그럼 지급해드릴 보상금의 규모와 파견할 숲 복구 인력이 확보되는 대로 다시 알려드리기로 하지요. 그동안 별궁에서 편히 쉬시길.”

그는 실비아를 남겨두고 걸음을 돌렸다.

이제는 황제를 알현할 때였다.

“대관절, 너는 어찌하여, 짐이 전해준 구혼장을 그따위로 장난처럼 다루었더냐?”

광활할 정도로 드넓은 집무실.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처음 날아온 것은 황제의 진노한 목소리였다. 환영 인사 따위는 없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엄격한 눈빛만이 가슴에 파파팍 꽂혀 왔다.

즉, 황제는 완벽하게 전투적인 갈굼(?) 모드였다. 아마도 이쪽이 구혼장을 2황자에게 짬처리하려고 벌인 일을 질책하는 것일 테지.

라키엘은 내심 태연하게 웃고 말았다.

‘후우. 역시나 예상대로네.’

솔직히 이젠 황제의 까칠한 모습을 보는 일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전에는 엄청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황제의 저러한 갈굼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 지금의 저 갈굼 또한 일종의 ‘테스트’라는 걸 일찌감치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괜찮다. 오히려 이 갈굼이 반갑다. 이 테스트를 무난히 넘기면? 흡족해진 황제는 이쪽이 꺼내는 요구를 흔쾌히 허락할 거다.

‘그러니까 제발! 2인분 같은 갈굼 1인분 낭낭하게 때려 주세요!’

라키엘은 오히려 열망했다. 그런 소원이 통한 것일까. 황제의 따끈따끈한 훈계 융단폭격이 쏟아져 내려왔다.

“가소롭고 또한 가소롭도다. 감히 너는, 최근 네가 벌여온 일들을 짐이 모르고 있으리라 여겼더냐? 짐은 큰 기대를 품고서 너에게 구혼장을 직접 전하였다. 네가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랐다.”

황제의 목소리에 점점, 빡침이 그라데이션(?)으로 깃드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저건 이쪽의 반응을 떠보려는 연기다. 그걸 아는 라키엘은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도 갈굼은 계속해서 더욱 맹렬하게 쏟아졌다.

“한데 너는 어찌하였더냐. 감히, 황실의 중대한 혼사를 장난처럼 여기며 그걸 2황자에게 떠넘기려 들고 있지. 심지어 어젯밤에는 연회에 참석한 각국의 영애와 기사들에게 괴이하기 짝이 없는 약까지 팔았다지? 상스럽기가 짝이 없게, 연회장에서 계약서까지 주고 받아가며 말이다. 짐의 말이 맞지 않느냐?”

“예, 맞사옵니다. 저는 폐하의 말씀을 부정할 생각이 전혀 없사옵니다.”

“그래?”

“예, 폐하.”

“한데 어찌하여 그런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더냐.”

“제가 황실의 혼사를 조금도 장난으로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당연하다는 듯.

다 알고 있다는 듯.

평범한 말 속에 뼈를 잔뜩 넣어서, 당당하게 대답했다. 황제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황실의 혼사를 장난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게 무슨 뜻이더냐.”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떨어져 내려오는 황제의 시선이 묵직해졌다.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묵묵히 받아냈다. 이내 서서히, 황제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의 눈빛과 기색에 놀라움과 흥미가 깃들었다.

“……설마.”

“예, 폐하. 그 설마가 맞을 것이옵니다.”

“정녕, 너는 짐의 의중을 파악하고 있었더냐?”

“예, 폐하.”

물론이다.

“언제부터였느냐?”

“폐하께 구혼장 다발을 건네받고 약간의 시일이 지난 때부터였사옵니다.”

“하면, 네가 짐작한 짐의 의중을 대신 말해볼 수 있겠느냐?”

“물론이옵니다, 폐하.”

……사실은 말이지요.

그 질문만 오매불망 기다렸사옵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황제의 테스트를 만점으로 통과하며 흡족함 포인트를 듬뿍 따내고, 종합병원 개원 허락까지 얻어낼 쇼타임, 스타트.

기회를 포착한 라키엘의 혓바닥이 현란촉촉농염한 트월킹을 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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