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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171화 (171/468)

171화. 친절한 진료가 필요한 이유 (2)

‘뭐냐. 장난해, 지금?’

고막을 쿡, 쿡, 건드려 오는 이야기. 들으면서도 믿기지가 않는다. 다른 곳도 아닌, 내가 운영하는 한의원에서 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날이 올 줄은 정말로 몰랐으니까.

“…….”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까득 갈았다. 하지만 섣불리 나서지는 않았다. 조금 더 들어보자. 어떤 상황인지 살펴보자. 그것 또한 신입 의사에 대한 평가의 수단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생각으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귀를 기울였다. 저쪽, 노부인과 중년 남성, 그리고 젊은 예비 의사는 이쪽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아직 모르는 듯했다.

때마침 제일 먼저 들려온 말소리는 예비 의사의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안타깝지만 정말로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주셔야겠습니다.”

“예? 하지만 의사 선생님? 제발 부탁입니다. 부디, 이러지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미안합니다. 여기선 불가능할 것 같군요.”

“의사 선생님, 제발…….”

예비 의사는 뭔가 자꾸 안 된다는 이야기만 했다. 중년 남성은 거의 매달릴 기세로 애원하고 있었다.

‘혹시 둘이 아는 사이인가.’

라키엘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중년 남성이 돈이라도 빌리러 왔나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 예비 의사의 완강하게 거절하는 단호박스러운 태도가 딱 설명이 되니까.

한데 계속 들어보니 아니었다.

실상은 전혀 달랐다.

“이보세요, 파비오 씨? 저도 파비오 씨와 어머님의 사정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정말로 안 되는 겁니다. 떼를 쓴다고 해서 치매가 치료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이곳 별궁 한의원이 겉으로는 제법 규모가 커 보이지만, 그럼에도 보유한 병상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치료도 불가능한 파비오 씨의 어머님을 위해 그 한정적인 병상 중에 하나를 내어줘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러니까 검사라도 좀…….”

“진단은 조금 전에 드렸지 않습니까. 치매라고. 노망이 드신 거라고 말입니다.”

“그럼, 약이라도 좀…….”

“없습니다.”

예비 의사가 자르듯이 말했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치매에는 약이 없습니다. 있으면 벌써 드렸겠지요. 그런데 없는 걸 자꾸만 내놓으라고 하시고, 치료가 불가능한 어머님을 위해서 귀한 병상을 내어달라고 하시는 의도가 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이기적인 겁니다, 그런 요구는.”

“……예에?”

파비오 씨라 불린 중년 남성이 흠칫했다. 예비 의사의 뾰족한 일침이 이어졌다.

“아까도 말씀드렸지요. 이곳의 병상은 한정적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시죠. 그런 병상에, 치료될 가망이 없는 파비오 씨의 어머님을 눕혀드린다면 말입니다. 정말로 그 병상이 필요한 절박한 환자가 왔을 땐 어떡하실 겁니까?”

“…….”

“파비오 씨는 그저 본인들의 어려움만 생각하면 되시겠지만 말입니다. 이곳은 많은 환자가 다 함께 사용하는 의료시설입니다. 부디 그 점을 유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자, 잠깐만요?”

“더 드릴 말씀이 없군요. 죄송합니다.”

예비 의사가 슬쩍 고개를 숙이고는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파비오 씨가 무슨 용기를 낸 건지, 몸을 확 숙였다. 아니, 무릎을 대뜸 꿇었다. 그리고 손을 내뻗었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파비오 씨의 손아귀가 예비 의사의 가운 자락을 붙잡았다. 때마침 돌아선 의사가 걸음을 성큼 내딛고 있던 터라, 가운이 찢어진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부우우욱!

“……엇?”

“아앗?”

가운이 찢긴 의사가 흠칫했다. 파비오 씨도 찢어진 가운 자락을 움켜쥔 채로 사색이 되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예비 의사의 말꼬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파비오 씨가 다급히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니었으면, 뭐지요?”

“아니, 그게, 정말로 죄송합니다. 전 그저 의사 선생님께 더 드릴 이야기가 남아서…… 그래서 그저 조금 붙잡으려고만…….”

“후우. 진짜.”

“정말로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래도 제 이야기를 조금만 들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게는 말입니다. 그리고 제 어머니께는, 여기가 마지막입니다. 정말입니다.”

급기야 파비오 씨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선생님 말씀대로 제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신 게 맞습니다. 흔히들 노망이라고도 하지요. 그러니까, 별다른 희망이 없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제대로 된 병원에서 진찰이라도 한번 받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예?”

“하지만 파비오 씨, 제가 누차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이미 진단은 했다고요.”

“그래도…… 앞으로 어머니의 증세가 더 심해지지 않을 방법이라든가, 뭔가 더 잘 돌보아드릴 수 있을 방법이라든가…… 병원에서 지어주는 것은 아니더라도 약 비슷한 음식이라든가…… 조금이라도 좀…….”

“…….”

“그런 것이라도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병원을 전전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도 의사 선생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왜요?”

“돈이…… 모자라서 말입니다.”

파비오 씨가 고개를 떨구었다.

“시내의 병원들은 하나같이 너무 비싼 진료비를 요구했습니다. 막노동으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제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래서였습니다. 병원을 찾아갈 때마다 문턱을 넘어보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파비오 씨? 아까는 이야기가 다르셨지 않습니까?”

“……예?”

“어머니를 치료해드리기 위해서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면서요. 그런데 왜 진료비를 모으지 않았습니까?”

“그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하루 벌어서 하루를 겨우 먹고 산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진료비가…… 제 열흘치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못 삽니다. 당장 어머니를 열흘이나 굶겨드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예?”

“그럼 일을 더 많이 하셨어야죠.”

“……예?”

파비오 씨가 울먹이는 얼굴을 들었다. 예비 의사의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났다.

“그럼 찢어진 제 가운을 배상해줄 돈도 없으시겠군요. 맞지요?”

“예에? 그건…….”

“파비오 씨는 모르겠지만, 이건 제가 의료대학을 졸업한 기념으로 약혼자가 선물해준 가운입니다. 아직 열흘도 입지 못했지요. 그런 귀한 걸 찢어 버리신 겁니다, 파비오 씨께서는.”

“가운에 관련된 일은…… 정말로 죄송합니다, 선생님. 보시다시피 우리 아이가 이렇게 못 말릴 개구쟁이라서 말이지요.”

사죄를 한 이는 놀랍게도 파비오 씨가 아니었다. 지금껏 묵묵히 있던 그의 어머니, 노부인이 나서서 예비 의사를 향해 깊이 고개 숙여 사죄했다.

그래서였다.

더는…… 못 보겠다.

“그만. 거기까지. 그 잘난 가운 값은 내가 2배로 변상해주도록 하지.”

라키엘이 정원 모퉁이에서 걸어 나왔다. 그대로 뚜벅뚜벅 움직여 예비 의사와 모자 사이에 섰다. 그제야 이쪽을 본 예비 의사의 눈길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전하?”

“개원 시간에는 전하가 아니라 원장님.”

“…….”

“의료대학에서 눈여겨볼 때는 이런 태도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학생일 때와 의사일 때 사이의 인격의 갭이 조금 큰 타입인가 봐?”

“그, 그건…….”

예비 의사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를 보는 라키엘의 눈길은 여전히 냉랭하기만 했다.

화가 났다.

예비 의사의 거만한 갑질 때문에? 아니었다. 단순히 거만을 떨었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거나 실망감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감히, 내 한의원에서 환자를 내쫓아? 제대로 된 상담도 없이 진료를 거부해?’

의료인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환자를 문전박대해서는 안 된다. 설령 의료가 불가능하여 그냥 돌려보내는 일이 있더라도, 그 이유를 환자가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선의 형태로, 배려심을 토대로 해서 말이다.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국에서부터 그렇게 해왔다.

종종 일개 한의원에서는 감당이 안 되는 질환을 안고 오는 분도 계셨다. 그럴 때면 자신은? 환자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여기선 치료가 안 된다고. 꼭 큰 병원으로 가셔서 검사와 치료를 받으셔야 한다고.

그게 도리라고 여겼다. 그냥 여기선 치료가 안 된다며 성의 없이 돌려보내면? 그 환자가 결국엔 다른 ‘한의원’으로 갈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랬다가 자칫 귀중한 치료 시기를 놓치게 될 것이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정말로 열심히 설득해서 큰 병원으로 보내드렸다. 2~3일쯤 지난 뒤에는 개인적으로 확인 전화까지 드린 적도 있다. 그게 자신의 한의원을 믿고 찾아온 환자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예비 의사 놈은?

‘그런 노력을 전혀 안 했어.’

심지어 눈썰미도 없다.

진짜다.

정말로 눈썰미가 없는 놈이다. 혹은, 자신이 내린 성급한 진단 하나만을 믿고 다른 가능성을 보려 들지 않는 놈이거나.

“그쪽, 이름이 뭐였지?”

“발렌티노입니다, 전…… 원장님.”

“그래 발렌티노. 의료대학에서 졸업시험을 치를 때는 나와 다른 조였지. 당시에 나는 그쪽을 눈여겨봤어. 왜였을까?”

“…….”

“모두가 잠든 밤에, 아무도 없는 시간에, 환자 옆에 붙어서 죽을 후후 불어 떠먹이고 있더라고. 그 모습이 참 보기 좋더란 말이지.”

“그건…….”

“단지 졸업시험을 위한 거였나?”

“…….”

“뭐. 감상적인 이야기는 됐고. 실무적인 내용으로 넘어가지. 여기 환자분을 입원시켜드려.”

“……예?”

라키엘이 파비오 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비의사 발렌티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파비오 씨를 말입니까?”

“으음.”

“그게, 대체…….”

발렌티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치매를 앓는 노부인이야 황태자가 변덕에 가까운 동정심을 발휘했다고 치면 그나마 이해가 되긴 할 텐데…… 그 아들은 왜?

“어째서 말입니까?”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라키엘이 한쪽 입술로 웃었다.

“모르겠나?”

“예? 예.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으음…… 파비오 씨의 안색이 조금 누런 기미가 있다는 것만 빼면…….”

“진찰 안 했지?”

“…….”

“그럼 지금 기회를 줄 테니 진찰해봐.”

“아, 알겠습니다.”

발렌티노는 쭈뼛쭈뼛 파비오 씨를 일으켜 세웠다. 파비오 씨도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등장 때문인지 온몸이 잔뜩 굳어 있었다. 발렌티노의 어색하기 짝이 없는 진찰이 시작되었다.

“저, 으음, 그럼, 파비오 씨? 혹시 요즘 아프거나 불편한 곳이 있으셨습니까?”

“……예에? 어, 그게, 저, 조금 피곤하긴 한데.”

“그리고요?”

“종종 입맛이 없으면서 배가 당기듯이 아프고, 얼굴이 살짝 누렇게 뜨고는 하는데 말입니다.”

“많이 아프거나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입니까?”

“아뇨.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다른 증상은 없습니까?”

“예에. 딱히는…….”

“…….”

발렌티노는 조금 막막해졌다. 한편으로는 괜한 억측도 들었다. 사실은 파비오 씨에게 별다른 이상이 없는 건데, 황태자가 자신을 혼내기 위해 괜히 진찰을 강요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슬쩍 부아가 났다.

내키지 않던 별궁 한의원 근무였다. 자신은 의료대학을 수료한 우수한 인재였다. 한데 이런 근본도 없고 역사도 없는, 한의원이라는 괴상한 곳에서 자신의 촉망받는 미래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안 그래도 불만이 많았는데, 이제는 아무런 병이 없는 환자를 진찰해보라며 괴롭힘을 가하다니. 이게 갑질이 아니면 뭔가 싶었다.

하지만 발렌티노는 그런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지금은 일단 위기만 모면하자 싶었다. 황태자를 돌아보며, 내심 떠올린 정답을 자신 있게 말했다.

“진찰 결과,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합니다.”

“그래?”

“예.”

확실하다.

아주 미약한 황달 증상, 그리고 피로감. 이런 것들이야 사실 뻔하니까.

“매일 이어지는 노동과, 막노동 근무 환경에서 접하는 술 때문에 간이 피로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당분간 휴식을 조금 취하면서 술을 멀리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애?”

“예.”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황태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땡. 틀렸어.”

“……예?”

“틀렸다고.”

“…….”

어째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라키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대뜸 파비오 씨에게 불쑥 다가갔다. 움찔 놀라는 파비오의 눈을 가리켰다.

“이거 보여?”

그가 가리킨 곳. 파비오의 푸른 눈동자 테두리를 따라 금색 선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었다. 마치 고리처럼 눈동자를 감싼 모양이었다. 그 황금색 고리를 가리키며 라키엘이 말했다.

“발렌티노? 그쪽이 알고 있을진 모르겠는데. 이건 카이저-플라이셔 고리(Kayser-Fleischer Ring)라고 불리는, 윌슨병(Wilson’s Disease)의 전형적인 증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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