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노가다는 나의 무기 (1)
‘윌슨병 이거, 쉽지가 않네.’
하루가 지났다.
지난날 과감한 탈주(?)를 감행하셨던 치매 할머니는 자신의 병실로 돌아갔다.
조금은 전과 달라진, 제법 의료인다운 각오를 품게 된 예비 의사 발렌티노의 적극적인 간호를 받으면서 말이다.
덕분에 이제 이쪽엔 온전한 책임만이 남게 되었다.
‘아드님을 건강하게 보살펴드리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라키엘은 전날 파비오 씨의 어머님과 새끼손가락 걸고 했던 약속을 떠올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메모지에 낙서를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윌슨병 치료의 핵심은, 지금까지 했던 치료들과는 접근 방법과 개념을 달리 가져가야 한다는 거야.’
욕심을 내어선 안 된다.
완치를 시키겠다며 덤벼도 안 된다.
왜냐.
‘윌슨병에는 완치라는 개념이 없으니까.’
애초부터 유전자의 이상 때문에 생긴 질환이 윌슨병이다.
그런데 사람의 유전자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즉, 평생 병을 지닌 채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건 치료라기보다는 평생에 걸친 관리의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는 거지. 마치 당뇨처럼.’
발병 원리와 질환의 종류가 완전히 다르지만, 치료에 대한 접근 자세는 당뇨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터다.
질환 자체를 완전히 없앨 수가 없다. 그러니 질환을 인정하며 평생 품고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건강한 일상을 누리려면? 적절한 약과 조절된 식단을 통한 평생 관리가 핵심이 될 것이다.
‘그게 제일 문제야. 딱 하나, 약.’
라키엘의 미간에 주름이 쑴펑쑴펑 새겨졌다.
‘윌슨병 치료에 쓰이는 D-페니실라민(d-penicillamine)을 여기서 만들거나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D-페니실라민은 페니실린을 통해 얻는 아미노산이다.
어쨌건 이게 체내에 과도하게 축적된 구리를 제법 잘 패는(?) 편이다. 직빵이란 소리다.
하지만 여기선 그걸 구할 수 없다.
‘그럼 미련 없이 패스.’
라키엘은 메모지에 x표를 죽죽 그었다. 현대 의학에서 쓰이는 윌슨병 치료제를 구하거나 만들 수 없다면? 답은 하나다.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구만.’
미간의 주름이 파이다 못해 그랜드캐니언 뺨을 왕복으로 후려쳤다.
할 수만 있다면 화타건 허준이건 모조리 데려와서 자문이라도 구하고 싶었다.
선배님들, 아니, 선생님들께선 탕약을 창안할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라고.
‘뭐, 그 시절엔 더 답이 없었겠지. 민간에서 쓰이는 방법을 참고하면서 직접 마셔보든가. 환자한테 먹여보든가. 몸으로 때워가면서 연구를 했겠지?’
하지만 자신에게는 더 좋은, 믿을 구석이 있다.
탕약 조제 스킬이었다.
‘내가 직접 조제한 탕약에 한해서, 자동으로 성분과 효능, 부작용까지 싸그리 파악해 주는 기능이 스킬에 붙어 있으니까.’
그러니 몸으로 때울 필요가 없다. 열심히 만들어보면 된다.
메모지 위를 거니는 라키엘의 손이 바빠졌다. 자신만의 윌슨병 치료 탕약을 야물딱지게 디자인했다.
‘이제부터 만들 탕약의 가장 필수적인 효능은…… 구리의 배출 촉진. 그리고 장내 구리의 흡수 억제. 구리 축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간부전을 해결하기 위한 간 기능 개선과 회복 독려. 거기에 장기적인 탕약 복용에 따른 부작용의 최소화까지.’
이 모든 요소를 다 잡아야 한다.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평생 먹어야 할 탕약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려면 들어가야 할 약재는 아마도…… 대황(大黃), 황련(黃連), 황금(黃芩), 단삼(丹蔘), 아출(莪朮), 그리고 계혈등(鷄血藤).’
결론이 나왔다.
라키엘은 가르딘 경을 불렀다.
“가르딘 경? 우리 어쩐지, 제법 오랜만인 것 같다?”
“그러게 말입니다, 전하?”
“왜 그렇지? 사실은 매일 얼굴 보고 있는데?”
“정말로 그렇지 말입니다, 전하.”
“그러게 말야. 참 이상한 기분이야.”
“…….”
“어쨌건, 오랜만에 탕약 좀 같이 만들어보자. 재료부터 준비해줘.”
“알겠습니다, 전하.”
이제는 탕약 조제에 제법 짬(?)이 찬 가르딘 경이었다. 덕분에 탕약에 투입될 약재의 기본적인 손질과 준비까지 믿고 맡길 수 있었다.
물론 탕약을 달이는 건 직접 해야 했다.
‘당연하지. 이게 제일 핵심이니까.’
같은 약재를 쓰더라도, 약재의 비율이 달라지면 약효가 바뀐다. 약재의 투입 순서에 따라서도 효능이 달라진다.
심지어 탕약을 달이는 방법만 바꾸어도 약의 성질이 변하거나, 달이는 시간, 초탕인지 재탕인지에 따라 효과가 갈리기도 한다.
그래서였다.
약재의 배합과 비율, 투입 순서, 달이는 방법의 차이까지. 그 모든 변수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비교하기 위해서는 직접 불 앞에 쪼그려 앉아야 했다.
‘아. 라면 끓여 먹고 싶다.’
불 앞에 쪼그려 앉아서 보글보글 끓는 약재를 멍 때리면서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라면 생각이 났다.
‘냄비에 물 보글보글 끓이고…… 스프부터 털어 넣고…… 면 넣고…… 모자란다 싶으면 대파 좀 송송 썰어 넣고…… 살짝 덜 익었을 때 불 끄고 냄비 채로 김치랑 후루룩. 면 다 먹으면 밥 말아서 또 후르릅. 남은 국물에 쏘주 한잔하면서 티비에 축구 틀어놓으면…… 후우, 미치겠네.’
한국에 있던 때가 떠올랐다. 참 좋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꿈이다.
라키엘은 입가로 흐르려는 침을 서둘러 닦아내고는 탕약 조제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첫 시험 탕약을 완성했다.
반응은 곧바로 왔다.
딩동!
[당신이 직접 조제한 탕약을 감지하였습니다.]
[탕약 조제 스킬 옵션 : 성분 분석을 발동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답은 예스였다. 라키엘의 시선이 왼쪽을 향했다. 성분 분석 옵션이 잽싸게 발동되었다.
[탕약 조제 스킬 옵션 : 성분 분석을 발동합니다.]
[스캔 중]
[3…… 2…… 1…….]
[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딩동!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소리. 그 직후, 시험 탕약에 대한 내용이 주르륵 떠올랐다.
[시험 탕약 Ver.1]
[유효 성분 : 안스라퀴논, 피시올, 센노시드 A, 살비아노릭산, 기타 등등…… 바이칼린, 우고닌, 베타시토스테롤, 어쩌고저쩌고……이거저거…… 블라블라…… 등등]
[성상 : 적갈색의 액상]
[효능과 효과 : 극도의 쓴맛을 선사함. 그 외 미약한 간장 보호, 위십이지장궤양 억제, 확실한 미각 멸망 등등]
[용법, 용량 : 1회 200ml, 1일 3회 식전에 복용]
[사용상의 주의사항 : 다음 환자에게는 가급적 투여하지 말 것 - 모든 인류]
[부작용 : 본 탕약은 미약한 간장 보호와 위십이지장궤양 억제를 위해 인간의 미뢰돌기를 스턴 상태로 만들어 미각을 멸망시키는 효력을 지녔으므로, 제정신을 지닌 인간이라면 투여를 즉각 중지하여야 함]
[저장 방법 : 알아서 잘]
[사용 기간 : 자기 인생에 더 이상 미각이 필요 없겠구나, 인생의 쓴맛을 통해 삶의 의지를 하드코어하게 확인하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대환영♡]
[제조자 :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
빌어먹을.
‘역시 한 큐에 쉽게 갈 수는 없구나.’
눈앞에 떠오른 시험 탕약 1차 버전의 정보를 보며 라키엘은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사실 이게 당연한 거였다.
아무도 만들어본 적이 없는, 심지어 화타나 허준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윌슨병 치료 탕약을 창조하는 일이었다.
쉬울 리가 없다.
편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이 정도는 충분히 각오했다.
‘겨우 한 번의 실패야. 앞으로 얼마나 더 이렇게 해야 할지 모르니까, 벌써부터 실망하진 말자.’
그래도 먹고 죽는 약이 아닌 게 어딘가 싶었다. 라키엘은 곧바로 두 번째 시험 탕약을 준비했다.
아까와 배합을 살짝 다르게 하였다. 열심히 달였다. 적절하게 식혔다. 따라내고, 탕약이 담긴 용액을 노려보았다.
역시나 또 반응이 왔다.
딩동!
온세상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와 함께 탕약을 감지했다는 메시지와 선택창이 떠올랐다. 예스를 선택했더니 곧바로 성분 분석이 발동되었다.
‘이번엔 어떨까.’
그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서 정보창을 바라보았다.
[시험 탕약 Ver.2]
[유효 성분 : 크리소파놀, 알로에 에모딘, 밀티론, 기타 등등…… 시토스테롤, 베타시토스테롤, 어쩌고저쩌고…… 잡다한 거…… 이거저거…… 등등]
[성상 : 흑갈색의 액상]
[효능과 효과 : 아주 미약한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 하강, 극도의 떫은맛을 선사함, 복용한 인간의 띠꺼움 수치 5,000배 증가]
[용법, 용량 : 먹고 싶은 대로]
[사용상의 주의사항 : 다음 환자에게는 투여하지 말 것 - 인간 및 유사종족 전체]
[부작용 : 본 탕약은 콜레스테롤 살짝 때려잡자고 극한의 떫은맛을 선사함으로써, 인간의 띠꺼움 수치를 5천 배 증폭시켜 인간관계의 극적인 단절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5cm 두께로 얼굴에 바른 썬크림보다 확실하게 인간관계를 차단시켜 줍니다. 아싸 지망생이라면 망설임 없이 원샷! 당신도 될 수 있어요, 인류 No.1 아싸!]
[저장 방법 : ……굳이?]
[사용 기간 : 인생에 환멸이 느껴질 때, 절대적인 고독을 맛보고 싶을 때면 24시간 츄라이 츄라이ㅋ]
[제조자 :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
나는 대체 뭘 만든 걸까. 사실 난 약보다는 독약 제조에 재능이 있었던 건 아닐까.
두 번째 시험탕약의 정보를 보며 라키엘은 사무치는 회의감에 스며들었다.
귓가에는 오장육부 놈들의 와글와글 쑥덕거림도 들려왔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이 창조한 시험탕약을 보며 ‘매우’ 즐거워합니다.]
[심장 : 야야 다들 웃지 마라. 표정관리 해. 잠깐 당장 드러나는 결과만 가지고 사람 함부로 평가하는 거 아니다. 그래서 예전엔 성적표에도 아름다운 뜻을 각각 담아서 수우미양가를 붙여주고 그랬잖냐.]
[허파 : 흐프흡…… 빼어날 수?]
[대장 : 우수할 우?]
[간장 : 아름다울 미?]
[위장 : 양호할 양?]
[콩팥 : 사람인 가?]
[심장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허파 : 흐퍼흐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장 : 앜ㅋㅋㅋ 뼈 부러지네ㅋㅋㅋㅋㅋㅋㅋㅋ]
[간장 : ㅋㅋㅋ사람인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위장 : 팩트로 패지 말라고ㅋㅋㅋㅋㅋㅋㅋ 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을 보며 엔돌핀을 마구마구 생산합니다.]
[오장육부가 성원의 마음을 담아 당신에게 500 HP를 옛다 먹어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 중인 HP : 1,800]
……나는 진심으로 니네가 쟈빌론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해.
‘이 독한 새x들…….’
그렇게 이 악물고 사람을 패야 했냐.
라키엘은 깊은 산 속 옹달샘에서 아라비아 유전처럼 쑴펑쑴펑 터진 눈물샘을 꽉 붙들어야 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결코 포기하지 말자고. 이제 겨우 두 번의 실패라고.
‘실패? 오히려 좋아. 두 번의 과정을 거치면서 배합이 바뀌면 효과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그게 가장 값진 결과물이니까. 그러니까 계속 시도하면 될 거야. 할 수 있어. 가보자고.’
긍정의 힘을 꾹꾹 담았다.
시간은 있다.
돈도 있다.
자신의 의지만 꺾이지 않으면 된다.
굳은 일념으로 계속 시도했다. 탕약을 달이고, 결과물을 확인하고, 실패의 쓴맛을 다시며, 다시금 불가에 쪼그려 앉아서 다음 재료를 준비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엿새, 열흘이 지났다. 계속해서 시도하고, 또 시도했다.
그동안 탕약 조제 스킬의 레벨이 몇 번인가 상승했다.
그리고 마침내 보름째 되는 날이었다.
딩동!
또다시 실패를 경험한 직후였다. 성분 분석표를 보며 98번째의 쓰린 입맛을 다시는 순간.
[탕약조제 스킬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다시금 레벨 상승 메시지가 떠올랐다. 지난 며칠 사이에 몇 번인가 본 내용이었다.
한데 그 뒤로 이어지는 내용이…… 조금 달랐다?
[탕약조제 스킬이 11레벨에 도달함에 따라, 스킬의 등급이 상향됩니다.]
‘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 사이, 계속해서 메시지가 눈앞을 채웠다.
[스킬명 : 탕약 조제]
[단계 : Lv. 11 (중급)]
“…….”
레벨 표시 뒤쪽에, 예전엔 없던 등급 표시가 생겼다. 변화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당신은 수많은 경험과 탕약 달이기 노가다를 통하여 탕약 조제 스킬을 중급의 경지로 올려놓았습니다.]
[스킬 등급 상승 특전이 부여됩니다.]
[새로운 스킬 옵션이 개방됩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② : 약재 배합 미리보기 - 탕약 조제를 실행하기 이전에, 준비한 약재의 배합과 비율에 따라 어떠한 효능의 탕약이 만들어질 것인지를 대략적으로 미리 살펴볼 수 있습니다.]
‘……뭐어어?’
98번째 연이어진 실패. 수많은 배합과 비율을 조합해도 실마리가 잡히지 않던 윌슨병 치료 탕약의 레시피. 막막함에 지쳐 가던 라키엘의 눈이 번쩍,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