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길랭-바레 증후군 치료술 (3)
“누우우!”
“꾸꺄!”
“누우!”
“꾸!”
“누!”
“꺄-!”
이곳은 별궁 정원.
초봄의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거대한 미노타우로스 우루스가 정원 한가운데를 방방 뛰어다녔다. 신이 나서. 방금 씹은 풀이 역대급으로 맛있어서. 앞으로 그걸 되새김질할 생각을 하니 더 기분이 좋아져서.
방방 뛰며 거대한 뿔을 휙휙 휘둘렀다. 그러자 아피로스 여왕 애벌레, 꾸꾸도 덩달아 신이 났다.
“꾸꺄꺄! 꾸!”
“누우우! 우!”
꾸꾸가 눈짓했다. 우루스가 풀밭에 벌러덩 누웠다. 운동장만큼이나 널따란 우루스의 배 위로 꾸꾸가 폴짝 뛰어 올라갔다.
그렇게 우루스가 풀밭에서 뒹굴고, 꾸꾸는 우루스의 뱃살 위에서 뒹굴었다. 덩달아 별궁 정원사들의 눈물이 초봄의 쌀쌀한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렸다.
그리고 데미안은 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마음이 갑갑했다.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내가 혼자 별궁에 남아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문득, 얼마 전에 황태자가 자신에게 내린 명령이 떠올랐다. 황태자는 자신이 당분간 마젠타 의료대학에서 지낼 거라고 했다. 그러니 넌 그동안 별궁에 남아서 꾸꾸를 돌봐라, 라고 했던가.
‘……내가 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런 아기 애벌레나 돌보며 시간을 때워야 한다니. 왜 그래야 하는지, 어째서 자신이 황태자를 따라 의료대학에서 곁을 지켜주지 못하게 된 건지. 도통 납득이 되지가 않았다.
‘심지어 세르지오 씨를 비롯한 다른 특근대원들은 모조리 다 데려가 놓고선.’
그게 문제였다.
검투사 시절부터 함께 굴렀던 특근대원들. 그중에 자신만 별궁에 남았다. 다른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의료대학에서 철통 경비를 자랑하며 황태자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겠지. 다른 근위대원들과 함께 말이다.
“…….”
혹시 황태자는 나한테 서운한 게 있나. 아니면, 여기 남아 있으라던 명령에 덧붙인 말처럼 오랜만의 휴식을 누리라는 걸까.
‘이런 휴가, 필요 없는데.’
어쩐지 나만 온실 속의 화초가 되어 버린 기분이다. 황태자가 자꾸만 자신을 안전한 곳에만 애지중지 가두려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거 섣부른 착각일까. 혹은 날카로운 직감일까.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갑갑하다.
‘게다가 역혈의 마나 심법…… 그걸 절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조금 이상해.’
문득, 앙부아즈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반란군의 수장, 소드마스터 쟈빌론과 대적하던 때였던가. 최후의 도박을 거는 심정으로 역혈의 심법을 사용했다. 마나하트가 깨지는 것쯤은 각오를 해두었던 터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마나하트에 어떠한 타격도 입지 않았다. 후유증마저도 없었다. 게다가 역행하던 마나가 발산하던 폭발적인 힘은 어떠했던가. 혈맥이 터질 듯하던 그 짜릿한 감각.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던 기분.
“…….”
그립다.
또 느껴보고 싶다.
황태자의 신신당부만 아니면 역혈의 마나 심법, 조금 더 연구해보고 싶은데. 더 가다듬고 싶은데. 그의 입에서 다시금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꾸꺄!”
통통한 덩어리가 빠꾸 없이 날아왔다. 보송보송 새하얀 솜털이 가득한 해맑은 몸매, 꾸꾸였다. 녀석이 우루스의 뿔을 박차고 뛰어올라 이쪽으로 온몸을 던져오고 있었다.
“…….”
또 아까처럼 놀아달라는 건가.
데미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이 한결 짙어졌다.
♣
짙은 예감이 든다.
이건 리얼 진짜다.
딩동!
귓가에 맑은 알림음이 울리는 순간, 라키엘은 눈길을 들었다. 눈앞을 알차게 채우는 메시지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당신은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기혈의 흐름과 기맥의 상태를 민감하게 진단하며 시침을 하는, 최초의 실시간 능동형 침술을 성공적으로 펼쳐내었습니다.]
[이것은 여러 특수한 자질과 조건을 갖춘 이만이 실행할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하고도 대담한 종류의 시술이었습니다.]
[이러한 대담하고도 적극적인 시도가 당신의 침술 스킬에 커다란 경험적 자산으로 축적되어, 당신의 스킬을 대폭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침술 스킬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오옷.’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라키엘은 기대감으로 눈동자를 반짝 빛냈다.
[스킬명 : 침술 Lv. 6]
[대상의 몸에 가느다란 바늘을 꽂아넣어 기혈의 흐름을 조절하고 각종 효과를 일으킵니다. 이는 마음을 먹기에 따라서 좋은 목적으로도, 악독한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현재 레벨에서 제공하는 침술 효과의 증가량 30%]
[스킬 전용 옵션 ① : 시침 시뮬레이션]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HP : 1,100]
[현재 보유 중인 HP : 500]
‘후아.’
침술 스킬이 한 큐에 3단계나 올랐다. 덕분에 침술 효과도 15%에서 30% 증가로 급증!
‘이 정도면 진짜…… 건물주 안 부럽네.’
탕약이건 침술이건.
달랑 몇 퍼센트라도 효과를 끌어올리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특히, 시중에 파는 약의 효과를 5%라도 개선하기 위해 제약사들이 들이붓는 천문학적인 연구 자금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할 터였다.
‘게다가 나한테는 보너스 수명의 획득이 걸린 일이니까.’
침술의 효과가 조금이라도 올라가면 무조건 이득이 된다. 환자가 회복될 확률이 높아지니까. 보너스 수명을 얻을 가능성도 올라가니까. 그만큼 황족의 권한을 있는 대로 누리는 무병장수 만수르 라이프가 실현될 확률도 높아지리라!
물론 보상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이? 이봐들?’
그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딩동!
역시나 반응이 왔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노골적인 탐욕에 감탄합니다.]
[심장 : 야 이 인간 이제 대놓고 HP 달라고 눈치 주네ㅋㅋㅋ]
[허파 : 허허허허허ㅋ 파하하 tlqkf]
[대장 : 저도 대놓고 괄약근 트위스트 조질 수 있는데 말입니다?]
[간장 : 와나? 우리 이렇게 HP 자판기행임?]
[위장 : 자판기한테는 동전이라도 먹이는데 ㄹㅇㅋㅋ]
[콩팥 : 열등한 유기체는 동전 섭취를 못 한다구요 아ㅋㅋㅋ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의 탐욕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오장육부가 옛다 먹어라 하며 당신에게 800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 중인 HP : 1,300]
‘……후후후.’
역시 보상은 두루두루 풍족할수록 좋은 법이다. 보상이 살짝 모자란다 싶으면 적당히 눈치를 주면 만사형통! 라키엘은 입 끝에 걸리려는 탐욕의 승천 라인을 애써 억누르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환자를 살폈다.
“미구엘 씨? 어떻습니까?”
뾱!
환자, 미구엘의 장딴지에 박혀 있던 갈색 가시를 야물딱지게 뽑아냈다. 그제야 살짝(?) 흰자위를 드러내며 돌아가고 있던 환자의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헉, 허억…… 헉.”
“괜찮습니까?”
“어, 엄청, 엄청나게 아팠습니다?”
“그래서요?”
“좋았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잘못 들었다면 단단히 오해(?)를 빚었을 법한 발언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병실에 있는 그 누구도 오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놀라움과 감탄을 삼키며 환자와 라키엘을 쳐다보았다.
라키엘이 환자의 발등을 꾹꾹 주물렀다.
“많이 아팠다니 다행입니다. 그만큼 감각이 돌아왔다는 뜻이라서. 여기, 느껴집니까?”
“예, 예!”
“그럼 이곳은요?”
“거…… 거긴!”
“어때요?”
“간지럽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한번 일어나 봅시다.”
“……예?”
환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어나 보자니. 그게 될까? 감각의 복구에 기뻐하던 환자는 멈칫했다.
최근 며칠간 황태자에게서 신기한 침술 치료를 받으며 약간씩 다리가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가시에 찔릴 때만 발가락이나 다리가 움직여지는 정도가 최대였다.
그런데 갑자기 일어나 보자니. 망설였지만, 고민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황태자의 팔이 자신의 겨드랑이 아래로 쑥 파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자자, 천천히, 조심조심.”
“뎃?”
마음의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감행된 전격적인 부축이었다. 덕분에 환자, 미구엘은 얼결에 황태자의 어깨에 기대어 침상 옆으로 몸을 돌렸다. 침상 아래로 다리를 놓게 되었다. 그리고 불쑥…… 일어나졌다?
“……어?”
세상이 갑자기 낮아졌다.
아니, 자신의 눈높이가 높아졌다.
한동안 병상에만 누워서 지내느라 익숙해져 있던, 딱 병상에 맞는 눈높이가 아니었다.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사람들을 올려보기만 했던 그 눈높이가 아니었다.
미구엘은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같은 눈높이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그럼 천천히. 한 걸음씩. 해봅시다.”
황태자의 격려에 힘을 받았다. 여전히 황태자에게 거의 기대다시피 하고서, 한 발짝씩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처음엔 쉽지 않았다. 부들부들, 오랜만에 움직이는 다리에 힘이 없었다.
하지만 가능했다!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움직여졌다! 형편없이 떨리고 있을지언정, 자신의 다리가 땅을 딛고, 밀어내고, 내뻗어졌다!
“흑, 흐흑……!”
그의 눈매가 삽시간에 젖었다.
라키엘이 미구엘을 달랬다.
“잘하셨습니다. 정말 잘했어요. 이제 시작입니다. 너무 오랜만에 갑자기 걸어서 조금 힘드셨겠지만, 이제 꾸준히 재활 치료를 받으면 전처럼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흐, 흐윽, 감사, 가, 감사…… 합니다! 흐흑……! 이 은혜를 어떻게…….”
“안 갚아도 됩니다. 그저 앞으로의 재활에만 힘써 주세요. 전 그거면 됩니다.”
“흑, 흐흑……!”
미구엘의 울음이 더욱 격해졌다. 환자 스스로도 자신의 치료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던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하다고 라키엘은 생각했다.
‘실제로 회복 가능성이 낮았으니까.’
길랭-바레 증후군 치고도 굉장히 예후가 좋지 못한 편이었다. 까딱하면 호흡마비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을 뻔했으니, 말 다했다. 설령 운이 좋아서 호흡마비의 고비를 넘겼다 하더라도?
‘아마 영구적인 장애가 남아서 평생 걷지 못했을 거야.’
진행되던 예후를 보자면 거의 확실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기존의 마비된 신경을 대체할 새로운 신경 경로가 개척되었으니, 앞으로 재활만 꾸준히 하면 남은 인생을 알차게 살아갈 수 있겠지. 그 생각에 괜히 마음이 뿌듯해졌다.
물론 그는 혼자만 뿌듯함을 느끼고 끝낼(?) 생각 또한 전혀 없었다.
“다들, 봤지?”
그가 조원들을 돌아보았다. 남몰래 잔잔한 감동과 감탄에 젖어 있던 조원들이 라키엘의 물음에 찬물을 덮어쓴 것처럼 흠칫, 정신을 차렸다.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보다시피 우리, 전부 졸업시험에 통과한 것 같다?”
“……!”
듣고 보니 그랬다.
환자가 성공적으로 치료가 되었으니, 졸업시험도 대성공이다. 그러니 의사면허도 따낼 수 있으리라.
‘이게, 꿈인가.’
조원들은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원래는 거의 반쯤 포기하고 있던 졸업시험이었다. 난데없이 권력을 이용해서 졸업반에 편입한 황태자와 같은 조로 묶이던 때부터,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은 마비증 환자의 치료를 덜컥 맡아 버렸던 때부터였다.
이건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막막하고, 암담했다. 한편으로는 황태자를 원망하기도 했다.
처음엔 분명 그랬다.
한데 보다 보니 아니었다.
‘황태자 이 사람의 치료법은…… 처음 보는 괴상한 방식인데 분명히 효과가 있어.’
자신들은 짐작도 못 하던 환자의 마비 원인을 밝혀내고, 호흡마비를 예견해서 대처하고, 마침내 환자가 걷게 만들었다.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감사의 마음도 들었다.
말 그대로…….
“내 활약이 아니었다면 졸업시험에 실패했을 테니까.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
본심을 정확하게 지적당한 켈로드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나머지 조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향해 라키엘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면 너희들, 나한테 은혜 좀 갚자.”
“……예?”
은혜?
무슨 은혜?
모두가 의아함을 느끼는 순간.
“너희 모두, 나 덕분에 따게 될 의사 면허로 별궁 한의원에 취직하자?”
라키엘의 폭탄 선언, 아니, 납치(?) 선언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