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60화 (160/468)

160화. 원인 불명의 마비 (1)

“이쪽입니다, 전하.”

의료대학은 생각보다 꽤나 넓었다. 단순히 건물이 큰 게 아니었다. 제법 널따란 부지에 여러 개의 3, 4층 건물들이 큼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대학 캠퍼스랑 비슷하네.’

어느 건물은 실습동. 어떤 건물은 입원 병동 등등. 갖가지 용도와 목적에 맞는 건물의 구분과 배치가 돋보였다.

덕분에 잠깐 추억이 돋아났다. 한국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 당시엔 혼자서 썸만 몇 차례 타다가 결국 연애는 한 번도 못해봤던가.

‘…….’

왜 갑자기 한숨이 나오는 걸까.

라키엘은 가슴 시린 솔로 연대기(?)를 애써 머릿속 서랍 속으로 구겨 넣었다. 그리고 현생에 집중하고자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덕분에 곧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커다란 4층 건물의 어느 널따란 실습실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전하.”

“…….”

학장의 안내를 받으며 실습실로 들어갔다. 순간, 30여 명의 시선이 이쪽으로 날아와 꽂혔다. 새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는 이들. 나이는 20대 중반에서 후반까지 다양했다. 보자마자 저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졸업반 학생들이구나.’

곧 정식 자격을 취득할 예비 의사들이었다. 한데 어쩐지 이쪽을 보는 시선이 별로 따뜻하지가 않았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차갑고 배타적이었다. 더 날것으로 말하자면, 까칠했다. 마치 자격 없이 이곳에 들어온 이방인을 쳐다보는 눈빛이랄까.

그 눈빛들을 보자마자 딱 알 수 있었다.

‘벌써 여기까지 내 소문이 퍼졌나 보네.’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저 학생들의 반응이 아까 학장의 것과 똑같았다. 마치 그 스승의 그 제자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한 반응들이었다.

‘아마도 황태자가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서 졸업장만 쏙 빼먹으려 든다는 소식을 들은 거겠지. 그래서 다들 기분이 나쁜 거겠지. 자신들이 몇 년씩이나 공부하고 노력해서 이제 겨우 따내려고 하는 결실을, 내가 아무런 대가 없이 편리하게 취하려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저들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충분히 그렇게 여길 법도 했다. 그래서였다. 저들이 눈빛으로 은근한 까칠함을 내보이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학장을 돌아보았다.

“소개를 부탁할까?”

“예, 전하.”

학장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예비 의사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주목. 여러분에게 소개하지. 제국의 황태자이신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전하이시네. 미리 소식을 들은 이들도 있겠지만, 전하께서 앞으로 함께 졸업 과정에 참여하시게 되었으니 많은 도움을 부탁하는 바이네.”

학장이 영혼 없는 말투로 말했다. 예비 의사들이 영혼 없는 표정으로 의례적인 박수를 쳤다. 그 모습들을 보자니 다시금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다들 날 의사로 취급할 생각이 1그램도 없는 거구만.’

딱 보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학장은 이쪽을 그저 황태자라고만 소개했다. 의료대학의 학장이라면, 아니, 황도 마젠타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별궁 한의원에 대해 알고 있을 텐데도, 그런 언급은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심지어 이쪽의 졸업 과정을 잘 거들어 주라는 당부까지 했다. 즉, 이쪽이 혼자서 졸업 과정을 완수할 수 없으리라 에둘러 말하고 있었다.

예비 의사들의 태도 또한 그러했다.

“하면, 학장님? 전하께서는 지금까지의 과정 없이 곧바로 우리와 함께 졸업시험을 치르시게 되는 것입니까?”

예비 의사 중에 한 사내가 나서며 물었다. 회갈색 더벅머리를 한, 딱 봐도 공부깨나 할 것 같은 인상의 예비 의사였다.

“아, 켈로드? 마침 좋은 질문을 했네.”

‘켈로드’라 불린 더벅머리 예비 의사의 발언에 학장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전하께서는 우리의 모든 수업 과정을 낯설게 느끼실 것이네. 그러니 다 함께, 서로 도울 것은 도우며 졸업의 과정을 밟아가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학장님? 방금 하신 말씀은 지금까지 제가 배우고 실천하려 애를 써 온, 우리 대학의 설립 취지와 결이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책임을 짊어지려면 자격부터, 라는 취지 말인가?”

“그렇습니다.”

“자격을 따는 방법이야 꼭 정해진 것만 있는 건 아닐 테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켈로드가 못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장이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라키엘은 어처구니를 잃고서 허허 웃어야 했다.

‘허허, 이 사람들 보소.’

멀쩡히 내가 여기에 있는데 대놓고 멕이는(?) 대화를 나누다니. 황태자의 권력이 무섭지도 않은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의료대학 학장이 굉장히 강직한 원칙주의자라더니, 정말로 그렇구만.’

그러니 권력과 지위 앞에서도 나름의 저런 반항을 슬쩍 엿보이는 것일 터다. 그의 제자인 예비 의사들도 그런 그에게서 확실히 영향을 받은 것 같고.

그래서 라키엘은?

‘다들 마음에 드네.’

오히려 좋았다.

만일, 학장이 자신에게 노골적인 아첨을 했다면 오히려 역겨웠을 것이다. 의료인은, 사람 목숨을 다루는 사람은 모름지기 저렇게 강직해야 한다. 권력에 쉽게 굴하거나 타협하기보다, 자신의 이상과 신념에 따라 고집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라키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때 한국에서도 저렇게 강직한 어느 응급외과 의사분이 미디어의 주목을 받기도 했지. 그런 분들이 잘되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였다.

자신을 앞에 두고서도 은근히 대담하게 호박씨를 까는 학장과 학생들이 멋지게 보였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살짝 탐이 났다. 할 수만 있다면 모조리 납치(?)해서 별궁 한의원에 취직시키고 싶어졌다.

그 사이, 학장의 말이 이어졌다.

“각설하고, 그럼 이제부터 모두에게 졸업시험 과제를 공개하겠네.”

삽시간에 실습실 전체가 조용해졌다. 다들 눈을 반짝거리며 숨 쉬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다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린 걸까. 그런 모두를 향해 학장의 발표가 떨어졌다.

“매번 졸업시험의 내용이 바뀌어서 다들 짐작하지는 못했을 테지만, 올해의 졸업시험 과제는 ‘조별 진료’가 될 것이네.”

……조별 진료?

설마, 조별과제?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어지는 학장의 설명을 듣자니, 과연 그 짐작이 맞았다.

“이제부터 자네들은 6명이 한 조가 되어 환자 하나를 공동으로 담당할 것이네. 목표는 다 함께 책임을 지고서 환자를 효율적으로 집중진료하여 완치시키는 것일세. 자, 그럼, 이제부터 조 편성을 위해 제비를 추첨하겠네.”

학장이 눈짓했다. 지금껏 말없이 한쪽에 있던 조교수가 함을 들고 나섰다.

“함 안에 색이 입혀진 종이가 있을 것이네. 같은 색깔의 종이를 뽑는 사람들이 한 조가 되는 것이니, 각자 부담 없이 뽑아보도록. 그럼…… 전하? 부디 전하부터, 부탁드립니다.”

설명을 마친 학장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함에 손을 넣었다. 손에 잡히는 수십 장의 종이 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뽑았다.

‘녹색인가.’

뒤이어 졸업반 예비 의사들이 차례로 종이를 뽑았다. 추첨 결과에 따라 소리 없이 희비가 교차했다. 어떤 이는 친하거나 능력이 뛰어난 자와 한 조가 되어 기뻐했다. 또 어떤 이는 같은 조가 된 멤버를 보며 절망했다.

특히, 이쪽과 같은 녹색 종이를 뽑은 이들의 눈빛에 낭패감이 떠오르는 게 확실히 보였다.

“…….”

다들 망했다는 눈빛이다. 그렇게나 싫은 걸까. 라키엘은 같은 조가 된 나머지 5명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아까 그 더벅머리 의사도 있네.’

아까 나서서 학장에게 살짝 항의를 하던 회갈색 더벅머리의 사내가 마침 이쪽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일순간 그의 눈빛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혐오의 감정. 이내 그가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지만, 짧은 순간이나마 뚜렷하게 전해져 온 그 감정의 여운만큼은 확실히 전해져 왔다.

‘그 외에는, 으음. 남자 둘, 그리고 여자 둘……은 일란성 쌍둥이인가?’

그러니까 이쪽을 포함해서 남자 넷, 쌍둥이 자매 둘이 한 조가 되었다.

학장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다들 조가 정해졌으면 이동하도록 하지. 전하, 전하께서 계신 조가 1조입니다. 우선, 1조부터 담당 환자를 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학장의 안내를 따라 실습실을 벗어났다. 복도를 걸어, 계단을 오르내리고, 옆 건물로 들어갔다. 옆 건물은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동이었다.

“이곳입니다.”

학장이 안내한 곳은 그중에서도 중환자가 모여 있는, 어느 1인 병실이었다. 그곳에 중년의 사내가 누워 있었다. 한데 그 환자는 중환자임에도 의식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학장이 환자에게 다가갔다.

“미구엘 씨? 오늘은 좀 어떠십니까?”

“뭐…… 여전합니다. 제 다리는 오늘도 움직일 생각을 하질 않는군요.”

환자가 자조적인 미소를 애써 머금었다. 학장이 환자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졸업시험 1조원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이 환자를 익히 알고 있을 것이네. 하지만 전하께서 새로 참여하셨으니만큼 특별히 다시금 설명을 하지. 이 환자는 하지 마비 환자일세. 다만, 아무런 사고나 충격, 부상이 없는데도 어느 날부터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지.”

“…….”

조원들은 그저 묵묵히 학장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표정들이 다들 이상했다. 저들이 짓고 있는 표정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ㅈ됐다는 표정인데?’

아주 그냥 폭망의 예감을 느낀 듯, 다들 안색이 창백해져서 쫙 굳어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학장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우선, 환자는 마비가 시작되기 4주 전부터 설사를 동반한 장염 증세를 보였다네. 그리고 며칠간 발끝에서 따끔거림과 저림을 조금씩 느꼈고, 그 빈도가 늘어감 또한 느꼈지. 그러다가 마침내 엿새 전부터 발가락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이후로 마비의 범위가 점차 위로 번져 올라오며 현재는 두 다리 전체를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네. 여기까지는 다들 알고 있겠지?”

“……예.”

켈로드가 대표로 대답했다. 학장이 의미심장하게 모두를 쳐다보았다.

“자네들의 손에 이 환자의 미래가 달렸다네. 자네들은 열심히 협력해서 이 환자의 마비 원인을 찾아내고 치료할 수 있도록 힘을 써주게.”

거기까지 설명을 겸한 당부를 건넨 학장이 병실을 떠났다. 다른 조원들에게 환자를 배정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학장이 떠난 병실의 모두가 침묵에 잠겼다. 서로 눈치를 살폈다. 이내 다른 조원들의 눈짓을 받은 켈로드가 대표로 나섰다.

“전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밖에서?”

“예, 전하.”

공손한데 여전히 아까보다 한결 까칠하게 느껴지는 켈로드의 태도는 그저 기분 탓일까.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켈로드를 따라 병실 밖으로 나섰다. 다른 조원들도 뒤를 따라왔다. 켈로드는 병실에서 제법 멀어지고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기, 전하. 솔직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희를 위해 뭔가를 해주시겠다는 생각은 제발, 품지 말아 주십시오.”

“…….”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켈로드의 한숨 섞인 말이 이어졌다.

“방금 학장님의 설명을 들으셨겠지만, 우리가 배정받은 저 환자분은 아직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은 마비증을 겪고 있습니다. 물론…… 학장님조차도 그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셨지요.”

“음, 그래서?”

“아마 우리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할 겁니다. 지난 며칠 동안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렇기에 감히 전하께 당부를 드리는 겁니다.”

“뭔가 해주겠다는 생각을 품지 말라고?”

“그렇습니다, 전하.”

“내가 뭘 해준다는 건데?”

“권한을 이용해서…… 우리 조 전체가 졸업시험을 통과하도록 만드시는 것 말입니다.”

“음?”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어 버렸다. 이제는 켈로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다.

“그러니까, 권력 남용을 하지 말아 달라?”

“그렇습니다, 전하.”

“내가 그랬다간, 졸업생 전체가 공평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니까?”

“역시 그렇습니다, 전하.”

“하하. 이 친구 좀 보게.”

라키엘은 그만 파핫 웃어 버렸다.

“난 또 뭐라고. 심각한 얼굴로 할 이야기가 있다길래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하지만 전하. 저희는 심각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켈로드의 표정은 정말로 진지했다. 그 눈빛을 보자니, 그가 어떤 인물인지 더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이놈 이거, 볼수록 마음에 드네?’

그러니까 켈로드와 조원들은 자신들이 해결 불가능한 과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중인 거다. 그게 이쪽 때문일 거라는 원망도 조금은 품고 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이쪽이 행여나 권력을 남용하는 꼼수(?)를 쓸까 걱정부터 하고 있다.

‘자신들의 실력을 정정당당하게 평가받고 싶다는 거겠지. 설령 졸업시험에서 떨어진다 해도 꼼수는 싫은 거야. 다른 조의 졸업생에게 피해를 주기도 싫은 것일 테고.’

그런 이야기를 이토록 걱정을 담아서, 진지하게 꺼내는 놈들이라니. 어디서 이런 인재가 굴러왔나(?) 싶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안타까움의 이유는 간단했다. 라키엘은 켈로드에게 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다. 그런데 우리가 배정받은 환자 말이야. 마비의 원인을 아직 아무도 밝혀내지 못했다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그래? 한데 어떡하지. 나는 원인을 알겠는데.”

“……예?”

살짝 찡그려지는 켈로드의 눈썹. 이쪽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 그런 켈로드를 향해 라키엘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었다.

“난 학장이 설명하는 거 듣자마자 바로 짐작했거든.”

“정말입니까?”

“당연하지.”

정말로 당연하다.

장염 증세와 함께 시작된 발끝의 저림. 그리고 하지의 끝에서부터 서서히 위로 올라오는 마비 증상. 그런데 사고나 부상, 충격이 전혀 없었다는 증언까지.

“환자가 겪는 하지 마비의 원인은 바로…….”

라키엘은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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