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72화 (172/468)

172화. 환자와 의료인 (1)

윌슨병.

국제질병분류기호(ICD-10)로는 E83.0.

대한민국의 산정특례코드 V119.

이건 hepatolenticular degeneration이라고도 불리는, 체내의 비정상적인 구리 대사를 불러오는 유전질환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전자에 발생한 돌연변이 때문에 신체가 구리를 밖으로 배출하지 못하게 되는 질환이다.

‘원래 구리는 비타민만큼이나 인체에 필수적인 성분이지. 하지만 사람 몸이 당연히 그렇듯이, 구리도 과도하게 섭취될 경우엔 신체가 자연스럽게 구리를 배출하게 되어 있거든.’

보통은 간에서 만드는 담즙(bile)으로 구리가 빠져나가게 된다. 그런데 윌슨병 환자는? 체내에서 구리의 운반을 담당하는 세룰로플라스민(ceruloplasmin)이 모자라거나 거의 없다. 그래서 구리를 옮기지 못하고, 배출하지 못하게 된다.

즉, 구리를 전담하는 택배가 무기한 파업을 선언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신체에 구리가 쌓이면 많은 문제가 생기지.’

주로 간 질환이 나타난다.

담즙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구리가 간세포에 축적된다. 지속적인 세포 손상을 일으키며, 마침내 간경변증을 동반하는 만성간염, 세뇨관 기능장애 등을 불러온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신경증상이 일어나기도 하지. 주로 대뇌기저핵이 영향을 받아서 구음장애, 연하장애, 비정상적인 눈의 움직임, 미세운동장애 등이 생길 수 있어. 더 심해지면 근육 긴장 이상이라든가, 무도증, 정서불안, 조울증, 조현병까지 생길 수도 있고.’

그렇게 증상이 발현되었는데도 치료를 하지 않으면? 금방 위험해진다. 전격성 간부전이 발생하는 경우엔 치사율이 70%까지 치솟기도 하니까.

라키엘의 시선이 파비오 씨를 향했다. 파비오 씨의 푸른 눈동자 둘레를 따라서 만들어져 있는 황금색 링. 저것이 바로 윌슨병의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이건 카이저-플라이셔 고리라고 불리는, 윌슨병의 전형적인 증상이야.”

라키엘의 말에 파비오가 움찔했다.

예비의사 발렌티노 또한 흠칫했다.

‘윌슨병? 카이저-플라이셔 고리?’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의료대학에서는 배운 적 없는 증상이기도 했다.

“그런 게…… 있습니까?”

“으음. 잘 믿기진 않겠지만. 파비오 씨?”

“……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파비오가 허겁지겁 어색한 동작으로 예를 갖추었다. 라키엘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예를 표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황태자와 백성이 아닌, 의료인과 환자의 관계니까 말입니다.”

“하, 하지만…….”

“쓸데없이 예를 차리고 뭐하고 하다 보면 언제 진료를 합니까? 그런 거 질색입니다.”

솔직한 마음이었다.

격식이니 예의니 찾는 건 실제로 진료에 너무 방해가 됐다. 환자를 한두 명 진료하면 모르겠는데, 하루에도 수십 명씩 상대하다 보니, 예를 차리는 데에 들어가는 시간만 모아도 은근히 제법 됐다.

‘댁들은 본인 예의만 차리면 되지만, 나는 그걸 매일 수십 번씩 받아줘야 한다고 이 사람들아.’

그래서였다.

환자를 진료할 때에는 철저하게 의료인으로서. 황태자의 신분은 저 우주 너머로 훌쩍 던져놓는 게 편했다. 진료의 능률도 눈에 띄게 올라갔다.

라키엘이 물었다.

“어쨌건 파비오 씨? 당신의 눈동자 말입니다. 자각은 하고 있었습니까?”

“그…… 카이즈…….”

“플레이셔 고리. 당신의 눈동자 테두리에 새겨진 금색 고리 말입니다. 생긴 지 얼마나 됐습니까?”

“저, 그게…….”

잠시 기억을 더듬던 파비오가 천천히 말했다.

“처음 이걸 발견한 건…… 언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평소처럼 막일을 하는데 동료 중에 하나가 제 눈을 가리키며 이상한 게 생겼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거울을 봤더니…… 눈동자 위쪽에 초승달처럼 금색 선이 그려져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 후에는요?”

“금색 선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눈동자 아래쪽에도 생기더니, 앞서 위쪽에 생겼던 금색 초승달과 합쳐지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둥근 고리가 눈동자를 둘러싸게 됐다는 거지요?”

“예, 예, 황태자 전하.”

파비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처음엔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눈이 나빠지면 어쩌나 걱정도 했지요. 한데 별다른 불편함 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놔뒀겠지요. 당장 일하는 게 바빠서. 연로하신 어머니를 보살피려면 생활비를 벌어야 했으니까. 맞죠?”

“예, 전하…….”

“그럼 잠깐 손 좀 살펴볼 수 있을까요?”

“예에?”

“잠깐이면 됩니다.”

“제가…… 그래도 됩니까?”

“물론이죠.”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파비오가 손을 바지춤에 열심히 닦았다. 그리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손을 내밀었다. 마치, 이런 깨끗하지 못한 손을 감히 황족에게 내미는 행위가 죄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라키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굳은살로 가득한 파비오의 손을 덥석 잡고는 손목을 짚었다.

‘진맥.’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은근슬쩍 돌린 진맥 스킬의 결과가 나왔다. 라키엘은 검진표의 핵심이라 부를 수 있을 ‘종합소견’ 항목으로 시선을 던졌다.

[종합 소견 : 만성적 피로에 찌든 신체입니다. 윌슨병이 감지되었습니다. 환자가 34세 무렵 증상이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하였으며, 13번 염색체의 ATP7B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체내의 구리 배출에 장애가 생겼습니다.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증상의 첫 발현으로부터 약 2년 7개월이 경과되었으며, 구리 축적으로 인한 간세포의 괴사, 혈장(plasma)으로 배출된 구리의 신장, 각막, 뇌 축적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입니다. 이대로 방치 시, 구리 축적으로 인한 전격성 간염(치사율 70%)으로의 진행이 강력히 예상됩니다.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치료와 케어가 필요합니다.]

“…….”

생각보다 심한데.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곧바로 오장육부의 경고성 메시지도 떠올랐다.

딩동!

[당신의 간장이 환자의 간장과 상담을 마치고서 경악하고 있습니다.]

[간장 : 나 오늘 개쩌는 간장 만났음…….]

“…….”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건데.

라키엘은 자신의 내면(?)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간장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간장 : 저 아저씨 간장, 구리로 무장했더라? ㄹㅇ 청동기 시대 수준ㄷㄷㄷ]

‘……청동기? 어느 정도길래?’

[간장 : 장난 아냐. 간 조직 1g당 구리 수치가 0.25mg을 한참 초과했어. 광산 파면 구리 채굴도 가능할 듯.]

“…….”

그렇다면 확실하게 윌슨병이 맞다. 진맥 스킬의 종합소견, 그리고 오장육부 간장의 상담 결과가 명확한 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기, 전하?”

파비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고막을 콕 찌르고 들어왔다.

“혹시나 해서 말입니다…… 제가, 뭔가를 잘못해서 몹쓸 병에 걸린 겁니까?”

“…….”

잘못했느냐라.

파비오의 질문을 받은 순간, 라키엘은 잠깐 대답을 망설였다. 이내 상대가 최대한 상처받지 않도록 적당한 거짓말을 섞어서 말했다.

“잘못이라니요. 그런 거 전혀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잘못은 없습니다. 그저 불운했을 뿐인 거지요.”

“그, 그렇습니까……?”

“예.”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이게 유전병이라는 말은 못 하겠다. 특히 유전병을 진단받는 환자 옆에 환자의 어머니가 계시다면, 더더욱 그렇다.

‘분명 엄청나게 자책하실 테니까.’

세상 어느 부모가 그렇지 않을까. 자신이 물려준 유전자 때문에 자식이 아프게 됐다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미안해할까.

그래서였다.

윌슨병이 유전질환이라는 사실도, 발병률이 3만 명당 1명꼴이라는 정보도, 윌슨병 발병 보인자 수가 90명당 1명 정도라는 이야기도 굳이 꺼내지 않았다.

대신 훨씬 중요한 일에 집중했다.

“어쨌건, 이걸 그대로 방치하면 위험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치료를 위해 당장 입원하셔야겠습니다. 그리고 발렌티노.”

“……예?”

발렌티노가 어깨를 움찔했다.

라키엘이 그에게 명령했다.

“자네는 파비오 씨의 어머니를 보살피도록.”

“……예?”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치매 할머니를?

“그건…… 치료나 진료가 아니라 간병의 영역 아닙니까?”

“어. 맞아.”

“저는 의사입니다.”

“그래서?”

“어째서 의사가 간병 같은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거지?”

“그게…….”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라키엘이 칼로 자르듯 말했다.

“환자와 그 가족을 보살피는 것도 못 하는 의사가, 의료인으로서의 자격이 있나?”

“…….”

“지켜볼 거야. 이번엔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아, 알겠습니다.”

발렌티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아직도 잘 믿기지가 않았다. 윌슨병이라는 게 뭔지. 정말로 그런 병이 있긴 한 건지. 황태자가 괜히 자신을 혼내기 위해 저러는 건 아닌지. 상황 자체가 의심이 되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근로계약서만 아니었어도…….’

까드득!

의료대학 졸업과 동시에 반강제로 취직하게 된 별궁 한의원. 이곳에 오며 서명한 근로계약서 내용이 떠올랐다.

넉넉한 보수? 적당한 복지? 그런 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최초 출근일로부터 3년 동안은 다른 병원에 취직하지 못한다는 조항은 너무나 악랄하게 느껴졌다. 별궁 한의원이 싫다고 여길 때려치워도 3년은 백수로 지내야 할 테니까.

‘그거 너무 독소조항 아닌가?’

실로 악랄한 조항이다.

고용주의 횡포다.

하지만 항의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상대가 황태자니까. 제국 전체에서 황제를 제외한 일인지하 만인지상, 권력의 최정점에 군림하는 존재니까.

“……이쪽으로 가시죠, 부인.”

시무룩해진 발렌티노는 입원 병동으로 노부인을 모시고 갔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속에 불만만 쌓여 갔다.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를 돌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엇?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응? 식사.”

“그렇다고 화분의 꽃을 드시면 안 됩니다!”

……라거나.

“우리 파비오 어디 갔어?”

“예? 아드님은 다른 입원 병동에…….”

“우리 아들 어디 갔어?”

“입원해 있습니다. 이러지 말고 잠깐 앉아 계시죠.”

“우리 아가 어디 갔어?”

“…….”

“우리 아기가 집에 올 때가 됐는데. 내가 선물도 사뒀는데.”

“선물이라니요?”

“우리 파비오가 생일날 장난감 목마를 갖고 싶댔거든. 그런데 형편이 안 좋아서 못 사줬어. 그거 사줘야 해.”

“예에? 지금 아드님 나이가…….”

“일곱 살.”

“…….”

“우리 아가 어디 갔어? 선물 사뒀는데. 왜 안 와?”

“오늘은 안 올 겁니다. 입원 병동에서 잘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하지만 여보? 당신, 저와 아이만 남겨두고 왜 그렇게 일찍 떠나셨어요?”

“……예?”

“말해봐요, 여보. 저 혼자 아일 키우느라 너무 힘들었어요.”

“…….”

발렌티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러다간 끝도 없고 답도 없겠다.

‘그냥 무시하자.’

결심한 그는 간병인용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할머니가 뭐라고 하건 대꾸하지 않고 창밖만 구경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자체가 의미가 없을 테니까, 차라리 이게 낫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머리가 멍해졌다.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왔다.

‘오늘 신경을 너무 많이 썼군.’

치료도 안 되는 치매를 치료해달라며 매달리는 환자. 찢어져 버린 귀한 가운. 황태자에게 혼이 나기도 하고. 이렇게 치매 할머니나 상대하게 되고.

피곤한 하루였다.

졸음이 몰려왔다.

‘잠깐만…….’

눈 좀 붙일까. 어차피 할머니는 당장 아픈 곳도 없으니까. 그것이 발렌티노가 졸음에 빠지기 전, 얼핏 스스로에게 안겨준 면죄부였다.

“……엇.”

창가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던 발렌티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 해가 저물었을 무렵이었다.

‘너무 많이 잤나.’

그는 창밖으로 저물어 가는 노을을 보며 피로에 찌든 눈꺼풀을 비볐다. 시간으로 보아 이제 곧 입원 병동의 저녁 식사가 시작될 터다.

‘음식이나 받아와야겠네.’

치매 할머니에게 식사를 시킬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푹 흘러나왔다.

“할머님, 이제 제가 음식을 받아올 테니 잠깐만 여기서 얌전하게…….”

그는 고개를 돌리며 당부했다.

그러다가 그대로 멎어 버렸다.

차마 말끝을 맺지 못했다.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병실에 자신과 함께 있던 할머니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보이지가 않았다.

‘어?’

뒤늦은 깨달음이 몰려왔다.

발렌티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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