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길랭-바레 증후군 치료술 (2)
……움찔?
환자의 엄지발가락이 미세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움찔거렸다. 평소였다면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였을 정도로 미약한, 하찮은 꿈틀거림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완치를 향한 거대한 첫걸음이었다!
‘허엇?’
마젠타 의료대학의 학장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순간…….
움찔!
“…….”
또 움직였다. 진짜다.
‘어떻게?’
학장의 시선이 환자 곁에 있는 황태자를 향했다. 물론 황태자는 전혀 그를 돌아보거나 하지 않았다. 오직 완전한 집중 상태로 또 하나의 가시를 신중하게 치켜들 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환자의 다리에 가시를 꽂을 뿐.
톳!
이번에 가시가 꽂힌 곳은 허벅지의 넙다리근막긴장근(tensor faciae latae muscle) 상부, 다리를 들어 올리면 골반과 허벅지가 만나며 움푹 파이는 경계 지점.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의 비관혈(髀關穴)이었다.
그 정확한 침술에 다시금 환자의 엄지발가락이 꿈틀, 희미하지만 확실한 시그널을 보내어 왔다.
‘이게 무슨…….’
단순한 반사작용일까. 가시를 찌른 덕에 생겨난 일시적인 반응일까. 혹시나 그런 눈속임에 자신이 속고 있는 건 아닐까.
일말의 의구심을 영혼 밑바닥에서부터 모조리 긁어모았다. 최후의 의심을 불태웠다. 그러나 학장은 곧, 자신의 의심마저도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움찔…… 꿈틀…… 꼼지락…… 꼼틀……!
이제는 가시를 찌르지 않아도 환자의 엄지발가락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마치, 긴긴 겨울잠을 자다가 갓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 미지의 생명체 같은 모습이었다.
결국, 학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켈로드, 자네는 알고 있었나?”
한껏 낮춘 목소리로 속삭이듯, 황태자의 시술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물었다.
“전하께서 사용하시는 저런 방식의 치료가…… 저렇게 효과가 있으리란 사실을 자네는, 자네 조원들 모두가 미리 알고 있었던 건가?”
“아뇨.”
켈로드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저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한 번쯤은 믿어보자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믿어보자고? 근거도 없이?”
학장은 의아함을 느꼈다.
자신이 아는 켈로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학생이었다. 한데 황태자의 근본 없는 치료법을 근거도 없이 믿어보자고 생각했다니.
“자네답지 않은 결정을 했군.”
“아, 그건 아닙니다.”
“어째서?”
“저도, 조원들도 모두 봤으니까 말입니다. 전하께서 온통 퀭한 모습이 되도록 밤새도록 치료법을 고민하고 오시던 모습을 말입니다.”
“…….”
“사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전하의 모습을 보십시오.”
켈로드가 조용히 라키엘의 옆모습을 가리켰다.
“당장 쓰러지실 것 같습니다. 겉모습으로만 보면 지금 치료를 받는 환자보다 더 환자 같은 모습이십니다. 머리는 봉두난발에, 안색은 핏기조차 없이 창백하고, 눈은 움푹 들어가고. 지금 저 모습은 황태자 전하라기보다는 그저…… 옷만 바꿔 입혀놓으면 어딘가 뒷골목에 내던져진 가장 형편없는 술주정뱅이도 훨씬 건강한 모습으로 보일 겁니다.”
“…….”
학장은 조용히 생각했다. 켈로드의 이 발언은 칭찬인가, 욕인가. 켈로드의 잔잔한 말이 이어졌다.
“한데 전하께서는 저토록 초라한 몰골이 되도록 치료법을 고민하셨습니다. 그러고도 휴식을 취하기보다, 환자부터 최우선으로 치료하길 선택하셨습니다. 덕분에 지금은 아까보다 훨씬 추레한 안색이 되셨고, 치료하는 내내 진땀을 흘린 덕에 더욱 엉망진창인, 하수구에서 구르다가 갓 뛰쳐나온 생쥐만큼이나 볼썽사나운 몰골이 되셨지요.”
“…….”
이보게 자네, 몰입한 거 같은데. 학장은 조용히 고민했다. 이 친구를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건 말건 켈로드의 소신 발언(?)이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입니다. 저는 한번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전하께서 보이신 치료에 대한 의지와 자세를 말입니다. 뒷골목에서 굴러다니는 넝마만큼이나 너덜너덜한 안색이 되셨지만, 흡사 10년쯤 묵은 먼지를 방금 툭툭 털어낸 카펫 같은 몰골이 되시는 것을 마다치 않으며, 환자부터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그 행동력…….”
“……으로 맞고 싶지, 아주?”
난데없이 불쑥, 라키엘의 목소리가 켈로드의 발언을 자르고 들어왔다. 모두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곳에 미간을 콱 찡그린 라키엘이 있었다.
“아주 내가 정신 다른 데 팔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본심이 술술 나온다?”
“…….”
켈로드의 입이 다물렸다. 학장과 다른 조원들이 켈로드와 은근슬쩍 한 발짝 거리를 벌렸다. 쩌저적(?) 굳은 켈로드가 물었다.
“혹시, 기분 나쁘셨습니까?”
“어. 당연하지.”
“하지만 제 본심이었는데 말입니다.”
“응. 날 믿겠다고 생각해준 본심은 고맙긴 한데.”
라키엘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역시 자신이 사람을 제대로 본 게 맞다. 켈로드 이 친구, 딱 자기 일과 본분에만 엄청 충실한 타입이다. 사람에게 아부하거나 정치질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못하는, 그래서 오히려 믿고 일을 맡길 만한 타입.
조금 전에도 그랬다.
학장이 병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때는 정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가. 순간, 망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럴 법도 했다. 실시간으로 변화하며 움직이는 기맥을 따라 시침을 하고 있던 터라, 1초의 타이밍도 어긋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한데 옆에서 학장이 계속 말을 걸어온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집중력이고 뭐고 다 깨졌을 터다. 기껏 공들여 해오던 기맥 드리블(?)도 삑사리가 났을 거다. 그러면? 치료고 뭐고 아사리판이 났겠지.
한데 그런 사태를 켈로드가 나서서 막아줬다. 설마 저 고리타분한 우등생 녀석이 학장을 제지해줄 줄이야. 전혀 예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켈로드를 보는 라키엘의 눈동자에 은근슬쩍한 흐뭇함이 배어났다.
‘넌 한의원 취직 당첨.’
그는 내심 음흉한 미소를 숨기며 말했다.
“어쨌건, 오늘의 시술은 여기까지. 결과는 보시다시피 성공적이야. 신경 일부를 살렸으니까.”
그가 환자의 발가락을 가리켰다. 그때 마침, 환자의 발가락이 또 한 번 힘차게 움찔거렸다.
학장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전하? 외람되오나, 이게 어떤 치료법인지…… 조금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알려주는 거야 어려울 것 없지. 염증에 의해 손상된 기존의 신경을 대체할, 우회로를 찾아서 개통했어.”
“우회로……를 말입니까?”
“으음.”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유하자면, 산사태가 나고 무너져서 산길이 끊겼으니까, 새로 자그마한 오솔길 정도를 뚫은 거랄까.”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쉽지는 않지만.”
“…….”
“산에 새 길을 뚫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나. 무성한 수풀도 쳐내야 하고. 땅도 골라야 하고. 물론 큰 길은 아니야. 정말 급하게 뚫은 경로라서 당분간은 조금씩 움직이는 정도가 다일 테지.”
라키엘은 설명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오늘 뚫은 신경의 새로운 경로는 말 그대로 임시 오솔길 정도에 불과했다. 그것마저도 아직은 완전히 뚫은 게 아니었다. 여전히 발가락 일부만 간신히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 그 증거였다.
“그러니 앞으로가 더 중요해. 매일 시침을 하고, 길을 더 뚫어야지.”
“하면…… 마비가 해결되는 겁니까?”
“아마도? 대략 2주에서 3주는 걸리겠지만.”
원래 길랭-바레 증후군은 마비가 진행되다가도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이 환자는 아니었다. 자연 치유를 기대하기엔 예후가 너무 안 좋았다.
“아마 3주쯤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 천천히 걷는 정도는 가능해질 거야. 그 뒤는 환자 본인의 재활 의지에 달렸겠지만.”
“재활이라시면…….”
“새로 뚫은 운동신경을 계속 사용해야지. 산속 오솔길과 똑같아. 사람의 발길이 계속 다녀줘야 오솔길이 유지가 되고, 더 넓고 평탄해지는 거잖아. 반대로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면…….”
“금방 수풀이 무성해지며 길의 흔적조차 사라지는 법이겠지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이해해준다니 고맙고.”
라키엘은 빙그레 웃었다.
고집이 세고 강직한 학장이었다. 의료대학에서 가르치는 의술에 엄청난 자부심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런 학장이 자신의 침술을 어떻게 볼까.
‘아주 세상 말아먹을 돌팔이 사이비 잡술로 보겠지.’
그런데도 지금, 학장이 오늘의 치료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있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는 까닭일 터다.
그런 덕분이었다.
이후의 시술은 한결 편안하고 쉬웠다.
학장을 비롯한 의료대학의 태클 걱정이 사라졌다. 시침으로 신경 경로를 활성화하는 과정도 난이도가 내려갔다.
톳! 토돗! 톳!
매일 꽂히는 가시 속에 환자의 발가락이, 발목이, 종아리가 차례로 움찔거렸다. 날마다 신경이 꾸준히 살아났다. 어느새 의식도 되찾았다. 환상종 코몽이의 인공호흡도 필요 없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첫 시침 이후 17일째 되는 날.
톳!
처음으로 갈색 가시가 환자의 야들야들한 장딴지를 푹 파고들었다. 동시에 환자의 입에서 시침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구성진 7옥타브 환상의 하모니가 터져 나왔다.
“……끄으으앙아아악↗ 뿌다아아얄갸!”
그 순간.
완치를 알리는 힘찬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당신은 시침 시뮬레이션으로 정밀하게 설계한 계획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혈맥에 맞춘 새로운 기법의 시침법을 선보였습니다.]
[환자 : 미구엘은 길랭-바레 증후군으로 인하여 하지마비를 겪었고, 더 나아가 호흡마비로 사망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시의적절한 인공호흡법과 시침법 덕분에, 그의 신체는 급성호흡부전에 의한 사망을 모면하였을뿐더러, 기존의 경로를 대체할 새로운 신경의 경로를 찾아내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환자 : 미구엘이 당신 덕분에 새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료비 청구 (Lv. 2) 스킬이 발동됩니다.]
[환자 : 미구엘은 당신의 인공호흡법과 침술 치료를 통하여 총 31년 3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당신은 31년 3개월의 1/1950에 해당하는 보너스 수명을 정산받습니다.]
[5.76일의 보너스 수명이 계산되었습니다.]
[정산되는 수명의 최소 단위는 1일입니다.]
[정산되는 보너스 수명이 반올림 처리됩니다.]
[총 6일의 보너스 수명이 정산됩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357일]
‘나이스!’
눈앞 가득 떠오르는 완치 보증서(?)를 보며 라키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냈다. 처음 길랭-바레 증후군임을 알았을 때는 솔직히 좀 막막했는데. 이렇게까지 제대로 치료를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는데.
‘그런데 해낸 거야.’
한국에서였다면 상상도, 엄두도 못 내었을 일이었다. 그 시절에 침술로 길랭-바레 증후군을 치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상대를 사이비, 혹은 돌팔이로 여겼을 것이다.
자신이 한의사라도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단순한 침술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저 망상의 영역에나 머무를 일이니까.
‘하지만 이젠 달라.’
기혈과 기맥을 경혈 스캐닝으로 볼 수 있다. 아스라한 심법으로 느낄 수 있다.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기혈과 기맥을 체크하며 시침을 할 수 있다. 그 작은 차이가, 이토록 망상 속에서나 가능할 법했던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한국에서 이게 됐으면 떼돈 벌었을 건데.’
어쩌면 자신의 한의원이 있던 빌딩을 통째로 샀을지도. 묘하게 드는 아쉬움에 그는 쓴웃음을 삼키고 말았다. 그리고 눈길을 들었다.
딩동!
한국에서 빌딩 사는 꿈이 부럽지 않을 보상이, 실시간 메시지로 힘차게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