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노가다는 나의 무기 (2)
눈이 번쩍 뜨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라식 수술을 받은 심봉사의 기분이 이런 걸까. 혹은, 아무 기대 없이 샀던 로또가 콱 1등으로 당첨되는 느낌이 이런 걸까.
‘미친. 대박.’
라키엘은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눈두덩이를 부볐다.
[스킬 전용 옵션 ② : 약재 배합 미리보기 - 탕약 조제를 실행하기 이전에, 준비한 약재의 배합과 비율에 따라 어떠한 효능의 탕약이 만들어질 것인지를 대략적으로 미리 살펴볼 수 있습니다.]
‘미친. 미친. 진심 미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11레벨을 찍으면서 중급의 단계로 올라선 탕약 조제 스킬. 이놈에게 새로 붙은 옵션의 내용을 살펴보자니, 절로 침샘이 탐욕의 세레나데를 불러제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탕약 만들기 노가다를 안 해도 된다는 뜻?’
지금까지는 노가다를 해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게 탕약 조제 스킬의 한계였으니까. 내가 직접 만든 탕약에 한해서만 자동으로 성분을 분석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환상종 뽀복이를 동원해도 성분 분석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거기에도 단점이 있었다. 뽀복이가 죽었다가 부활하는 과정을 몇 번만 거치면 금방 지친다는 것이었다.
‘부활에 생각보다 체력이 많이 소진되는 듯했으니까. 많아 봤자 하루에 세 번? 그 이상은 좀 힘들어 보였어.’
그리하여 결국, 탕약 조제 스킬만 열심히 써야 했다. 셀프로 만든 탕약에 한해서는 성분 분석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을 믿고서였다.
물론 힘들었다. 아니, 생각보다 훨씬 빡쎘다. 온종일 불 앞에 쪼그려 앉아 탕약을 달이고, 결과를 확인하고, 실망하고, 또 새로운 배합을 짜서 달이고의 반복이었다.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만들기 전에 미리 배합의 결과를 대략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는 거지?’
이런 꿀 옵션이 또 있을까. 라키엘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서 재료를 착착 꺼냈다.
‘일단은 내가 생각한 가장 기본적인, 클래식한 배합부터 다시 가보자.’
일명 장군풀이라고 불리는 대황. 깽깽이풀이라는 별명을 지닌 황련. 만주나 아무르, 몽골과 동시베리아 지방에서 잘 자라는 황금. 적색 뿌리를 지닌 단삼. 거기에 파혈거어(破血祛瘀)와 행기지통(行氣止痛)에 효능이 있는 아출까지.
거기에 몇몇 자잘한 약재를 소량씩 섞어 보았다.
‘자, 시작은 이렇게.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면 옵션이 발동되는 거지?’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 순간이었다.
딩동!
[정리되어 조제 준비를 마친 약재가 포착되었습니다. 해당 약재의 배합으로 옵션 <② : 약재 배합 미리보기>를 실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하지!’
응답은 곧바로 왔다.
[탕약조제 옵션 ② : 약재 배합 미리보기를 실행합니다.]
[포착된 약재를 조합하여 만들어질 탕약의 효능과 부작용을 계산합니다.]
[로딩 중]
[……1%]
‘오, 오오.’
두근두근, 콩닥콩닥. 심장이 탭댄스를 추는 가운데 라키엘은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꼴깍꼴깍, 꿀떡꿀떡. 마른침을 삼켜가며 자신이 생각한 기본 배합의 결과를 기다렸다.
그런데…….
딩동!
[로딩 중]
[……1.1%]
“…….”
뭐지, 이 속도는.
뭔가 쌔한 느낌이 스멀스멀 피어 올라왔다. 한데 어째서 불행한 예감은 매번 그림처럼 찰싹 들어맞는 건지. 쌔하던 느낌은 곧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
딩동!
[로딩 중]
[……1.2%]
‘야이 씨!’
울화통이 울컥. 라키엘은 비로소 깨달았다.
‘이거 로딩 속도가 개판이구만.’
거의 1분에 0.1% 정도씩 깔짝대며 오르는 듯했다. 보고 있자니 1분마다 시시각각 늙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이건 운영체제가 윈도우 98도 아니고. 지가 무슨 도스(DOS)야? 8비트 컴퓨터야?’
어린 시절, 동네 컴퓨터 학원에 처음 갔던 날의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동시에 위기감도 쑴펑쑴펑 치솟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거, 그냥 쓰기엔 너무 쓰레기 옵션이 아닌가 말이다.
‘1분에 0.1 퍼센트 로딩이면…… 결과를 보는 데에 1,000분이 걸린다는 소리니까…… 1,000분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대략 16시간 30분 이상…… 차라리 그 시간에 탕약 끓이고 말지!’
비로소 깨달았다.
이 옵션, 이대로는 못 쓴다.
장점이라고는 불을 피워 탕약을 직접 끓이는 귀찮음을 덜어주는 것밖에 없다. 그나마 다른 일을 하면서 계속 로딩을 돌려놓을 수 있다는 정도? 그것 외에는 별다른 장점이 보이지가 않았다.
‘시간이 너무 걸려. 이건 좀 아니야. 하지만…….’
내게는 그걸 극복할 방법이 있지.
……꿀꺽.
라키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문득 떠오른 기막힌 해결법 때문이었다.
‘그거, 엄청 아파서 싫은데.’
하지만 지금은 달리 뾰족한 수가 없겠다.
딩동!
[로딩 중]
[……1.3%]
어오, 로딩 메시지를 차라리 끄고 말지. 이거 100% 되기까지 기다리다간 환갑 잔칫상이 차려져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결심한 라키엘은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안주머니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던 꼬슴이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저기, 꼬슴아?”
“……코올…… 꼬슴……?”
“응, 잘 잤어?”
“꼬슴! 뿌르르르! 꼬슴!”
“괜히 자는 중에 깨워서 미안한데, 가시 하나만 빌려줄 수 있어?”
“꼬슴?”
“검정색, K-맛 가시로.”
“꼬스슴? 꼬슴?”
“알아, 엄청나게 아픈 거. 그런데 지금은 그게 꼭 필요해서. 부탁해.”
“꼬슴!”
힘차게 대답한 꼬슴이가 통통한 궁디에 힘을 빡 주며 뿌르르 떨었다. 이내 검정색 가시 하나가 뾱, 하고 떨어져 나왔다.
“꼬슴! 꼬스슴!”
“고마워. 넌 임무 완료했으니까 다시 들어가서 코 자자.”
“꼬슴!”
“그래, 굿나잇.”
꼬슴이를 다시금 안주머니 속 꿈나라로 돌려보낸 라키엘은 검정색 가시를 집어들었다. 절로 심호흡이 나왔다.
“후우.”
검정색 가시를 찌르기 전에는 언제나 긴장감이 피어난다. 어쩔 수가 없다. 진짜 차라리 뒈지고 싶을 정도로 아프니까. 온몸을 와플 기계에 집어넣고 꽉, 해 버리는 기분이 드니까.
딩동!
[로딩 중]
[……1.4%]
“…….”
저 로딩창 속도계, 내가 박살 내고 만다 진짜.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은 라키엘은 검정색 가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허벅다리 살이 많은 부위를 향해 가볍게 내리꽂았다.
푝!
‘……거어어엉어억!’
찌르자마자 허벅다리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지는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해 왔다. 그야말로 영혼 덤블링 출타를 부르는 K맛 고통!
하지만 참았다. 헛되이(?) 기절할 수는 없었다. 이를 꽉 깨물었다. 시야가 온통 총천연색으로 물들었다. 춤을 추었다. 빨간색과 파란색과 노란색이 초록색을 집단으로 폭행했다. 조명이 켜졌다가 꺼졌다가. 초신성이 폭발하면서 암흑의 우주가 펼쳐졌다.
‘으그읍! 그급!’
그렇게 얼마나 고문 같은 고통을 견뎠을까. 마침내 기다렸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당신의 신진대사가 ‘8282 모드’로 급가속됩니다.]
후우욱-!
그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폭발적인 혈류량이 전신을 휘감았다. 모든 세포가 잠에서 깨어나 우사인 볼트로 빙의했다. 뇌세포가 스파크를 튀겨댔다. 생각의 속도가 경이로운 급가속 급발진을 선보였다.
그 결과는…….
딩동! 딩동! 딩동동!
[급가속 로딩 중!]
[8.5%…… 11.7%…… 21.2%…… 53.8%……!]
[로딩창이 한계를 초월한 속도에 찢어집니다!]
‘이거지!’
라키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걸 위해 견뎠던 고통이다. 새록새록 피어나는 보람 속에서 눈을 부릅뜨며 로딩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100%!]
[로딩 완료]
딩동!
[탕약조제 옵션 ② : 약재 배합 미리보기의 로딩이 완료되었습니다.]
[포착된 약재의 배합으로 만들어질 탕약의 효능과 부작용을 안내합니다.]
기다렸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라키엘은 결과창에 주목했다.
[약재 배합 미리보기]
[예상되는 효능 : 간장 보호, 항균, 항진균, 생리불순 완화 등등]
[예상되는 부작용 : 변비 유발, 장내 유익균 전멸 등등]
“……흐음.”
라키엘은 결과창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결과물이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원하는 효능을 제대로 담아내지는 못하였다.
‘그럼 이건 폐기. 다음 배합으로는…….’
슥슥, 슥!
다음 재료를 쓸어 담았다. 저울에 올려 가며 배합과 비율을 조절했다. 스킬 옵션을 발동했다. 메시지를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는 장인정신 뺨치는 고집을 담고 있었다.
‘황금배합, 오늘 안으로 반드시 찾아낸다!’
♣
……라는 집념 덕분이었다.
“저기, 제가 궁금한 점이 있는데 말입니다.”
이곳은 탕약 조제실 창문 바깥. 네 명의 의사가 창틀 주변에 두런두런 모여 몸을 숙이고 있었다. 의료대학 졸업시험에서 라키엘과 다른 조 소속이었던, 그래서 그동안 라키엘의 의술을 사이비라고만 여기던 자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창문 안쪽의 라키엘을 향해 있었다.
“전하께서는 왜 저렇게 애를 쓰시는 겁니까?”
신입 의사 한 사람이 물었다.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창문 안쪽, 탕약 조제실에서는 황태자가 갖가지 한약재를 소쿠리에서 꺼내고, 저울에 달아 보고, 뒤섞은 후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허공을 노려보는 걸까. 혹은 집중하며 무언가를 고뇌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짐작이 가는 점은 있었다.
그건 바로, 황태자가 진심으로 애를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푹!
“……흡!”
가시로 스스로의 허벅다리를 찔러가며 졸음을 참고 있는 저 모습만 보아도 확실하다. 게다가 가시가 얼마나 아픈지, 황태자는 얼굴이 벌게지며 식은땀을 흘리기까지 했다.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혹시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다른 신입 의사가 물었다.
그러자 아까부터 질문세례를 받은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마치, 황태자에 대해서는 자신이 제일 잘 안다는 듯이.
“아니. 전하께서 저러실 때는 누구도 못 말리네. 어설프게 말리려고 말을 걸었다간 오히려 혼만 잔뜩 날 테니까.”
가르딘 경의 입가에 쓴웃음이 피어났다.
“내가 그랬으니 말이지.”
“가르딘 경께서요?”
“으음.”
가르딘 경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자신의 까마득한 의료대학 후배들을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나도 전하의 치료법에 많은 의문을 품었지. 놀라고, 경악하고, 의심하기도 했네. 하지만 지켜보니 느껴지더군. 내가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 말일세.”
“편견…… 이라시면?”
“자네들은 의료대학의 가르침만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건가?”
“물론…….”
“옳지. 하지만 다른 방법이라고 해서 무조건 틀린 건 아니지 않겠는가.”
“아.”
신입 의사들의 눈빛에 작은 놀람과 깨달음이 서렸다. 가르딘 경의 말이 이어졌다.
“결국 우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지식과 기술을 연마한 사람들이야.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살리는 것이라는 뜻이지. 그런데, 그 길이 오직 하나만 있는 외길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전하께서 걸으시는 길도 우리와 같은 목적지를 지니고 있겠지. 저 모습을 보면 느낄 수 있지 않나?”
“…….”
신입 의사들은 다시금 창문 안쪽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황태자가 검정색 가시로 자신의 허벅다리를 야물딱지게 찌르고 있었다.
푸욱!
“긥!”
“…….”
암만 봐도 자해 같은데.
하지만 누구도 가르딘 경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의료대학의 까마득한 대선배니까. 게다가 저토록 연구에 매진하는 황태자의 모습을…… 부정할 수가 없었으니까.
‘어쩌면 우리는 조금 편협한 시각으로 이곳을 보고 있던 건 아닐까.’
별궁 한의원이라는 이곳. 어쩌면 생각보다 나쁘진 않을지도. 의술을 펼치는 데에 학파와 근본부터 따지는 것이 어쩌면 오만한 자세였던 것일지도.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모두의 황태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그리고 이날 오후.
라키엘은 불타는 집념과 고집 끝에 마침내, 윌슨병의 체내 구리 축적을 해결할 사상 최초의 특효 한약, ‘구리멸망탕(copper-滅亡湯)’을 개발해냈다.