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73화 (173/468)

173화. 환자와 의료인 (2)

‘……어?’

발렌티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음을 느꼈다. 황급히 병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없다.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아까, 자신이 졸기 전까지만 해도 병실에 함께 있었던 할머니였다. 치매 환자치고는 그래도 사납진 않으셔서 안심을 했더랬다. 거동이 제법 불편해 보이기도 해서 더더욱 마음을 놓았던 터였다.

그런데 없다.

어디로 간 걸까.

‘큰일 났다.’

발렌티노는 자신의 심장이 급격히 뛰는 걸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이른 초봄의 밤은 쌀쌀하다. 얇은 겉옷만 걸친 노인이 버티기에는? 무리다. 동사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곳 별궁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넓다. 특히, 정원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과연 밤이 오기 전에 할머니를 찾을 수 있을까.

“…….”

콰당탕!

그는 의자를 박차고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쩌면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니, 그러기를 빌었다.

‘제발. 그냥 병동 안에서 헤매고 있는 거여야 할 텐데.’

그러면 괜찮을 거다. 별일 없는 해프닝으로만 끝나겠지. 그러기만 빌었다. 복도를 뛰고, 모퉁이를 돌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 병실, 저 병실을 이 잡듯이 살폈다.

그런데도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힐끔 창밖으로 엿보이는 하늘은 어느새 보라색에 가깝게 물들어 있었다. 곧 해가 진다. 이마에 흥건하던 땀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나 혼자서는 안 돼.’

그는 깨달았다.

혼자서는 못 찾는다. 그러기엔 남은 시간은 촉박하고, 바깥은 점점 더 쌀쌀해지고 있으며, 찾아야 할 범위는 절망적으로 넓다.

지금 계속 고집을 부리다간?

‘안 돼.’

결심했다.

곧바로 간호실로 뛰어갔다.

“저기!”

덜컹!

벌컥 뛰쳐 들며 소리쳤다. 간호사들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발렌티노는 거리낌 없이 외쳤다.

“환자가 사라졌습니다!”

“네?”

이쪽의 외침에 수간호사, 아니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사라졌다고요? 환자가? 어떻게요?”

“그게…….”

아주 잠깐 망설여졌다.

치매 할머니를 보살피다가 피곤하다며 깜빡 졸아 버린 자신. 그사이에 사라진 할머니. 이게 알려지면 자신은 비난받겠지. 황태자에게 엄청나게 깨지겠지. 어쩌면 별궁 한의원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할머니를 찾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겠다. 그게 책임을 지는 방법이니까.

결심한 발렌티노는 빠르게 말했다.

“치매 환자입니다. 연령은 60대 초반의 할머님이시고…… 키는 160센티미터 중반에 마른 몸매, 회백색 머리칼을 목 뒤로 묶으셨고요. 낡은 회색 스웨터를 입었습니다. 바로…… 제가 보살피기로 했던 분입니다.”

“가죠. 보살피던 병실 위치와 사라진 시간은요?”

아니스는 곧바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하지만 예비 의사를 책망하는 말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책망할 시간도 없으니까. 환자를 최대한 빨리 찾는 것만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래서였다.

아니스도, 다른 간호사들도 전혀 체면을 차리지 않았다.

“다들 알지?”

“네!”

아니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웨어울프 간호사들. 그녀들의 눈빛에 살벌한 야성의 빛이 떠올랐다.

다음 순간.

……콰드드득!

근무하던 20명의 웨어울프 간호사들이 모조리 늑대인간의 형상으로 변신을 감행했다.

“크르릉! 크릉!”

“워우우우우-!”

그녀들의 전격적인 변신 덕분이었다. 고요하며 정갈하던 별궁 한의원 복도는 삽시간에 와일드한 야성미가 흘러넘치는 저녁 6시 동물의 왕국으로 변모했다.

“……헉.”

발렌티노는 하마터면 다리가 풀려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난생처음으로 웨어울프의 단체 변신을 보았으니 압도될 법도 했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았다.

“할머님이 사라지기 전에 계셨던 곳은 3층 B1 병실이었습니다. 사라진 시간은…… 최소한 30분은 된 것 같고 말입니다!”

“크릉!”

늑대인간으로 변신한 아니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간호사들에게 턱짓과 눈빛으로 명령했다.

“크르릉! 컹컹!”

“월월!”

“워우우!”

20명의 간호사들이 순식간에 4인 1조의 울프팩(wolf-pack) 그룹 5개로 편성되었다. 그녀들은 조금도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룹을 편성하자마자 3층 B1 병실로 달려갔다. 차례로 병실에 들어가 코를 연신 킁킁거렸다.

“킁킁킁! 킁킁!”

“킁킁! 킁!”

늑대인간의 경이로운 후각이 병실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할머니의 체취를 감지했다. 기억했다. 그때부터였다. 본격적인 추적이 시작되었다.

“킁킁! 킁킁! 헥헥헥!”

간호사들이 바닥에 코를 박고 빠르게 이동했다. 복도에 뿌려진 갖가지 냄새 속에서 할머니의 체취를 가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동안 발렌티노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나 때문이야.’

피곤하다고 잠깐 눈을 붙이는 게 아니었다. 치매 환자가 곁에 있는데 그런 식으로 눈길을 떼면 안 되는 거였다.

‘나는…….’

과연 사람을 돌볼 자격이 있는 걸까. 그럴 준비가 되어 있던 걸까.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의사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건방을 떨었던 게 아닐까.

처음으로 회의감이 들었다.

그때였다.

“헥헥?”

앞서 가며 냄새를 맡던 수간호가 아니스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귀를 쫑긋 세웠다. 이쪽을 돌아보았다.

“끙끙!”

“예? 뭔가를 찾았습니까?”

정말일까. 아니스는 대답조차 없이 우다다 뛰어갔다. 발렌티노는 허겁지겁 뒤를 따라갔다. 복도를 가로지르고, 계단참을 오르내렸다. 그렇게 몇 개의 모퉁이를 돌았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뛰었을 무렵, 아니스가 어떤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아까 자신이 혼자 할머니를 찾을 때 지나친 적이 있는 병실이었다.

‘여기? 할머님이 계시다고?’

아니스의 눈짓으로 보아 그런 듯했다. 발렌티노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자 열리는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말소리는…….

“우리 아기, 참 예쁘게 자죠?”

“……!”

할머님 목소리다!

발렌티노는 반가움과 안도감을 느끼며 병실 안으로 뛰어들어가려 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그렇군요. 정말 그렇네요.”

할머님의 물음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병실 안으로 뛰어들어가려던 걸음을 다급히 멈추었다.

익히 아는 목소리.

‘……황태자가 왜 여기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잃어버린 할머님이 황태자와 함께 있었다니, 소름이 좍 끼쳤다. 그동안 병실에선 할머님과 황태자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우리 아기가 말이죠. 얼마나 착한지 몰라요. 좀처럼 자다 깨서 울거나 보채거나 하지도 않고. 아빠를 찾으며 칭얼거리지도 않고.”

“그런가요.”

“네에. 가끔은 남편이 함께 있어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원망이 들 때도 있거든요.”

“남편분께서 멀리 떠나신 겁니까?”

“네.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죠.”

“……아, 저런. 죄송합니다.”

“아녜요. 괜찮답니다. 제 남편도 떠나고 싶은 건 아니었을 테니까.”

“그런가요.”

“네.”

잠시 내려앉는 침묵.

발렌티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이 들어가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런 생각에 걸음을 들이려던 때였다.

“…….”

어느샌가 황태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다시금 덜컹 내려앉는 가슴. 그러나 어쩐지 황태자의 눈길은 까칠하지 않았다. 책망하는 기색도 달리 보이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아주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는.

쉿.

“…….”

조용히 있으라는 걸까.

그 사이, 할머님이 말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 우리 아기가 많이 아픈가요?”

“아뇨. 그냥 약간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듣고 있던 발렌티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야 깨달았다. 이곳이 파비오 씨가 입원한 병실이라는 걸. 지금, 저 할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

정작 본인은 치매를 앓고 있으면서, 대체 어떻게 아들이 있는 곳을 알고 찾아온 걸까. 그저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다가 운이 좋아서 찾아낸 걸까. 단순한 우연에 불과한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할머님이 오직 자신의 아들만을 지극히 걱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의사 선생님, 꼭 부탁드립니다. 우리 아들, 안 아프게 해주세요.”

“네. 노력하겠습니다, 어머님.”

“그런데 여보, 당신? 언제 돌아왔어요?”

“……어, 으음, 방금 돌아왔소?”

“어휴. 난 또. 당신이 영영 못 돌아오는 건 아닌가 걱정했잖아요.”

“그, 그랬소?”

“네에. 다시는 그 배 타지 마요. 아무래도 그 선장, 인상이 좀 이상해요.”

“하, 하하하. 그런가?”

“하여간. 매일 사람 걱정이나 시키고.”

“허허허, 허허.”

할머님의 말투가 순식간에 남편을 대하는 신혼 아내의 것으로 바뀌었다. 덕분에 살짝 당황하는 황태자의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그런 당황도 잠시, 황태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할머님의 말투에 맞추어 대답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보였다.

할머님이 상처받거나 실망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것도 나름 필사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황태자는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인데. 이런 병원 놀이 따위는 그저 유희거리밖에 안 될 텐데. 그런데 어째서 저토록 열심히, 정성을 쏟아붓고 있는 걸까. 대체 왜, 자신의 권력이나 명성에는 하등 도움도 되지 않을 일개 치매 할머니를 저렇게나 성심껏 마음으로 대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알겠다.

“…….”

아까의 나는 어땠던가. 의료대학을 졸업했다고 기고만장했던 자신은, 앞으로 재능을 마음껏 펼치리라고 자신만만했던 자신은, 어떠했던가.

발렌티노는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웠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를 보았다.

‘어?’

자신이 입고 있는 가운. 의료대학 졸업 기념으로 약혼녀가 선물한 가운. 하지만 아까 파비오 씨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찢어지고 말았던 가운 아랫자락이…….

‘기워져 있어?’

얼기설기.

비뚤비뚤.

그런데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고 빽빽하게 기워져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 깜빡 잠들기 전에 벗어서 곁의 의자에 걸어둔 게 다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찢어진 채였는데. 혹시 그사이에 누군가가 기워준 걸까. 어설프게 비뚤비뚤, 그런 와중에도 정성껏 꼼꼼하게.

언제?

누가?

“…….”

설마.

그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눈길을 던졌다. 황태자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치매 할머니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의 손끝에 거즈가 감겨 있었다. 아까는 저렇지 않았다. 마치, 어설픈 바느질을 과하게 열심히 해보려다가 바늘에 찔리고 찢겨서, 그 상처를 누군가가 방금 돌보아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걸 본 순간, 발렌티노는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통렬하고 시린 깨달음이었다.

‘오늘 나는…….’

어째서 그랬던 건가.

아까의 대응이 최선이었나.

정녕, 겨우 그것밖에 할 수 없었나.

그는 기워진 가운 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불현듯 떠오른 자각과 죄책감 앞에 스스로도 어쩌지 못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런 신입 의사를 바라보는 라키엘의 시선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이제 좀 의사다워졌네.’

라키엘은 흐뭇한 심정을 애써 감추었다. 쌀쌀한 바람 부는 초봄의 포근한 저녁이었다. 이제는, 파비오 씨의 윌슨병을 본격적으로 치료할 때가 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