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K-맛 가시의 위력 (1)
‘황태자는 어떤 사람일까.’
마젠타노 의료대학의 졸업예정자, 예비 의사 켈로드는 내심 경악감을 삼켰다. 혼란스러웠다. 한편으로는 궁금해졌다.
‘그저 허세를 부리는 줄 알았어. 자신의 사이비 의술을 포장하려고, 우리 앞에서 잘난 체를 하려 드는 줄로만 알았어.’
하지 마비 환자에게 곧 호흡마비도 올 거란다.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정말 황태자의 말대로, 환자의 호흡이 순식간에 불안정해졌다.
“…….”
아까의 위급했던 상황을 떠올리니 다시금 손아귀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갑자기 컥컥대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던 환자. 그런 환자 앞에서 당황하여 얼어 버렸던 자신.
무력했다. 부끄러웠다. 그동안 내심 지니고 있던, 의료대학생으로서의 자부심이 박살 나는 기분이었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말이다.
‘그런데 황태자는 달랐어.’
위급한 환자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수백 명의 중환자를 이미 겪어본 사람처럼 침착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환자의 상태를 체크했다. 환상종을 꺼냈다. 덕분에 환자가 위급한 상태를 넘길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다시금,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
결국엔 황태자가 모든 것을 해결했다. 그를 몰아붙이듯 대했던 자신은 정작 아무것도 못 했다. 생각할수록 얼굴에 벌게졌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다. 환자를 살리는 데에 자신의 자존심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테니까.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전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음?”
“이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앞으로의 치료?”
“예.”
궁금했다. 앞으로 황태자가 어떻게 치료를 진행할 것인지. 자신도 미리 숙지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켈로드의 태도 덕분이었다.
‘허허. 이 친구 좀 보게.’
라키엘은 더욱 흐뭇함을 느꼈다.
‘보통 이런 경우엔 부끄러워서라도, 아까 했던 자신의 언행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더 못나게 구는 놈들이 많은데.’
이 친구는 다른 듯했다. 자신의 자존심보다 앞으로의 원활한 치료가 더욱 중요하다고,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글쎄. 염두에 둔 치료법이 있기는 한데, 그보다는-”
켈로드를 보는 라키엘의 눈빛에 묘한 탐욕이 서렸다. 마치 굴리기(?) 딱 좋은 대학원생 후보를 바라보는 교수님 같은 눈빛으로, 그가 시험하듯 물었다.
“나한테만 의지하지 말고 그쪽 의견도 밝혀보는 건 어떨까?”
“…….”
켈로드는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름 의연하게 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
“예.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보다 솔직히 대답을 드리자면, 제가 나름 지니고 있는 약초 레시피를 사용해볼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처방이 꺼려집니다.”
“어째서?”
“자칫 무지한 상태에서 잘못된 치료법을 강행하다가 오히려 환자에게 해를 입히진 않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흐음, 아까와는 사뭇 달라진 태도인 것 같은데.”
“제 판단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까 말입니다.”
켈로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진단을 정확하게 해낸 이도, 돌발적인 응급상황을 예견한 이도, 그에 적절한 대처를 보인 이도 모두 전하이십니다. 물론 아직은 전하의 진단을 완전하게는 신뢰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아직도 의심을 해?”
“세상에 100%는 없으니까요.”
“신중하네.”
“감사합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은 개뿔.”
라키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뭐 어쨌건, 일단 길랭-바레 증후군의 치료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정맥 면역글로불린(Intravenous Immunoglobulin; IVIG) 주사, 그리고 혈장분리교환법(Plasmapheresis) 정도가 있긴 한데. 그걸 여기선 쓸 수 없고.”
“…….”
“왜 그래?”
“아뇨, 또 처음 듣는 용어를 쓰셔서.”
“신경 쓰지 마. 나도 배운 거 되새기는 기분으로 말하는 거니까.”
“…….”
“어쨌건, 방금 말한 치료법은 여기선 쓸 수 없겠고. 대신에 대안적으로는 신경 우회 침술 정도가 있겠지.”
“신경…… 우회 침술 말입니까?”
“어. 혹시 소문은 들어봤나? 내가 웨어울프 간호사들 꼬리를 마비시킨 거.”
“들어봤습니다.”
……그리고 내심 비웃었습니다. 가시 따위를 꽂아서 웨어울프의 꼬리를 마비시켰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듣고선 말입니다.
켈로드는 뒷말을 삼켰다. 그땐 그저 비웃음만 지었는데. 이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 사이, 라키엘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때 썼던 방법을 조금 응용해볼까 싶군. 이미 염증을 일으켜 마비된 신경을 그대로 두고, 새로운 신경의 경로를 자극으로 일깨워서 하지 마비를 해결하면 될 거 같아서.”
“그게…… 가능합니까?”
“아마도?”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시도였다.
‘경혈 스캐닝이 있으니까, 가능해.’
자신은 환자의 몸속 경혈의 흐름을 모조리 관찰할 수 있다. 덕분에 어떤 경혈을 어떻게 자극하면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 가능하다.
한국에서 한의원을 꾸리던 시절이었다면, 평범한 한의사였던 당시였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시도겠지만, 지금은 충분히 가능한 각이 보였다.
‘게다가 사람의 신경은 실제로도 그렇게 회복이 되기도 하니까.’
특정한 기능을 하던 신경이 죽거나, 소실됐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전혀 엉뚱한, 다른 기능을 하던 신경의 경로가 상실된 기능을 대신해주기도 한다. 그걸 이용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시신경 손상으로 시력을 잃은 분들. 그런 분들의 미각 신경을 이용해서 시력을 되살려 주는 기기도 연구되고 있지.’
카메라 역할을 하는 안경. 그 안경에 연결된 전극 센서를 혀에 대는 방식이었던가. 그러면 미각 신경을 통해 후두엽의 시각 중추를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연구진조차도 어떻게 미각 신경을 통해 시각 정보가 전달되는지 그 원리를 100%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세상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아직은 극초기 단계의 연구라서 오직 흑백으로만, 엄청난 저화질로만 간신히 사용이 가능하다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야.’
그처럼, 인체의 신경이라는 건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가능성이 많은 영역이었다. 하여 자신은 그 가능성을 십분 활용해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라지만, 일단 좀 쉬었다가.”
“예?”
라키엘은 피식 웃었다.
“당장은 환자의 호흡이 안정될 때까지 자연회복을 좀 기다려야 할 단계라서. 나도 엄청나게 피로하기도 하고.”
그의 미소에 지친 기색이 살짝 배어났다. 사실 그의 말은 엄살이 아니었다. 정말로, 진짜로, 굉장히 피곤했다. 솔직히 말해서 당장 쓰러지고 싶을 정도였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
생각해보면 그동안 너무 못 쉬었다. 앙부아즈 내전을 치르고 황도에 돌아오자마자 바쁘게 지냈다. 2황자의 다이어트를 감독하고, 연회 준비를 했다. 엘프의 폐흡충을 치료하고, 의료대학에 오게 됐다.
한데 그 사이에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휴일 없이 하드코어 주 7일 근무를 최소 3개월은 강행한 느낌이었다!
‘아스라한 심법으로 마나를 흡수하며 버티는 게 아니었다면…… 아마 몇 번은 몸져누웠겠지.’
라키엘은 짐짓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그러니까 난 좀 쉬었다가 올게. 그동안 환자 호흡은 코몽이가 도와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혹시나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나 부르고.”
켈로드와 조원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더 남기고는 자리를 떴다. 아까 코몽이를 뽑았던 빈 병실로 다시 돌아왔다. 짱박혀서(?) 쉬기에 딱 좋았다.
물론 그는 단순하게 휴식만 취하지는 않았다.
“꼬슴아?”
“꼬슴!”
“우리 오랜만에 호흡 좀 맞춰볼까?”
“꼬스슴?”
“셀프 시침.”
이렇게 피로할 때는? 셀프로 푹푹 찌르는 게 제일이다. 그렇게 막힌 순환 좀 뚫어준 뒤에 낮잠을 자면 피로가 더욱 제대로 풀리리라.
“그럼 가시 좀 빌릴게?”
“꼬슴!”
이쪽의 뜻을 깨달은 꼬슴이가 선뜻 통통한 궁디를 내밀었다. 알아서 원하는 가시를 뽑아 가라는 뜻이었다.
“고마워.”
뾱!
첫 번째 가시를 뽑았다.
‘후우. 온몸이 물 먹은 신문지처럼 무겁네. 피곤해. 이럴 때는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이 우선이겠지.’
족궐음간경.
다른 말로는 간족궐음지맥(肝足厥陰之脈)이라 불리는 십이정경의 한 갈래. 수태음폐경과도 연계가 되는 이 경맥은, 특히 간에 쌓인 피로를 다스림에 있어 으뜸인 혈자리의 조합이었다.
‘시작은 대돈혈(大敦穴)부터.’
그는 신발을 벗어 자신의 엄지발가락을 노려보았다. 엄지의 발톱뿌리, 둘째 발가락이 있는 방향의 귀퉁이에 대돈혈이 있었다. 일찍이 동의보감에서 이르길, 이 대돈혈이야말로 족궐음간경맥이 출(出)하는 정혈(井穴)이라 하였던가.
톳!
하얀 가시를 대돈혈에 3푼의 깊이로 찔렀다.
다음 차례는 행간혈(行間穴)이었다.
‘엄지 뿌리와 둘째 발가락 뿌리가 만나는 사이 지점.’
그곳의 오목한 지점을 가만히 짚어보면 살며시 맥이 뛰는 자리가 있다. 족권음간경맥이 류(流)하는 곳이며, 이른바 형혈(滎穴)이 되는 자리였다.
툿!
이번엔 조금 더 강하게 6푼 깊이로 찔렀다.
“후우.”
두근, 두근.
아스라한 심법을 통해, 발가락의 경맥이 작게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상쾌한 기운이 다리를 통해 올라왔다. 내부의 장기, 특히 간장을 위로하듯 쓰다듬었다.
딩동!
[당신의 간 기능이 아주 조금 활성화됩니다.]
[당신의 간장이 오랜만에 받는 침술에 작은 기쁨의 소박한 헤드뱅잉을 시전합니다.]
[간장이 당신에게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400]
오랜만이다, 이 감각은. 자신을 스스로 돌보는 이 느낌은.
‘예전 생각나네.’
희미한 미소가 절로 맺혔다. 문득, 처음 라키엘의 몸으로 들어왔던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에도 이렇게 셀프 침술로 수태음폐경을 다스리다가 처음으로 오장육부의 후원을 받았는데.
‘후우. 다음은 태충혈(太衝穴).’
손을 뻗었다. 꼬슴이의 궁디에서 가시를 뽑았다. 태충혈을 조준하고, 시침했다. 그런데…….
톳!
‘……어?’
시침을 한 라키엘은 흠칫했다. 갑자기, 너무나 별안간, 시침을 한 태충혈에서 불로 지지는 듯한 격렬한 감각이 엄습했다!
‘어억?’
대체 뭐지. 혹시 시침을 잘못한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라키엘은 황급히 태충혈이 있는 발등을 쳐다보았다.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의 태충혈에 꽂힌 가시가 시커먼 색깔이라는 것을.
‘허?’
비로소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시침에만 너무 몰입해서, 피로감에 찌든 채 잠깐 딴생각을 하며 추억에 잠겨서, 무심결에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색깔의 가시를 꼬슴이에게서 뽑아 버렸다는 사실을.
한편으로 기억도 났다.
꼬슴이의 가시는 세 가지 색깔이 있었다. 흰색은 무자극 무통증, 갈색은 제법 따끔하고 아픈 자극용, 그리고 검은색 가시는 정체불명의 K-맛.
‘난리 났…….’
황급히 태충혈의 검은 가시를 뽑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가시를 잡기도 전에, 더욱 극한의 고통이 몰려왔다!
‘……그와아아아악!’
영혼 출타를 부르는 K맛 고통!
너무나 아찔한 통증 때문에 라키엘은 그만 혼절할 뻔했다. 자극이 너무나 심했다. 가시를 뽑으려 뻗던 손을 더 움직이지도 못하고서 온몸을 덜덜덜 떨어야 했다.
‘그으읏, 이거, 뭐, 이런 게 다 있…….’
세상이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번갈아 보였다. 마치 누군가가 지독하게 고약한 조명을 마구잡이로 뒤섞어서 껐다가 켜는 것만 같았다.
한데 그러던 와중이었다.
딩동!
청명한 알림음과 함께, 뜻밖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K-맛 효과를 지닌 검은색 가시를 셀프로 시침하였습니다.]
[지옥과 같은 고통을 이겨낸 당신에게 K-맛의 진정한 효과가 적용됩니다.]
[K-맛 가시 효과 발동.]
[당신의 신진대사가 ‘8282 모드’로 급가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