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황제와의 담판 (2)
“제게 황도 마젠타 의료대학의 명예 교수 자격을 주십시오.”
“……무어라?”
질렀다.
요구를 던졌다. 과감하게 내민 요구가 황제의 표정을 희미하게 흔드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라키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명예 교수의 지위는 앞으로 내가 하려는 일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니까.’
필수 요소.
살다 보면 무엇을 하건, 반드시 챙겨야 하는 준비물이 있다. 컴퓨터 게임을 하려면 컴퓨터가 있어야 한다. 대학원생이 되려면 인류의 존엄을 포기할 각오가 필요하다. 퇴근을 하려면 출근을 해야 한다.
이번에 자신이 품은 계획도 마찬가지였다. 명예 교수의 자격이 반드시 필요했다.
“짐이 하나 묻자꾸나. 의료대학의 명예 교수라. 어찌하여 너는 그런 황당한 지위를 요구하는 것이더냐?”
과연, 황제가 미간을 찡그리며 이쪽을 굽어보았다. 기다렸던 질문이다. 라키엘은 미리 준비한 대답을 꺼내놓았다.
“제가 운영하는 별궁 한의원이 아직 불법 의료시설이기 때문이옵니다.”
“흐음.”
“폐하께서도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제겐 아직 의사 면허가 없사옵니다. 그렇기에, 제국의 의료법상 저를 대표로 삼고 있는 별궁 한의원 또한 엄밀히 따져 미등록 시설, 무자격 의료 시설에 해당합니다.”
“……그러하였더냐?”
“예, 폐하.”
“짐은 거기까진 미처 몰랐다만.”
“…….”
“하면 황태자가 공공연한 위법을 자행하고 있었으니 당장 별궁 한의원을 폐쇄…….”
“아니, 그게 아니옵고!”
재빨리 황제의 말을 잘랐다.
“마젠타 의료대학의 명예 교수는 의사 면허 소지자와 같은 지위와 자격을 지닌다고 들은 바가 있사옵니다.”
“허?”
“그렇기에, 제가 명예 교수의 자격을 얻는다면 의사 면허를 소지한 것과 법적으로 동일한 상태가 되어, 별궁 한의원도 불법 의료 시설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한가?”
“예, 폐하.”
“단지 의사 면허와 동일한 자격을 얻기 위해서 이런 무리한 요청을 하는 것은 아닐 테지?”
“그렇사옵니다, 폐하.”
라키엘은 고개를 숙이며 내심 감탄했다. 역시 황제다. 이쪽의 요구에 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럼 이쪽도 어느 정도는 패를 공개해야겠지.
짧은 계산을 마친 후에 말했다.
“저는 더 많은 의사를 고용하고 싶사옵니다.”
“더 많은 의사를?”
“예, 폐하.”
“흐음. 그런 이유라면…… 그래. 정식 의사 면허를 소지한 의사들이 굳이 불법 의료시설에 취업하려 들지는 않겠지.”
“바로 그렇사옵니다, 폐하.”
황제의 짐작이 정확했다.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제국의 의료법상, 미등록 불법 의료시설은 의사 면허를 소지한 의사를 고용할 수 없사옵니다. 또한, 의사들도 고용되는 것을 꺼릴 것이옵니다.”
“그렇겠지. 불법 시설에서 일한 경력을 다른 곳에서 인정받긴 어려울 테니까. 설령 그것이 황태자가 운영하는 곳이라 하여도 말이야.”
“정확한 말씀이시옵니다, 폐하.”
그래서였다.
더 많은 의사를 고용하려면, 별궁 한의원이 법적으로 인정받는 의료시설이 되어야 했다. 그러자면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내가 의사 면허를 따는 것. 다른 하나는, 의사 면허와 동일한 자격을 지닌 의료대학 명예교수 지위를 얻는 것.’
그중에서 매력적인 쪽은 단연코 명예교수의 지위였다. 시간이 들지 않으니까. 약간의 심사만 거치면 곧바로 손에 거머쥘 수 있으니까.
반면에 의사 면허를 따려면? 입학과 졸업을 해야 한다. 최소 4~5년은 걸릴 거다. 그건 싫었다.
“한데 말이다. 짐은 또 한 가지가 궁금하구나.”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황제의 묵직한 목소리가 내려왔다. 살짝 시선을 올려보니, 황제가 가늘어진 눈매로 관찰하듯 이쪽을 지그시 굽어보고 있었다.
“더 많은 의사를 고용하고 싶다는 네 뜻은 알겠다. 한데 어째서이더냐?”
“예?”
“어째서 더 많은 의사를 고용하겠다는 것이더냐. 혹여, 독특한 취미생활을 더욱 크게 키워보겠다는 뜻이더냐?”
“그것은 아니옵니다. 그리고 제가 별궁 한의원을 운영하는 것 또한, 단순한 취미가 아니옵니다.”
“하면?”
황제의 더욱 가늘어진 눈길. 라키엘은 그 시선을 받아내며 말했다.
“저는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싶사옵니다.”
……사실은 ‘보너스 수명을 더욱 효율적으로 팍팍 챙겨서 무병장수 만수르형 라이프를 즐기고 싶사옵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기에, 적당히 뻔하고 그럴듯한 모범답안을 꺼냈다.
한데 돌아오는 황제의 대답은.
“거절한다.”
“……예?”
설마 진짜?
라키엘은 미간을 콱 찡그렸다. 어느새 황제는 뜻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는 지금까지 불법으로 의료시설을 운영한 것도 모자라, 그 행위를 무마하고자 세 치 혀를 놀리며 짐에게 명예교수의 지위를 요구하려는 것인가?”
“…….”
“참으로 알량하고 또 얄팍하도다. 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의사가 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수많은 의료대학 학생의 피와 땀, 눈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더냐?”
“하오나, 폐하?”
“고하거라.”
“제겐 이미 수많은 실적이 있사옵니다.”
“알고 있노라.”
“한데 어찌하여 제게 명예교수의 자격이 없다고 단언하시옵니까?”
“네가 조금 더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니라.”
“……커허.”
어오 씨.
라키엘은 입술을 박차고 나오려는 욕설의 뒷덜미를 가까스로 붙잡아야 했다. 한편으로는 황제의 심리를 간파할 수 있었다.
‘이 양반 또 이러네, 또 이래. 한동안 잠잠하더니 고질병 도졌네, 또.’
세상에 황제 이 양반만큼 후계자들의 자립심 함양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인간이 또 있을까. 어째 자식들이 편하게 가는 꼴을 못 보는 저 성격도 참 병이구나 싶었다.
그러나 이미 황제는 즐기는 자의 모드(?)로 진입해 있었다.
“황태자라는 타고난 지위. 그것만을 휘둘러 편한 길만 택하였을 때. 과연 훗날의 고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겠느냐? 황가의 존폐를 결정할 국난의 가시밭길을 묵묵히 헤쳐나갈 수 있겠느냐? 아니다. 짐은 아니라고 본다.”
“…….”
아 쫌.
“하여 짐이 너에게 권하노니, 명예교수의 지위 대신에, 의료대학 졸업반에 편입학을 하여 정정당당히 졸업시험을 치르는 것은 어떻겠느냐?”
“예?”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졸업반 편입? 졸업시험을 치르라고?’
라키엘은 재빨리 계산기를 두드려보았다. 마침 지금 시기는 졸업반이 마지막 학기를 이수하는 기간이었다. 졸업까지 남은 시간도 불과 4개월 남짓. 그런데 지금 졸업반에 편입을 하고 졸업시험을 치른다면?
‘해볼 만하겠는데?
각이 나왔다. 이득이 될 제안은 일단 받아야 한다. 라키엘은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사옵니다, 폐하.”
“좋은가?”
“그렇사옵니다, 폐하.”
“그래. 네가 만족한다니 짐도 기쁘구나.”
“…….”
사실 만족스럽진 않았다. 명예교수직을 받으면 즉석으로 해결될 일이, 4개월쯤 걸리는 일로 대체되었으니까.
‘하지만 저 깐깐한 양반한테서 이 정도를 받아낸 거면 선방은 한 거지.’
최소한 평타는 쳤다.
그렇듯 얻을 것은 얻었으니, 이제는?
“하면, 저는 이만 물러가 볼까 하옵니다.”
“설마, 용건만 해결하고 가려는 것이더냐?”
“……예?”
“아니다. 물러가거라.”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폐하.”
행여나 또 꼬투리가 잡힐까, 라키엘은 빛의 속도로 물러났다. 잠깐이나마 대화가 오갔던 황제의 공간이 다시금 적적해졌다. 그러나 황제는 혼자가 된 공간을 어느새 머금은 흐뭇한 미소로 채우고 있었다.
“후후. 허허허.”
흐뭇했다.
이제는 당당히 고개를 들고 자신에게 요구를 하는 아들의 모습이. 자꾸 무언가를 하려고 일을 벌이는 저 모습이 볼 때마다 흐뭇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녀석이 요구하던 명예교수의 지위를 거절했다. 과연 스스로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를 오래 기다리는 것은 싫었다.
하여 녀석에게 졸업반 편입을 허락하여 주었다.
‘그리고 짐은…… 의료대학의 학장에게 따로 가혹한 언질을 넣을 셈이니라. 네가 과연 그 불가능할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지, 어디 지켜보자꾸나.’
너무나 기다려진다.
결과가 기대된다.
아들이 더욱 성장하길 바라는 황제의 어깨가 남몰래 덩실덩실 기쁨의 바운스를 그렸다.
♣
“의료대학의 학장, 벨버디어가 제국의 적법한 후계자이신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전하를 뵙습니다.”
불곰이 허리를 숙였다.
아니, 의료대학 학장이 인사했다.
“…….”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목울대가 상하로 출렁이는 걸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앙부아즈에서 쟈빌론을 봤을 때도 엄청난 덩치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인사를 올리는 의료대학 학장은 그보다 훨씬 더했다.
키는 어림짐작으로 봐도 2미터 이상. 심지어 등빨마저 장난이 아니었다. 비주얼로만 봐서는 저기 어디 동구권 스트롱맨 대회에 출전하는 아재를 데려다 놓은 줄로만 알았다. 가히 우랄산맥 떡멧돼지 스타일이랄까.
“반갑군. 이리 반겨주어서 고맙고.”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전하.”
다시금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는 학장. 하지만 딱 보니까 알겠다. 이 학장은 날 반기는 기색이 아니다. 아니, 좀 더 날것으로 말하자면, 싫어하는 듯하다.
‘극혐으로 넘어가기 직전인 눈빛인데?’
보고 있자니 느껴졌다.
이쪽이 황태자이기에 지극히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미처 모두 숨기지는 못한 부정적인 감정이 눈치로 감지됐다. 한편으로는 학장이 이쪽을 싫어하는 이유도 짐작이 갔다.
‘아마도 내가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꼼수를 쓴다고 여기는 거겠지.’
황제에게 부탁해서 졸업반에 편입을 하게 됐다. 말이 졸업반이지, 최소 5년 이상을 의료대학에서 공부한 이들과 단숨에 같은 자격을 받게 됐다. 저들이 기울였을 노력을 생각한다면, 형평성에 심히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게다가 내가 근본 없는 이상한 의술을 사용한다고 여기고 있을 거고.’
황도에 가득 퍼진 별궁 한의원에 대한 소문이 떠올랐다. 마냥 좋은 소문만 있는 건 아니었다. 황태자가 괴상한 가시로 사람의 온몸을 푹푹 찌른다더라, 뭉쳐서 말린 풀을 생살에 올려두고 태우며 괴롭힌다더라, 등등.
은근한 비방과 의혹의 시선이 약간이나마 존재하는 게 사실이었다. 물론 이해는 갔다. 이곳의 시각으로 보자면 한의학의 모습이 많이 괴상하게 비칠 테니까.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학장의 입장에서 보기에 나는 지위와 권력을 남용하며 근본 없는 괴상한 의술로 졸업장을 따가려는…… 의료대학의 역사와 전통, 명예를 무시하고 먹칠을 하려는 개싸가지 없는 황족수저인 셈인 거네.’
역시 인생은 역지사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라키엘은 학장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음에도, 자신의 태도를 딱히 바꾸진 않았다.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지금 학장에게 살갑게 대한다고 해서 뭔가가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
“하면 이제부터 안내를 부탁할까.”
“예, 전하. 의료대학을 둘러보실 생각이십니까?”
실력으로 증명하면 된다. 권력과 지위를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근본 없는 이상한 의술을 쓰는 게 아니라고. 모든 것을 실력으로 증명하고, 보여주면 될 일이다.
“우선, 내가 치르게 될 졸업시험부터.”
미리 말하자면, 졸업이라면 자신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누군데. 나, 이한이 바로 서울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대학교 한의학과 차석 졸업생이란 말이다.’
라키엘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슬그머니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