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58화 (158/468)

158화. 황제와의 담판 (1)

추억이 춤을 춘다.

지금도 눈을 감을 때마다.

아니, 눈을 뜨고 있어도 항상.

이 아비는 추억에 잠겨든다. 미소를 참는다. 아비가 아닌 짐이기 위해 애써 굳은 마음을 다진다. 너를 볼 때마다 작은 아기였던 너를 안아 들던 첫 순간이 떠오르기에, 아비는 항상 이렇듯 번민하다 미소를 지운다. 끝내 아비 아닌 짐으로 남기를 선택한다.

지금도, 짐은 그렇다.

“…….”

황제는 가만히 눈길을 들었다. 엄격해 보이는 눈동자로, 그 속에 담긴 본심을 꾹 눌러두고서, 냉철함과 혹독함을 애써 가장하며 시선을 던졌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

그곳에 라키엘이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미를 잃었던 아이. 타고나길 연약하여 뜀박질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였던 아이. 하여 볼 때마다 마음을 두 갈래로 찢어놓던 아이였다.

아비의 마음은 언제나 저렸다.

황제의 마음은 항상 참담했다.

아비의 눈으로 볼 적에는 애타게 응원을 하였다. 황제의 눈길로 볼 때에는 엄하게 독촉해야 하였다. 상반된 두 마음 사이에서 항상 번민해야 했다. 그러나 언제나 이기는 것은 황제의 마음이었다.

지금도 그리 하여야 할 터인데. 거대한 제국의 지배자로서 분명 냉정해져야 함이 마땅한데. 요즘은 그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자꾸만 아비의 마음이 가슴을 흔들었다. 저 아이를 조금만 더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아 주라고, 달래듯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였다.

황제는 눈에 힘을 주었다. 짐짓 더욱 엄격해진 목소리로 말하였다.

“감히, 네가 짐의 의중을 파악하였노라 자랑스레 떠들 수 있겠느냐? 정녕코?”

“예, 폐하.”

“자신은 있느냐?”

“물론이옵니다, 폐하.”

“…….”

사실일까.

과연 저 아이가 자신의 뜻을 처음부터 파악하고 헤아렸던 것일까. 묘한 기대감 속에서 황제는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자신의 첫째, 라키엘을 굳은 눈길로 굽어보았다. 하지만 그 눈동자 속에 담긴 일말의 흐뭇함을 미처 모두 감추지는 못하였다.

덕분에 라키엘은 눈치챌 수 있었다.

‘저 양반, 엄청 기뻐하네.’

그냥 기뻐하는 정도가 아니다. 보는 사람이 없다면 주먹을 휘두르며 환호성이라도 지를 기세다. 그걸 열심히 억누르는 황제의 본심이 얼핏 느껴졌다. 꾹 쥐고 있는 주먹과,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눈꼬리의 주름을 보자니 확실했다.

그래서였다.

라키엘은 오히려 마음이 착 가라앉음을 느꼈다. 묘하게 가슴 한쪽으로 스며드는 죄책감. 내게 저런 눈길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사실 난 당신의 아들이 아닌데.

하지만 그는 작은 감정의 물결을 구석으로 밀어냈다. 지금은 쓸데없는 감상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도 아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그걸 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쇼타임.’

마음을 다졌다. 죄책감이 밀려난 빈자리를 자신감 스민 미소로 채웠다. 황제를 바라보았다. 정성껏 준비한 말들을 혓바닥 위에 촵촵 올렸다. 발사했다.

“사실은 처음부터, 폐하께서 제게 구혼장 다발을 직접 건네주셨을 때부터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은 하고 있었사옵니다. 그것을 보다 명확히 알아챈 것은 시일이 조금 더 지난 이후부터였고 말이옵니다.”

“흐음, 무엇을?”

“폐하께서는 그 구혼장 전부를 거절할 생각이지 않으셨사옵니까?”

“짐이? 그것들을 전부?”

“예, 폐하.”

“가당찮구나.”

“아니실 텐데요.”

“그리 건방진 짐작을 품은 근거가 무엇이더냐?”

“폐하께서 저를 일찌감치 혼인시키지 아니하셨기 때문이옵니다.”

“……뭐?”

황제가 멈칫했다.

라키엘은 내심 미소를 삼켰다.

‘빙고.’

역시나 예상대로다.

어째서 소설 속 황태자 라키엘은 일찍 혼인을 하지 않았는가. 사실 그동안 나름 많이 생각하고 궁리했던 문제였다.

따지고 보면 그랬다. 라키엘의 건강이 아무리 좋지 않다고 해도, 혼인의 상대로 매력이 없다고 해도, 그래도 일단은 황태자였다. 만약 황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반 강제로라도 짝을 찾아 맺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그러지 않았다.

이유?

처음엔 아리송했지만, 요즘은 알 것 같았다.

“만약 저를 일찍 혼인시켰다면, 지금쯤 벌써 황손을 얻으셨을 겁니다. 건강이 좋지 못한 저를 건너뛰어 안정적으로 폐하의 뒤를 이을 황손을 말입니다.”

사실이다. 그렇게 황손을 일찌감치 얻었다면 황태자 라키엘의 건강이 폐급이라 해도 문제가 없다. 황제가 건재한 사이에 황손이 충분한 나이로 자라줄 테니까. 과감한 라키엘 패싱(?)을 감행하고 황손에게 황위를 물려주면 되니까.

“하오나 폐하께서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으셨지요. 그 뜻은 자명하옵니다. 어쨌거나 처음부터 저를 건너뛸 생각이 없으셨다는 것. 그렇기에 대신…… 제게 보잘것없는 가문의 짝을 맺어줄 뜻이시겠지요.”

“허. 건방진 추측이로구나.”

“동시에 정확한 추측이겠지요.”

“감히 확신을 하는 것이더냐?”

“예. 그렇기에 감히 짐작할 수 있었사옵니다. 구혼장을 제게 넘기신 것 자체가 하나의 테스트라고 말이옵니다.”

“테스트라…….”

“제가 구혼장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지켜보며 제 역량을 시험하고 가늠하시려던 것, 아니시었사옵니까?”

“…….”

“하여 폐하께서 가늠하시던 정답대로 행하였을 뿐이옵니다.”

“……짐의 의중에 따라, 모든 구혼장을 거절하며, 동시에 비난을 받지 않을 적절한 행사와 명분을 마련하였다?”

“예, 폐하.”

라키엘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다. 사실 연회는 광역(?) 거절을 시전하기 위한 적당한 핑계일 뿐. 2황자가 누구와도 맺어지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맺어지면 당연히 더 좋은 거고.

황제의 눈길이 굳었다.

“참으로 알량한 자신감이로구나. 너는 대체 무엇을 근거로, 짐이 너를 빈한한 가문의 여식과 맺어줄 생각을 품었으리라 짐작한 것이더냐?”

“그것 또한 간단한 문제이옵니다.”

“……고하여 보거라.”

“예, 폐하. 그 답은 저의 건강이 아직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건강?”

“그렇사옵니다, 폐하.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저는 아직 나약하옵고, 언젠가 중년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눈을 감을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아마 폐하께서도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시겠지요.”

“…….”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들의 단명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 것이 수백, 수천 번이었다. 황제로서는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아비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끝내 외면할 수는 없는 가능성이기도 하였다.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하여 만일의 경우 제가 중년의 나이에 쓰러졌을 때. 그때 황손의 나이가 애매하게 어리다면…… 저의 짝이 될 황후의 가문이 매우 중요해지지 않겠사옵니까?”

“…….”

“만약 황후가 강성한 가문의 출신이라면, 황후와 그 외척들은 어린 황자를 허수아비로 앉히고서 황가의 권력을 마음껏 행사하겠지요. 아마 폐하께서는 그런 외척의 발호를 바라지는 않으실 것이옵니다.”

“과연, 그리 생각하였느냐?”

“예, 폐하. 그렇기에 저를 일찍 혼인시켜 후사를 일찍 준비한 것도 아니니, 분명 제 짝은 빈한한 가문의 여인이 될 것이라 짐작을 하였사옵니다. 그러니 이번에 구혼장을 보낸 영애들은 모두 후보가 아닐 것이라 보았고 말이옵니다.”

“할 말은 거기까지이더냐?”

“예, 폐하.”

“듣자하니 혀 놀림이 제법 예사롭지가 않구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라키엘은 태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능글맞을 정도로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그 얼굴을 보며 황제는 내심 침음을 삼켰다.

‘이 아이는…… 언제 이렇게 성장하였단 말인가.’

정답을 정확하게 맞추었다. 자신의 속내를 확실하게 짚어냈다. 아예 반박할 여지마저 없을 정도로, 빈틈없는 추측과 분석이었다.

놀라웠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미를 잃었던 아이. 타고나길 연약하여 뜀박질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였던 아이. 하여 볼 때마다 마음을 두 갈래로 찢어놓던 아이였다.

그렇듯 언제나 병상에 누워만 있던 아이가, 차츰 건강해지는 모습을 보이며 갖가지 일을 벌이더니…… 어느샌가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와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소름이 돋았다.

뛸 듯이 기뻤다.

그렇기에 황제는 더욱 표정을 굳혔다.

“감히 세 치 혀 놀림으로 짐의 의중을 짚어낸 듯이 기고만장해하는 꼴을 보자니, 참으로 가당치 않구나.”

“송구하옵니다, 폐하.”

“이제는 겁을 내지도 않는 것이더냐?”

“저는 그저 폐하의 뜻에 따라 몇 마디 어지러운 말씀을 꺼내었을 뿐이옵니다.”

“끝까지 알량한 혀 놀림에 의지하려 드는구나.”

“그 또한 송구하옵니다, 폐하.”

“허.”

황제의 헛웃음이 집무실을 채웠다. 실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러나 사실은 오른쪽 왼쪽 콧구멍이 흐뭇함의 메들리 박자로 벌렁거리려는 것을 힘껏 참아내며, 황제가 말했다.

“잡설은 되었다. 오늘 네가 짐을 찾아온 것은 분명 원하는 바가 있어서이겠지?”

“그렇사옵니다, 폐하.”

“어디 말해보거라.”

“제 청을 들어주실 생각이시옵니까?”

“감히, 청을 말하기도 전에 떼를 쓸 참이더냐?”

황제의 눈빛이 엄해졌다.

그러나 라키엘은 진실을 알았다.

겉으로는 화가 난 듯이 구는 황제. 그러나 사실 속으로는 엄청나게 흐뭇해하고 있다고. 자신의 의중을 정확히 맞춘 이쪽에게 상을 내리려 하고 있다고. 그 상이 바로…….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것이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지간한 부탁은 다 들어줄 것이다. 그럴 각을 만들기 위해 황제를 힘껏 구워삶은 거니까.

라키엘은 짐짓 예의 바른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하오면 폐하께, 감히 청을 드리옵자면…….”

그의 머릿속이 재빠르게 착착 돌아갔다. 최근 품고 있던 장기 계획을 떠올렸다. 그것은 별궁 한의원을 종합병원으로 키우는 것이었다.

‘그래야…… 내가 더 오래 살 수 있으니까.’

앙부아즈에 있던 무렵이었던가.

군의관 리한으로 위장 복무를 하며 은근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이 혼자서 모든 병원 진료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사실은 그러면 안 되지. 효율이 너무 떨어져.’

생각해보면 그랬다.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진료를 해도, 하루에 진료할 수 있는 환자의 숫자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앞으로는? 별궁 한의원이 커지고 명성이 높아질수록 몰려드는 환자가 많아질 것이다.

그래서였다.

‘나 혼자서 그걸 다 진료할 수는 없어. 사실은 요즘도 이미 충분할 만큼 벅차. 가르딘 경 외에 다른 의사들이 필요해.’

내과, 외과, 비뇨기과, 이비인후과 등등. 여러 다양한 의사를 고용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러면 자신은?

‘나는 보너스 수명을 확실하게 줄 수 있을 중환자만 맡고, 나머지 자잘한 환자들은 고용된 의사들에게 토스하는 거지.’

그러면 된다. 보너스 수명 좀 얻어보려다가 무한 진료에 짓눌려 과로사 당하는 팔자(?)를 모면할 수 있다. 훨씬 효율적으로 보너스 수명을 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제가 쌓아온 실적을 근거로, 제게 황도 마젠타 의료대학의 명예 교수 자격을 주십시오.”

라키엘의 도전적인 요구가 황제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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